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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수경 스님

첫 비구니 불학연구소장…전통과 미래 잇는 교량이 되다

▲ 수경 스님은 2007년 집필한 논문 ‘한국 비구니 강원 발달사’를 통해 비구니 승가교육의 역사를 집대성했다. “그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했던 시절, 비구니스님들은 더욱 교육에 매진했고 그 노력 위에 오늘날 비구니승가의 위상이 섰음을 알게 됐다”는 수경 스님은 “배우고 가르치려는 노력을 소홀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전율이 일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방대한 경전과 불서들. 눈 돌리는 곳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옛 스님들의 발자취, 그리고 그것을 연구해 놓은 2500여 년의 결실들이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경전과 불서들은 마치 보석같이 빛나고 있었다.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교학, 그 길에 동행하고 있었음이 비로소 가슴 벅차게 행복하고 감사했다. ‘교학의 길을 걷는 이가 없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음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을까.’ 세납 마흔다섯, 10여 년 간 걸어왔던 강사의 길. 비로소 이 길의 무게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조계종교육원 불학연구소장 수경 스님은 “일본 유학길에 오를 때만 해도 이 공부만 마치면 선방으로 달려가겠다는 생각을 마음 한 구석에 끌어안고 살았다”며 “하지만 그곳에서 비로소 가사로서의 자긍심이 생겼다”고 회고했다. 출가대중의 일원이 된 지 무려 20여 년, 선과 교가 둘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화두 참선에 대한 생각 한 자락이 늘 마음에 있었던 것은 출가의 인연이 화두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24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였지만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 초등학교 때 11살 차이의 언니에게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데 다른 사람도 그런가”라고 물었다가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고 면박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서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나는 누구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삶인가. 평범한 삶과는 다른 삶에 대한 고민은 좀처럼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철학서적으로 손이 갔고 고등학교 때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심취해 탐독하기도 했다. 출가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중학생 때 조계사에서 친구 따라 108배를 해보기도 했다. 부친의 생신날이 되면 부모님은 조계사에서 생일불공을 올렸다. 그럴 때면 부모님을 따라 절에 갔지만 학창시절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인천 용화사를 찾았다. 송담 스님의 법문이 있는 날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영원한 것이 없다는 이 말 뿐입니다.”

언제나 마음속을 짓누르고 있던 질문, 풀리지 않던 답답함이 가슴속에서 빠져나가는 듯 시원했다.

▲답답함의 원인을 찾은 것인가.
“그때까지 내가 찾아다닌 것은 영원한 어떤 것이었다. 그런데 영원한 것이 없다지 않은가. 그것이 해답이었다. 허망한 많은 생각 때문에 현재라는 시간들을 놓치고 늘 오지도 않은 미래를 향해 살고 있었다. 현재가 있어야 미래가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법회에서 ‘이뭐꼬’ 화두를 받았다. 송담 스님의 가르침은 마른땅에 흘러든 물줄기 같이 깊이 스며들어 메마른 흙덩이 같이 쌓여있던 의문들을 녹여주었다. 오랜 갈증을 풀어준 그 단비에 출가인연의 씨앗도 싹을 틔웠다. 용화사를 찾은 지 1년여 만이었다.

▲출가를 결심한 이유는.
“저렇게 높은 법상에 앉아계시는 큰 스님의 모습은 너무나 거룩해 보이는데 그 아래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심이 일었다. 나도 스님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 10월 대전 개심사에서 법일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화두정진을 위한 출가발심으로 가득 차 있던 수경 스님의 마음은 벌써부터 선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신도가 다가와 “‘마하살’이 무엇이냐”고 묻기 전까지는.

