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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승가대학장 덕민 스님

“화엄 세계 공부 않고 탐진치 아집으로 생활하니 세상 혼란”

▲ 덕민 스님은 “자신의 청풍명월, 본지풍광이 부처님과 똑같다는 그 마음을 앉아 있는 자리에서 이뤄내면 그것이 바로 불교”라고 말했다.

塵埃楓葉滿室 隨掃隨有(진애풍엽만실 수소수유) / 然而不可敗掃 以爲賢於不掃也(연이부가패소 이위현어부소야) /若本無一物又何加焉 有詩錄呈(약본무일물우하가언 유시록정) / 簾捲穿窓戶不扃 隙塵風葉任縱橫(염권천창호불경 극진풍엽임종횡) / 老僧睡足誰呼覺 倚枕床前有月明(노승수족수호각 의침상전유월명)

부처님 열반 뒤 화엄 개념 등장
역대 임금 교재로 만든 ‘화엄경’
통일신라 문화는 곧 화엄의 꽃

세상 어지러운 것은 정치인들이
화엄의 세계 알지 못하기 때문
공부로 마음 밝혀 보살행 해야
부모노릇도 정치도 할 수 있어

티끌을 머금은 낙엽이 떨어져서 집에 가득하니 낙엽은 쓸면 쓸수록 자꾸 떨어진다. / 비질을 하면 자꾸 떨어지는 낙엽을 그래도 자꾸 쓸어서 모으는 것은 안 쓸고 그냥 놔두는 것보다 나아서 그런 것인가. / 만일 본래 한물건도 없다고 한다면 낙엽을 쓸던지 쓸지 않던지 거기에는 쓸고 안 쓸고 시비를 가릴 필요가 없다. / 여름에 친 발은 말아서 올린 채로, 구멍 뚫린 창문은 바르지 않은 채로 싸리문은 빗장을 채우지 않는 채로, 노스님 토굴 문틈 사이에 낙엽이 종대로 횡대로 바람에 휩쓸려서 왔다 갔다 하는구나. / 낙엽을 쓸다 지쳐서 낙엽 속에 묻혀서 선정 삼매 잠에 들어 버린 노스님을 누가 깨울 것인가. 동산에 달이 떠서 이마에 달빛 비치니 그때서야 노스님은 선정에서 깨어난다.

화엄세계를 옮긴 이 시는 소동파 선생이 읊은 것입니다. 이런 맑은 선시는 본래 청정한 법신자리가 바로 우리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가 준비되지 않으면 이런 선시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불교는 믿어가지고는 양이 안 찹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동산 노스님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침 청소하는 데 늘 선봉장을 서신 분입니다. 제가 13살에 범어사로 왔을 때, 노스님은 황금가사를 입고 아침, 저녁 예불에 절대 빠지지 않으셨으며 각 단 예불도 빠지지 않으시고 그렇게 열심히 하셨습니다. 겨울에는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공양을 드시고 나서시면 대중이 따라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빗질 자국이 보이지만 노스님의 빗질 자국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심의 삼매가 빗 끝과 조화를 이루어서 쓰시는 것인지 아닌지 흔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달이 뜨고 밤바람이 뜰의 대나무 그림자를 움직이지만 티끌도 움직이지 않는 풍경처럼 느껴졌습니다.

