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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황지우의 ‘허수아비-모기경(經)’

기자명 김형중

모기와 인연에서 생긴 일화 통해
화엄경 가르침 시화한 독특한 시

한글판 ‘화엄경’(동국역경원, 서울, 1985)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몇 줄 위에
모기 한 마리, 너 이 높은 곳을
어케 올라왓뇨, 앉아 있었다
주저주저하다가
손끝으로 눌러 밀어버렸다
언더라인이 된 붉은 순교자
그로부터 몇 년 뒤
이곳으로 이사와서
책짐을 푸는데 다른 잡서(雜書)들 밑에
납작하게 깔려 있는 화엄경,
다시 그곳을 펴보았으나
그곳, 참된 이치에 의지하지 않고 세상 구원하는
이를 본다면, 이 사람은 모양만 집착하여
어리석은 의심 그물만 더하고
나고 죽는 감옥에
얽매이리라

이 밥통, 벌써
수미산 상봉(上峰)을 날고 있는
그 모기를 잡아오겠느냐

황지우(1952~현재)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80년대 한국시단의 두드러진 현상이 황지우가 주도한 해체시의 대두이다. 해체시는 그 이전 시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 형태를 철저히 파괴하여 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던져주는 충격적인 시풍이다.

선사들 ‘할’ 형식으로 시 결구
생동감 있는 새로운 형식 창조
세상 구하겠다는 위정자 풍자

시인은 전남 해남 태생으로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다니면서 1970년대 학생운동으로 감옥을 드나들었고, 그의 ‘화엄광주’는 1980년 5·18 광주의 참사를 서사시적으로 절제된 언어와 불교 용어를 동원한 종교적 수사로 피울음으로 낭자했을 광주의 아픔을 화엄의 꽃으로 장식하여 침착하게 승화시킨 품격 있는 시이다.

황지우 시의 철학적 배경은 불교적 선사상이다. 맏형 홍연우는 스님이고, 아내 또한 학담 스님의 재가제자이다. 시인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지낸 진보적 지식인이다.

그의 시집 ‘게 눈 속의 연꽃’에 나타난 불교시는 ‘뜰 앞의 잣나무’ ‘구름바다 위 운주사’ ‘화엄광주’ ‘허수아비’(9수)가 있다. 5·18광주민주화항쟁으로 중생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고요한 산사의 선방 똥방석에 앉아서 참선만 하고 있는 승려들을 향하여 일갈하는 시 ‘허수아비-똥방석’과 ‘허수아비-모기경’은 선사의 선문답에서 ‘일러라’ ‘가져 오너라’ 하고 외치는 선사의 할(喝)하는 형식을 가져다가 시의 결구로 삼아 생동감 있는 새로운 시 형식을 창조하고 있다.

‘모기경’은 시에서 밝힌 대로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의 경전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모기와의 인연에서 생긴 일화를 통해 ‘화엄경’의 가르침을 시화한 독특한 시 형태이다.

여름밤에 ‘화엄경’을 읽는데 모기가 나타났다. 망설이다가 책 위에 앉은 모기를 손끝으로 눌러서 죽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이사를 가서 다시 ‘화엄경’을 펴보니 그때 모기가 죽어 피로 언더라인이 된 부분에 부처의 교훈적인 말씀이 나타나 있다.

‘수미정상게찬품’ 원문은 “설사 백천 겁 동안에 여래를 항상 본다 하더라도 진실한 이치를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이를 본다면 이 사람은 모양만 집착하여 어리석은 의심 그물만 더하고 나고 죽는 지옥에서 얽매이리니 눈 어두워 부처님 보지 못하리.”이다.

모양과 형식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눈이 어두워 부처의 진리를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사의 윤회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밥이나 축내는 밥통, 거짓 위정자들아 ‘화엄경’ 수미산 정상에서 부처님 설법회상에 참석했던 그 모기를 모셔 와서 물어봐라. 하고 선사가 어리석은 제자를 일깨우기 위해 호통 치는 모습을 모방하여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위정자를 고발한 시이다.

꼭두각시 허수아비 인생, 거짓과 위선의 탈을 쓴 위정자를 향해 ‘모기한테 물어봐라’라고 한  마지막 구절은 시인의 활구(活句)다. 그래서 시의 제목이 ‘모기경’이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366호 / 2016년 1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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