▲신도의 질문에 무엇이라 답했나.
“대답을 못했다. 모르니 대답을 할 수가 있나. 창피했다. 명색이 출가사문인데 불교에 대해 너무 모르는구나 싶었다. 최소한의 불교 공부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이 아닌 동국대에 입학한 이유는.
“이왕이면 강원보다는 대학에 가서 폭넓게 불교공부를 하고 싶었다. 사실 고등학교 졸업 후 희망했던 철학과의 꿈이 좌절되고 요업을 전공한 나는 이번 기회에 인도철학을 하고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화두정진 하겠다며 출가했는데 대학이라니. 송담 스님도 은사스님도 처음엔 손을 저었다. 그래도 어렵사리 허락을 구해 동국대에 입학했다. 경전을 보고 싶은 마음에 한문을 파고들었다. 졸업 후에는 더 깊이 있는 한문연구를 위해 현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이하 민추)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에서도 원전을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원전을 공부하려면 결국 강원뿐이었다.

▲ 수경 스님은 1997년 삼선승가대학장 묘순 스님으로부터 전강받았다.

▲왜 삼선승가대학을 택했나.
“상주강원을 가려면 민추 입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도 통학강원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민추에서 한문을 배우며 원전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곳은 삼선승가대 뿐이었다.”

매일 새벽 삼선승가대로 향했다. 오전 수업을 마치면 오후에는 민추에서 한문 수업을 들었다. 날마다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런 생활이 3년 즈음 이어지니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지만 그런 부지런한 모습이 승가대학장 묘순 스님 눈에 들었다. 4학년 화엄반에 올라갈 때 묘순 스님이 “중강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공부를 어느 정도 끝내면 선방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했다. 출가했으면 오직 참선수행 하는 것만이 스님의 길이라 여겼다.

하지만 맡은 소임을 허투루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강원과 민추에서의 학업을 병행하던 처지에 치문반 중강까지 맡았지만 대충할 수는 없었다. 잠을 줄여가며 수업을 준비했다. 주어진 책임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특히 한문의 뜻을 새기기만 하는 기존의 수업방법에서 탈피해 한문문법과 허사의 쓰임새를 설명하며 문장을 이해하도록 했다. 대학에서 배운 현대교육의 방식과 민추에서 익힌 한문 접근법도 강단에 접목했다. 

▲강사의 길엔 뜻이 없었음에도 15년간 강단에 섰다.
“중강을 3년만 하고 그만두려했지만 초창기 삼선승사대학에 강사는 학장스님과 나 둘 뿐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 가르치는 보람도 있었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종단유일의 통학강원이었던 삼선승가대는 2014년 폐교했다. 기본교육기관인 승가대학만큼은 대중생활을 통한 상주교육이어야 한다는 종단 방침에 따른 결정이었다. 출가자 감소로 학인수가 줄어든 것도 피할 수 없는 원인이었다. 하지만 삼선승가대학은 종단의 교육체계가 완비돼지 못했던 70~80년대 교육의 사각지대에 흩어져 있던 비구니스님들에게 유일한 희망과도 같았다. “은사스님 시봉이며 사중 소임 등 이런 저런 이유로 상주강원 입학이 어려웠던 비구니스님들이 먼 거리에서도 찾아와 배움에 동참했다”며 “특히 삼선승가대를 통해 부족했던 원전공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또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지금 포교와 복지, 교육 등 종단 곳곳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었던 만큼 삼선승가대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2002년 일본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학인들을 가르치는 동안에도 학문은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공부를 해야 학인들을 가르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잠시 강단을 떠날 계기가 필요하기도 했다. 교학으로만 일관했던 출가의 삶에 변화를 시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일본 유학 후 선방으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본 유학은 교학의 중요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는 전환점이 됐다. 류코쿠대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방대한 불서와 교학의 자료들은 교학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귀국한 스님은 삼선승가대학 강단으로 복귀했다. 학장 묘순 스님도 수경 스님의 귀국을 기다리며 자리를 비워 놓은 채 전강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사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강단에 섰다.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선방이라는 공간과 참선이라는 방편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경전의 내용과 수행의 내용이 다를 수 없듯 가르치는 이의 모든 행이 경전과 다르지 않다면 그 또한 수행과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방 갈 기회가 없었던 점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을 것 같다.
“미련이 있지는 않다. 출가 전부터 참구했던 ‘이뭐꼬’화두는 늘 마음공부와 함께 놓치지 않고 있다. 행주좌와어묵동정에 선이 있다는 말로 위로를 삼고 있다. 교학자라도 자기 수행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가르치더라도 내 소리를 할 수 있다. 선과 교는 함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꼭 특별한 틀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스스로 닦고 체화하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삼선승가대학 학감이었던 2007년 문화부장 소임을 맡았다.
“처음엔 많이 망설였고 사양했다. 어떤 기관의 행정소임을 맡아본 경험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탁연 스님이 첫 비구니부장이 된 이후 비구니부장 체계가 정착되어 가는 시기였다. 계속 고사한다면 어렵게 열린 종무행정 참여의 길이 다시 어려워질 수 있다는 주위의 권유에 결심을 굳혔다.”