동산 노스님의 빗 자락은 미풍이 되고 법이 되어 지금도 범어사에 내려오고 있습니다. 동산 노스님은 금정산의 ‘청풍명월(淸風明月)’이셨습니다. 어렸을 때 밤에 나가서 그림자를 밟고 거니노라면 금정산에 걸린 달이 대웅전까지 내려와 대웅전 위에서 배회를 하는 듯했습니다. 동산 노스님께서는 금정산에 걸려 있는 밝은 달, 가을 갈대 억새꽃을 흔드는 청풍, 맑은 바람이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을 걸망에 집어넣으시고 남포동으로, 자갈치 시장으로, 온천장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청풍명월 공양을 올리고 팔기도 하면서 부산 시가지를 다니셨습니다. 그 청풍명월은 내 것이라고 하면 내 것이 되는 겁니다. 내가 달이 되고 내가 맑은 바람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동산 노스님은 걸망에 넣고 다니며 나누신 덕분에 범어사의 선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오늘 노란 은행잎이 물들어서 바람에 흔들리고 떨어지는 풍경을 보니 낙엽을 빗질하시던 노스님의 황금가사 자락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시가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동산 노스님의 얼굴이 청풍명월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청풍명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수행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아침, 저녁 노스님을 모신다 해도, 아침, 저녁 부처님을 모신다고 해도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아침에 도를 들어서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산 노스님의 얼굴을 밖에서 찾으시면 안 됩니다. 불교는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들이 법문하시는 내용이 가슴에 확 와 닿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청풍명월, 본지풍광이 부처님이나 동산노스님이나 똑같다는 그 마음을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좌복 위에서 다 이루어지고 성취된다면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이 공부를 해서 마음이 밝고 지혜를 얻어서 보살행을 실천해야 부모 노릇도 하고 정치도 하고 사회생활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대통령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부를 하지 않고 탐, 진, 치에 집착해 아집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범어사는 의상 스님, 원효 스님이 개산한 화엄도량입니다. ‘性圓融無二相 不守自性隨緣成(법성원융무의상 불수자성수연성)’이라, 법의 성품이 둥글고 둥글어서 두 모습이 없다,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서 모양이 이루어진다, 화엄의 세계를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 원융한 생명의 줄기가 사물 하나하나에 다 들어가서 그 줄기가 연결되어 여러분이 이 자리까지 오신 겁니다.

석굴암에서 1년 동안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새벽 예불을 가면 달이 부처님 머리 위로 넘어가는데 손으로 잡을 듯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석굴암에서 20~30리 떨어진 동해 바다이지만 바다를 스쳐가는 물고기들의 지느러미 소리가 들린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맑고 깨끗한 도량이니까 자연과 더불어 가장 가까운 상태에서 교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입니다. 범어사에 오면 분위기가 또 다릅니다. 천년고찰 범어사는 중국의 지엄선사로부터 화엄학을 배워서 돌아 온 의상 스님이 창건하셨습니다.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은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셔서 지금도 범어사에는 의상대와 원효대가 남아 있습니다. 범어사의 청풍명월은 바로 여러분들의 것이고 여러분의 몫이고 그것이 화엄의 세계입니다.

화엄의 세계라는 개념은 부처님 열반 뒤 600년이 지나 대승보살의 출연과 함께 등장합니다. 용수보살이 용궁에 가서 ‘화엄경’을 가져오는데 ‘상본 화엄경’은 경전이 너무 방대해서 삼천대천세계를 가루로 만들어서 쏟아놓는 것보다 방대하다고 합니다. ‘중본 화엄경’은 1조9만5040자라고 해서 역시 방대합니다. 우리가 보는 ‘화엄경’은 ‘80화엄경’이라고 해서 용궁에서 가져온 ‘화엄경’ 가운데 엘리트 공부하는 레벨에 맞게끔 구성된 ‘화엄경’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가면 육군사관학교 교재가 있고 논산훈련소 가면 훈련소 교재가 따로 있는데 육군사관학교 교재를 갖고 논산훈련소에서 가르치면 레벨이 맞지 않습니다. 화엄이라고 하는 것은 제왕들의 교재입니다. 역대 임금들의 교재입니다. 통일신라의 문화가 화엄의 세계 문체이고 화엄 세계의 꽃입니다. 그런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화엄의 세계를 모르니까 이렇게 세상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음미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화엄의 문체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난 이후 이 진리가 대중들의 근기에 맞지 않으니까 혼자 설하시고 혼자 음미하시고 21일 동안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열반 뒤 6세기가 지나 대승학이 발달되어서 인도의 마명, 용수 등 화엄을 실천하는 보살들에 의해 전개됩니다. 즉 화엄의 세계는 부처님의 세계인데 부처님이 이 화엄 세계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그 수준에 맞는 보살들이 부처님과 인터뷰를 해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화엄경’으로 만들어서 설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전부 보살들이 보살의 실천을 설합니다. 그래서 대방광은 우리 마음의 본체가, 모양이, 그 작용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한 생각을 내어서 한 생각을 실천하는 그 마음을 표현합니다. 부처님이 대방광의 마음을 깨닫기 전에는 우리하고 똑같았습니다. 그 마음을 깨닫기 위해 꽃을 심고 물을 주고 키웠습니다. 그 과정이 바로 ‘화’이고 그것을 깨달아서 이 우주의 법계성이 무늬로 색깔로 만들어가는 보살의 실천을 장엄한다는 ‘엄’이 됩니다. ‘경’은 그 많은 화엄을 글자로 다 실어서 갖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방광불화엄경’ 제목 자체에도 그 진리의 법계성이, 물을 주고 꽃을 피우고 결과를 맺는다는 뜻이 다 포함됩니다.

