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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기 전에 국민의 뜻 경청해야

기자명 이중남

참담한 시국이다. 국민들이 선출한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스스로 임명한 적도 없고 법적 권한도 없는 몇몇 측근들과 공모해 자기 책임하에 있는 국정을 농단(壟斷)했다는 기막힌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창조경제니 문화융성이니 하는 뜻도 모를 구실을 내걸고서, 정관계의 핵심 수뇌들이 유신 이래 역대 정권에서 저질러졌던 각종 비리의 종합세트를 ‘창조적으로’ 완성해 오던 것이 하나 둘 들통나고 있다.

이로써 지난 수년간 여러 차례 드러났던 국가적 이상 징후들이 국정 시스템 마비에 기인했음이 분명해졌다. ‘이게 나라냐’는 손 팻말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던 당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정부에 항의하는 문구로서 처음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병든 국정의 맥을 정확히 짚고 정곡을 찔렀던 문구였다.

노자는 ‘도덕경’ 17장에서 통치자의 국정운영 수준을 네 등급으로 논했다. 최상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의 백성은 그저 통치자가가 있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太上, 下知有之]. 쾌청한 날씨에 유유히 순항하는 배에 오른 사람이라면 그저 여행을 즐길 뿐, 선장이 누구인지 관심 가질 필요가 없는 이치와 같다.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숭상하는 이러한 노장의 사상을 현대 대의제 민주정치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세 종류의 통치는 우리 정치상황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만큼 현실성 있다. 즉, 두 번째 등급의 통치에서 백성은 통치자를 친하게 여기고 칭송한다[其次, 親而譽之]. 그 다음 등급에서 백성은 통치자를 두려워하며[其次, 畏之], 최악의 등급에서 백성은 통치자를 업신여긴다[其次, 侮之]. 노자는 이어 통치자에게 신의가 부족하면, 백성들 사이에 불신이 생겨난다는 말을 덧붙인다[信不足焉, 有不信焉].

민의로 선출된 역대 모든 정부는 두 번째 유형을 통해 통치권을 획득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집권 말기로 갈수록 하나같이 네 번째 유형으로 추락하는 궤적을 보였다. 그래서 임기 말이면 대통령들은 어김없이 국민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한 뒤 칩거에 들어가는 것이 일종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언뜻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말도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는 것뿐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최악이다. 현직 총리에게 이임하라는 메시지조차 전달하지 않은 채 차기 국무총리를 지명하는가 하면, 반응이 여의치 않자 국회에서 차기 총리를 제청해주면 임명하겠다는 뜻을 비쳤다가 며칠 만에 또 입장을 바꿨다. 사과회견에서 검찰 조사에 기꺼이 응하겠다고 공언한 뒤에, 검찰에서 조사요구서를 보내오자 이제는 불응한다. 중간에 낀 법무장관이 사의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요컨대 그는 스스로 신의를 잃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으로 인해 발생한 혼란을 수습할 공직사회, 나아가 그 모든 충격을 최종적으로 떠안아야 할 우리 사회 전체에 불신과 무질서를 조장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제 청와대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11월25일 현재) 11월26일 다시 전국적으로 200만 국민이 운집하는 시위가 예정되어 있다. 청와대에 가만 앉아 있어도 국민들의 목소리가 잘 들릴 터이니, 더 큰 욕을 당하기 전에 국민의 뜻을 경청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난 11월18일 고창 선운사에서 열린 조계종 교구본사주지협의회에서 ‘박근혜-최순실 사태’와 관련한 시국성명을 채택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모든 종교는 그것이 뿌리박고 있는 사회의 일부분이므로 종교 지도자들은 사회질서가 붕괴되고 불신이 만연하는 사태를 방지해야 할 도덕적 책무를 진다. 교구본사 주지스님들의 현명한 결정에 박수를 보내며, 미혹한 세상을 일깨울 대성일갈이 적기(適期)에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중남 마하이주민지원단체협의회 운영위원 dogak@daum.net
 


[1369호 / 2016년 1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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