▲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왼쪽 두 번째)은 수경 스님의 대학 스승이기도 했다. 몇 년도에 찍은 사진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수경 스님은 이 사진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왜 본인이 추천됐다고 생각하는가.
“나도 의아했지만 다들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활발한 성격도 아니고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하는 편도 아니었다. 다만 부장들 사이의 융합, 원만한 관계형성이 가장 큰 과제였을 것이다.”

총무원 집행부의 다른 부장들과 균형을 맞추면서도 비구니부장으로서 당당함을 세우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스님은 그 역할을 나름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임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2년6개월 동안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며 주목할 만한 성과들도 이룩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건축분과에 조계종 문화부장이 당연직 문화재위원에 위촉되도록 제도화시켰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59개 불교합창단이 동참하는 전국불교합창단엽합회도 발족시켰다. 사찰음식 백서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의 일환으로 충청지역 사찰음식을 조사해 발간하기도 했다. 수경 스님은 “모든 사업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불교중앙박물관 개관과 사찰음식 사업 등으로 문화부의 역할이 커지던 시기, 부서의 정체성을 찾고 역할을 정비하는데 일조했다”고 자평한다.

2009년 10월 문화부장의 소임을 내려놓은 수경 스님은 바로 다음날 가방을 싸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동안 미뤄 놓았던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박사논문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부장소임을 맡게 돼 공부를 미뤄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스님은 다시 ‘선요’를 펼쳐 들었다. ‘선요의 체계와 선사상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했지만 학계에서 ‘선요’는 여전히 취약한 연구 분야로 남아있었다. 특히 조사법문이다 보니 연구의 주제로도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료코쿠대학의 지도교수조차 “‘선요’는 박사논문을 쓸 만한 주제가 안 된다”며 다른 연구를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님의 생각은 달랐다. 고봉선사의 법문인 ‘선요’는 간화선의 핵심을 가장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힘이 되는 가르침이 ‘선요’에 들어있었다.

▲‘선요’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룬 성과는.
“한국불교의 핵심수행은 간화선이다. ‘선요’가 간화선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는 만큼 수행자에게 ‘선요’는 ‘서장’ 이상의 가치가 있다. 간화선지침서라는 일반적인 이해를 넘어 고봉선사의 법문에 조사선사상, 간화선의 정통성, 발심에서 무심삼매에 이르기까지 화두공부의 용공차제 등을 밝히고 있는 출가수행자의 필독서임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편지글 형태의 ‘서장’이 친절하게 수행의 길을 안내해 준다면 선 수행자를 대상으로 법문한 ‘선요’는 신심, 분심, 대의심이라는 ‘간화삼요’를 통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점과 화두참구의 방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출가할 때 가졌던 화두정진에 대한 원력이 논문으로 이어진 것인가.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강원시절 어느 경전보다도 '선요'를 좋아했고 '선요'를 보면서 가슴 설레었던 것이 기억난다. ‘선요’를 읽다보면 고봉화상의 법문을 직접 듣는 느낌이다. 논문을 쓰는 과정 자체가 화두를 통해 밖으로 달려 나가는 생각을 제어하고 ‘선요’의 가르침에 따라 내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이었다. 화두정진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는 선과 교가 함께 하는 나름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선(禪)’에 대해 갖고 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계기였다.”

