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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작은 동물과 인연을 맺은 까닭은 ③

“금강앵무도 염불을 따라하니 어찌 불성이 없다 하겠습니까”

▲ 대만 스님들이 불광산 숲길에서 염불을 하고 있다.

“빈승은 단지 우리가 세간의 인연조건을 갖추고 생명을 존중하고 아낀다면 모든 인연 있는 중생은 불광산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광산을 찾는 불자와 관람객들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동식물들을 감상하셨는지요?”

어느 한번은 제가 미국에 있었는데 제자 의공이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라이파 2세’가 죽어서 스님 100여명이 독송해 주었는데 사리가 많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얼른 “의공아! 이 일을 절대 알려서는 안 된다. 불광산의 개에게서도 사리가 나왔다고 알려지면 앞으로 불광산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말해 이 일이 알려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개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우리들이 조석예불, 염불, 발우공양을 하면 항상 우리를 따라 함께 하였으며 평소 제가 향을 피우고 염불하면 항상 방석 옆에 앉아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저와 동물들간의 기묘한 인연으로 인해 불광산에 조류공원과 채식동물원이 생겼는데 특히 룸비니공원 연못 옆에 사는 구관조, 금강앵무들도 모두 ‘아미타불’ ‘안녕하세요’ ‘차 드세요’ ‘빠이빠이’라는 말을 하여 수시로 관람객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중 몇 마리는 조석예불에서 하는 ‘삼귀의’와 심지어 ‘삼보가’도 부를 줄 압니다.

나중에는 불광산 채식동물원에 말, 양, 낙타, 타조, 공작, 꿩 등이 함께 살게 되었고 수백 마리의 온갖 조류들이 어른들과 어린이들을 기쁘게 하면서 생명교육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동물들이 많아지면서 냄새가 나니까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동물에게 전염병이 있다는 대만 사람의 통념 때문에 동물을 좋아하는 영회, 혜연 스님 같은 이들이 면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도 몇 번은 나서서 대변해 주기도 했지만 대중의 의견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혜연 스님과 의논한 끝에 공원에 있는 낙타, 타조, 노루, 원숭이, 각종 조류, 심지어는 금강 앵무까지 전부 남들에게 입양해 주었습니다.

홀가분하게 생각하던 차에 시베리아에서부터 날아온다는 청둥오리 세 마리가 불타기념관에 있는 쌍각루(雙閣樓)에 둥지를 틀었는데 며칠 사이 알을 3개나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쌍각루를 책임지고 있는 각기(覺紀) 스님한테 잘 보살피고 먹이도 준비해 주라고 일렀습니다. 알에서 부화한 어린 새끼 세 마리는 귀엽고 건강하게 잘 자랐고 연못 근처에 30여개의 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 청둥오리한테 이르기를 너희들이 근처 고병계(高屛溪)에 살고 있는 백로들과 잘 지내고 상대를 침범하지 않고 물을 오염시키지 않으면서 서로 별탈이 없다면 너희는 안전하게 이곳에서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동물은 마치 인간관계처럼 서로 상대를 침범하지 않고 각자 자기의 영역을 지키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만 민간에는 방생하는 전통이 있는 관계로 수십 년 이래로 제가 홍법포교하는 과정에서 신도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방생’하는 문제입니다. 방생은 공덕을 짓는 좋은 일이지만 여법하게 진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어느 한 노인이 어부에게 “내일 고기 좀 많이 잡아오세요. 방생할거에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방생을 하려고 고기를 많이 잡아 오라고 시키면 어망에 들어있는 물고기가 방생할 때가 되면 이미 절반은 죽을 것입니다.

“작은 새 좀 많이 잡아오세요. 내일 70살 생일을 기념해서 방생을 하려고요”라고 어느 노인이 새를 잡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는데 작은 새들이 새장에 오랜 시간을 갇혀 있으면 당신이 풀어줄 때 새장을 벗어나 날아갈 수 있는 새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부당한 방생방식은 자신의 공덕을 높이고자 도리어 수많은 생명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독사와 육식어류 외에도 심지어 개똥지빠귀를 사서 방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방생이 아니라 죽음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방생한 이후에 그 동물들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요? 방생보다 생명 보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동물의 생명을 보호해 주어서 그들이 안전한 환경 속에서 일생을 마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늘은 살아있는 생명을 아껴주는 덕목이 있다(上天有好生之德)”라는 가르침입니다. 송(宋)대의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시에 생명을 묘사한 내용이 있는데 매우 감동적입니다.