‘주역’에 보면 여섯 마리의 용이 나옵니다. ‘주역’에서는 용이 정치를 합니다. ‘화엄경’을 실천한 화엄보살들도 모두 용으로 지칭됩니다. 마명보살이나 용수보살은 모두 용이며, 신라의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도 모두 용입니다. 석가탑, 다보탑에도 용무늬가 있습니다. 신라 제왕들의 교재는 ‘화엄경’이었습니다. 그 많은 ‘화엄경’이 제목의 일곱 자 안에 들어있으니까 ‘대방광불화엄경’ 제목 자체를 독송하는 것도 좋은 수행이 될 겁니다. 다시 말해 ‘대방광’은 화엄 법성의 이치를 이야기하고 ‘불화엄경’은 우리가 공부를 해서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이치가 들어 있습니다.

경주 감포에 가면 문무대왕릉이 있습니다. 문무대왕은 아들 신문왕에게 “나는 죽어 용이 되어서 왜군을 모두 막겠다”고 했다 합니다. ‘화엄경’ 법문을 왜군들에게 설해서 깨달아 돌아가게끔 하겠다는 의지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결코 죽이고 살생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용은 신비스럽고 볼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계절의 문체로 들어가서 우주 운행을 실천한다고 합니다. 일연선사가 쓴 ‘삼국유사’에는 ‘만파식적’이라는 피리가 나옵니다. 만파식적이라는 말은 만 가지의 파도치는 물결을 다 잠재우게 하는 피리라는 의미입니다. 문무대왕이 돌아가시고, 신문왕이 부모를 위해서 2년 만에 감은사를 지었는데, 바다를 지키는 해관이 신문왕에게 와서 동해 바다에 “밤에는 섬이 하나이고 대나무가 하나인데, 낮만 되면 섬이 두 개이고 대나무도 두 개가 되는 섬이 있다”며, 그 섬이 자꾸 감은사 쪽으로 오고 싶어 한다고 전합니다. 그 섬에 들어간 신문왕은 섬에 있는 용으로부터 대나무와 검은 옥대(왕의 허리띠)를 선물로 받습니다. 아마 그 용은 ‘화엄경’을 공부하는 스님일 겁니다. 만파식적은 화엄세계를 표현합니다. 기림사 쪽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는데 태자가 인사를 와서 부왕을 보니 옥대 속에 용이 살아있다고 표현합니다. 곧 ‘대방광불화엄경’은 대왕이 정치를 할 때 허리에 끼고 있는 중요한 경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신문왕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서 불어보니 왜적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장수까지 돌아옵니다. 질병도 없고 태평성대입니다. 그래서 만파식적을 신라 1호 국보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화엄경’이나 다름이 없다고 봅니다. 바로 이 ‘화엄경’을 정치인들이 허리띠로 찰 만큼 교재가 되어 참고서가 되어서 신라시대 화엄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경주에 지진이 일어난 뒤 서울 법회에 가니까 다들 괜찮은지 물으셨습니다. 실상은 우리 마음의 지진이 더 무섭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 만파식적을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하나 나눠드리고 동산 노스님의 청풍명월도 덤으로 넣어드리면서, 여러 큰스님들의 법문을 통해 이번 화엄대법회에서는 반드시 변화되는 불자가 되시기를 바라며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내용은 11월1일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된 53선지식 1000일 화엄대법회에서 덕민스님의 설법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368호 / 2016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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