석사논문에서는 백파긍선 스님의 필사본 ‘선요사기’를 토대로 ‘선요’ 29장의 본문이 61개의 법문으로 구성돼 있음을 밝히고 이에 대한 과단(분류) 작업을 시도해 부록에 수록했다. 박사논문 ‘고봉화상선요 연구’에서는 이를 다시 6종(種)으로 분류해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선요’에 등장하는 인용문을 토대로 ‘선요’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더욱 깊이 고찰한 것이다. 이를 통해 후학들의 ‘선요’ 연구가 더욱 깊이 있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수경 스님은 2015년 교육원 불학연구소장에 임명돼며 다시 한 번 종무행정을 맡게 됐다. 비구니스님이 연구소장에 임명된 것은 처음이었다. 비구니소장 임명 소식에 “연구소의 비구스님들이 사표를 쓸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큰 문제가 불거지진 않았다. “불학연구소의 주 업무는 승가교육과정 연구와 교재개발이지만 교육원의 다른 부서와 별개로 독립된 부서가 아니므로 교육원의 모든 업무와의 연관성을 가지고 함께 일하고 있다”는 수경 스님은 “승가교육이라는 종단의 백년대계 앞에서 승단의 두 날개인 비구·비구니는 상하,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서 협력해야 할 일불제자라는 인식이 확산된 결과일 것”이라 분석했다.

▲현재 불학연구소의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인가.
“교육원이 진행하고 있는 승가교육 개혁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에 대한 필요성은 승가대학 등 교육현장에서도 제기돼 왔던 부분이다. 다만 새로운 교육체계와 방법이 제시되고 그것이 교육 현장에서 적용되는 과도기이다 보니 여러 가지 어려운 점도 있다. 불학연구소는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 교육행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중간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현장의 강사스님들과 학인스님들의 소통을 통해 승가 교육이 체계를 잡아갈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이 불학연구소의 가장 큰 역할이다.”

▲교육원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과목이 너무 많아 내실 있는 교육이 어렵다는 목소리도 있다.
“승가대학도 변화의 노력을 해야 한다. 옛날의 교육방식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교육체계를 정착시키기는 힘들다. 옛 방식이 갖고 있는 장점도 분명 있지만 개선해야 할 부분도 있다. 시대가 바뀌었고 포교 대상, 출가자의 인식과 성향도 바뀌었다. 학장스님, 강사스님들의 의식도 이에 따라 변해야 한다. 새로운 교육체계와 방식을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문제를 발견하고 새로운 대안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승가대학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무엇이 있나.
“기본교육기관에서는 4년 동안 34과목을 이수하게 되어있다. 과목 수가 너무 많다보니 학인스님들이 한문원전을 볼 시간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원전 교육은 대학원 과정인 학림의 역할이지만 한문에 대한 기초가 부족한 까닭에 대학원서 공부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학인을 배출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런 강사들의 고충에 교육원은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완책을 마련할 것이다.”