“내 살이나 중생의 살이나, 이름은 다르나 몸뚱이임은 다르지 않네.(我肉眾生肉 名殊體不殊) 본래 다 같은 목숨으로서, 단지 몸뚱이의 모습이 다를 뿐이네.(原同一種性 只為別形軀) 괴로움은 남의 몫이라 하고, 달고 기름진 것은 내가 필요로 하네.(苦惱從他受 甘肥任我需) 염왕의 판결이 어떠하다 하기 전에 스스로 자기 죄를 짐작함이 어떠리.(莫教閻老斷 自揣應如何)”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같은 목숨을 가진 존재로서 비록 신체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가 소중한 목숨을 가진 귀여운 존재이고 존중 받을 가치가 있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동물 간에는 감정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으로 자비와 관심과 평등으로 대하면 호랑이와 사자와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한의사를 스승으로 하고 있는 제자인 ‘장동’과 ‘조부’는 어려서부터 아주 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나중에 공부를 마치고 각자 다른 마을에서 한의원을 열어 세상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면서 늘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자주 찾아가 옛이야기도 나누면서 두 집안은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도 친하게 지내면서 집에서 기르는 개들조차도 친하게 왕래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소한 오해로 인해 두 집안은 시비가 벌어지고 다투게 되었으며 결국은 원수가 되어 왕래를 끊었습니다. 2년이 흐른 후 모두들 체면때문에 어느 누구도 먼저 잘못을 시인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 집의 개들은 여전히 사이좋게 왕래하면서 같이 놀거나 장난을 치면서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어느 한적한 엄동설한, 장씨네 집에 놀러 간 조씨네 집 개 ‘흰둥이’가 장씨 집 개 ‘검둥이’의 발톱에 난 피를 혀로 핥아주면서 측은해 하는 것을 본 조동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을 불러 모아놓고 “정말 부끄럽구나. 모두들 이것을 봐라. 개들도 의리를 지키면서 상대의 부족함을 마다하지 않는데 우리는 사람으로써 눈앞의 이익을 위해 의리를 저버렸다. 당장 조금 못마땅하다고 몇십 년의 우정과 의리도 전부 내던졌다. 우리 사람이 정말 개보다 못하구나”라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 장동은 온 가족을 데리고 조동의 집을 찾아갔으며 그 이후로 두 집안은 지난 오해를 다 털어버리고 다시 옛 우정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으신 뒤 “대지의 중생 모두가 여래의 지혜와 덕목을 갖추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춘 평등한 존재임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동물의 정과 의리가 사람보다 더 뛰어나고 오래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우리는 신권(神權)과 군권(君權)에서부터 인권(人權)으로 발전해 오면서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더욱이 ‘생존권’을 강조하면서 ‘평등한 생존권’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는 시대적인 사명이기도 합니다. 소위 말하는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에 차별이 없다”라고 함은 “남녀노소, 현명하고 어리석거나 잘살고 못살거나 축생과 귀신까지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연대자 동체대비(無緣大慈 同體大悲)’의 근본 가르침은 바로 불교의 중생에 대한 존중이고 생존권을 중시하는 가장 뛰어난 해석입니다.

모든 중생의 생존권리가 보장을 받게 되어야만 궁극적인 생태보호의 육성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공통된 인식을 갖고 모두 함께 생존권의 향상을 중시하면서 일체의 귀엽고 아름다운 생명체를 보호하고 함께 공생하며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십여년 전 불광회 전임 회장이기도 한 조류전문가 오삼웅(吳森雄) 박사가 저에게 불광산의 자연환경에서 살고 있는 조류가 100여종이 넘는다면서 “아마도 공명의 새(共命之鳥) 이외에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모든 새가 다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오색조, 푸른눈테해오라기, 직박구리, 에메랄드 도브(Emerald Dove), 검은턱할미새, 백로, 해오라기 새 등과 같은 보기 드문 진귀한 조류를 볼 수 있으니 가히 ‘생태의 낙원’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당시 불광산에 나무까치(Dendrocitta formosae)가 여러 마리 살고 있었는데 갓 태어난 어린 새를 자주 잡아먹어서 많은 새들을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새들의 킬러가 마음대로 다른 생물의 생존권을 침해하면서 억울한 생명을 다치게 할 수 있으니 이것들을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누군가 엽총을 우리에게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강력하고 힘센 무기로 상대할 일은 아니고 폭죽 같은 소리를 내어 겁을 주어 쫓아내거나 새총을 쏘면 놀라게 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어서 도대체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오 박사에게 상의를 하였더니 맹금류가 천적이니 오로지 매를 데려오는 방법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나운 맹금류를 키울 수는 없었기에 매의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룸비니공원에 틀어 두었더니 나무까치들이 불광산에서 정말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들이 불광산 낙원에서 계속해 안심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나무까치가 없어지고 나서 생각지도 않게 녹음된 이 매의 울음소리가 진짜 매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현재 불광산과 불타기념관의 공중에 수시로 3~4마리의 매가 하늘을 맴돌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행히도 아직은 어떤 악랄한 행위가 벌어졌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리어 마치 불타기념관의 호법신장처럼 이 지역 범주 내에서 순찰을 하면서 흉악한 동물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공중과 지상의 생물들이 상호존중하면서 평안하고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한 번은 매 한 마리가 참새 한 무리에 둘러싸여 놀림을 당하다가 결국 도망치듯이 달아나더라고 제자가 말해주었는데 정말 “매가 평지에 내려앉으니 새들한테 괄시를 받는다”고 하며 웃었습니다.

사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에 속해 수많은 육식동물들은 필히 살생을 통해서 생존해야 하고 만약 그렇게 먹이를 잡지 못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대자연의 생태적인 균형과 생물학적 사슬의 순환으로 빈승도 어찌할 수 없지만 최소한 제가 관할하는 범위 안에서 우리는 구역 내의 생명을 보호하여 그들이 평안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는 것에 대해 마다할 수 없는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불광산 개산 당시의 황폐한 땅으로 이어진 골짜기는 가시 있는 대나무가 얽힌 곳이라서 꽃도 피지 않고 새도 날아들지 않고 낮에는 벌레와 뱀이 출몰하고 밤에는 사방이 적막하여 오로지 온갖 동물의 우는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저는 부처님께서 계시니 무섭거나 외톨이라는 생각이 없이 모든 존재가 도반이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50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가 이곳에 토목공사를 하고 나무를 심어 환경을 보존해 왔더니 현재는 온갖 꽃이 만개하고 나비가 춤을 추고 새들이 날아들며 온갖 동물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67호 / 2016년 1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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