1994년 개혁종단 출범 후 종단의 교육은 다시 한번 큰 변화의 바람 앞에 서 있다. 그 바람의 중심인 교육원에 몸담고 있는 수경 스님은 그야말로 하루에도 수 십 가지 일을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몇 시간 남짓한 인터뷰조차 짬을 내기 힘들어 결국 주말에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불학연구소에서 비로소 기자와 마주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시간 없음을 탓하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이 승가교육의 전통을 미래로 이어가는 튼튼한 다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비구니스님들의 위상이 교육으로부터 비롯됐듯 새로운 교육은 새로운 비구니승가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런 수경 스님의 마지막 당부가 긴 여운을 남긴다.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이 가장 심한 계층 가운데 하나가 종교계일 것입니다. 불교계도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 있지만 오늘날 비구니스님들의 위상은 교육을 통해 이룩한 결실입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가르치고 배우기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비구니스님들은 스스로의 위상과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종단 내에서 비구니스님들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는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교육에 매진한다면 주머니에 들어있는 송곳처럼 언젠가는 그 역량이 차별의 벽을 뚫고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종단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룩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미래의 ‘낭중지추’를 기다리며 전통과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승가교육의 가교를 만들어가는 수경 스님은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해가지도록 퇴근하지 못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융통성 없어 보여도 지계 철저하고 유머도 있어

내가 본 수경 스님

신사종합사회복지관장 지완 스님=수경 스님과 대학 동기다. 학창 시절 건강이 썩 좋지 않았지만 공부는 늘 열심히 했다. 계획적으로 시간을 쓰고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니 평생 강단에 서는 것이 썩 잘 어울린다. 학인들을 가르치는 입장이다 보니 진중함이 습이 되었지만 나름 유머감각도 좋은 편이다. 30여년 넘게 수경 스님을 보았지만 잘못된 것이 있으면 외면하지 못하고 원칙에 철저한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 모습이 어쩌면 융통성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순수한 열정이 있기 때문에 종단에서 소임을 맡으면서도 제 역할을 다 해낸 것이라 생각된다. 이 시대를 사는 수행자로서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은 만큼 불학연구소장 소임을 맡아 전통과 현대를 잇는 역할 또한 잘 해낼 것이라 생각한다.

조계사 사회국장 혜철 스님=삼선승가대 입학 전 사형들이 녹음한 스님의 강의 테이프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과 설명으로 핵심을 짚어 설명하셨다. 명확한 정리는 수업뿐 아니라 학인지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승가대학 학감으로 학인들을 지도하실 때에도 학인들 간 문제가 생기면 양측의 말을 치우침 없이 듣고 중재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스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더욱 커졌다. 무슨 문제나 고민이 있을 때 스님에게 상의하면 가장 쉬운 길이 아닌 가장 바른 길을 제시해주셨다. 그것이 당장은 더 어려운 길로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가장 바른 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언제나 고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스님을 찾게 된다. 사실 스님은 살갑게 감정을 표현하거나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성격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마주칠 때면 나누는 인사도 그저 말 한마디일 때가 많다. 하지만 스님의 눈빛에는 언제나 믿음과 격려가 담겨있기에 천 마디 말보다 더 힘이 된다. 조계사에 소임을 맡으며 가까운 곳에 스님이 계신다는 것이 마음의 든든한 의지처가 된다.

박종권 휴휴정사 신도=개심사 행자시절 때부터 스님을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계를 지키는 데 있어서 조금도 빈틈이 없다. 소소한 생활 습관조차 계에 어긋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이를 떠나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서울에 포교당을 연 후 지금까지 거처에 얇은 매트리스 한 장만 깔고 생활하는 모습만 보아도 수행자의 모습에 어긋나지 않는 생활이 몸에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도들에게는 언제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배운 만큼 실천하는 불자가 될 것을 당부한다. 포교당 규모도 작고 신도도 많은 편이 아니지만 명절이나 특별한 법회가 있는 날은 언제나 불단에 올렸던 음식을 이웃과 나누며 포교에도 힘을 쓴다. 요즘엔 매일 아침마다 부처님 말씀과 큰스님 법문, 그리고 마음 다스리는 글 등을 엮어 신도들에게 SNS로 보내준다. 시간을 아껴쓰는 습관이 몸에 밴 스님에게도 매일 아침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정성이 더없이 고맙다.

[1368호 / 2016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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