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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새겨준 나눔 행복, 삶의 궤적에 옮기다

안준아 화엄불교대학 총동문회장

▲ 안준아 화엄불교대학 총동문회장은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될 때 행복해진다는 진리가 불자들 몸에 배길” 기원한다.

단명(短命)할 것이라 했다. 할아버지까지 8대가 아들 하나로 이어진 손이 귀한 집안이었지만 모두 자식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등졌다. 대(代)는 억척스러웠고, 억척스러운 만큼 아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집안 꼬맹이를 두고도 길게 살지 못할 거라 수군거렸다. 긴 시간 이어진 두려움이 집안에 가시처럼 박혀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절로 이끌었다. 부처님 앞에서, 단명할 거라는 자식의 장수를 빌었다. 이루 말할 수 없던 그 간절함은 이내 삶으로 스미었다. 어머니는 밥을 지을 때 늘 쌀 한 바가지를 덜어 부엌 귀퉁이 항아리에 부었다. 이따금 걸인이 오면 항아리를 열고 쌀을 아낌없이 퍼 건넸다. 어느 날인가, 초를 살 돈이 없어 절 밖 도랑서 서성이던 이에게 초를 사 건네기도 했다. 그이는 마침내 도랑을 건너 절에 들어와서는 초에 불을 붙이고 눈물을 흘리며 몸을 낮췄다. 어머니의 그 모습, 꼬맹이의 눈에 들어와 신명(身命)이 됐고 신념이 됐으며 신심이 됐다. 안준아(62, 혜산) 화엄불교대학 총동문회장은 지금도 어린 시절 목격했던 그 순간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손이 귀한 종손 집안서 태어나
단명할 거란 얘기 들으며 자라
신심 깊은 어머니와 사찰 찾아
나눔의 의미·행복 직접 목격해

김제 금산사서 신행활동 하다
화엄불교대학 입학하며 환희심
주변에 공부 권하며 장학금도

전북불교룸비니산악회 회장으로
회원 수 100배 증가시키는 기적
화엄불교대학 총동문회장 맡고
기수별 모임 만들어 조직 활성화

단명할 거라는 그가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됐다. 그래도 그의 하루는 여전히 분주하다. 생계를 위한 일은 여유로워졌지만, 불교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기 때문이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각종 문서를 살피고 그날 보내야 할 문자를 정리한다. 화엄불교대학 총동문회장, 전북불교룸비니산악회 회장, 금선백련마을 후원회장이라는 소임이 가끔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부담감과는 결이 다른 환희로움이 항상 함께해주기에 바쁜 시간 속에서도 신심을 내어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가 살아온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머니가 가슴에 새겨준 나눔의 기쁨, 그 환희로움에 이르게 된다.

▲ 올 3월12일 열린 화엄불교대학 총동문회장 취임식에서 금산사 주지 성우 스님에게 깃발을 인계받고 있는 안준아 회장.

전남 나주가 고향인 그는 틈만 나면 절에 놀러 가곤 했다.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절에 있는 게 마냥 좋았다. 부처님오신날이 가까워지면 궂은일 마다치 않고 스님이 시키는 것들을 척척 해냈다. 문득문득 ‘나는 어쩔 수 없이 부처님을 믿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예감이라기보다 확신이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누나가 있는 전주로 이사했다. 취미로 시작한 보컬그룹에서 드럼을 치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군대를 제대한 뒤 보컬그룹을 하며 모은 돈에 가족들의 도움을 얹어 사업을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에도 기도는 놓지 않았다. 즐거우면 즐거워서, 슬프면 슬퍼서, 외로우면 외로워서 절을 찾았다. 일주일에 한 번 고향 나주에 내려가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갔던 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길 끝, 그때 그 절에 닿아 어릴 적 어머니가 준 신심을 되새기며 기도했다.

사업장 주변에 화엄불교대학이 있었다. 처갓집과도 가까웠다. 오며가며 우연처럼 간판을 보았다. 하지만 과연 우연이었을까. 한때 참석하는 모임만 36개에 이를 정도로 바빴던 탓에 마음을 선뜻 내지 못했지만 인연이 무르익으니 발심은 순간이었다. 화엄불교대학 8기로 입학해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웠다. ‘아…. 내가 진짜 불자가 되는구나.’ 교리를 알게 되니 신심은 더욱 깊어지고 견고해졌다. “법당 가서 백날 절을 한다 해도, 알고 해야지 모르고 하면 안 된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불교대학 입학을 권했다. 머뭇거리는 사람에게는 학비를 대신 내주기까지 했다.

▲ 올 9월3일 남원문화체육센터에서 열린 ‘전북지역 불교대학 한마음 체육대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00년, 전북불교룸비니산악회 회장이 됐다. 그가 회장 소임을 맡자 30여명이었던 회원은 순식간에 267명으로 불어났다. 굳이 비결을 들자면 ‘바닥일’을 솔선수범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바닥일’은 산악회의 온갖 잡일이다. 식사시간 때 그의 차례는 언제나 마지막이었다. 모든 회원이 밥을 먹기 시작할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고 식사시간을 살폈다. 전북불교룸비니산악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언제나 안준아 회장이었을 만큼 산행 날마다 동분서주했다. 회보와 홈페이지도 만들었는데, 스마트폰이 없던 당시 산악회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버스 안에서 노래 부르고 춤췄던 그간의 관행들을 없애고, 반드시 절에 들러 스님 법문을 듣도록 했던 것은 전북불교룸비니산악회의 정체성을 여미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변화에 몇몇 회원이 빠져나갔고, 그 빈자리를 신심 깊은 불자가 채워나갔다. 2년도 되지 않아 회원 수가 10배 가까이 늘었다. 화엄불교대학에서의 권선과 전북불교룸비니산악회 활동으로 2001년 금산사에서 열린 전북불교 신년하례법회에서 포교상을 수상했다. 상금 500만원에 개인 돈 500만원을 더하여 1000만원을 만들었다. 한국운전기사불자연합회, 파라미타청소년연합회, 군불자진흥회에 각각 300만원을 전달했으며 불교회관 자원봉사팀에 100만원을 지원했다.

2000년대 중반 사업차 몽골서 잠시 생활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0년 다시 전북불교룸비니산악회 회장을 맡았을 때 회원은 29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나마도 적지 않은 회원이 불자가 아니었다. 산행 날, 버스에서 마이크를 잡고 “우리 모임은 순수한 불교 산악회이며 반드시 사찰에서 법문을 듣고 온다”고 선언했다. 29명 가운데 22명이 빠져나가 7명만 남았다. 3개월 이내에 버스 3대를 채우겠다고 다짐했다. 사람들에게 연락해 참석을 권했다. 한 달 문자 사용료만 50만원이었다. 다음 달 산행에 39명이 참석했다. 하산 길에 사찰에 들러 법당으로 안내했다. 신발 수를 확인한 뒤 문을 닫고 법회를 봉행했다. 다음 달 82명, 세 번째 달에는 152명이 참석해 버스 3대를 대여했다. 현재 전북룸비니산악회 회원은 786명. 이번에는 10배가 아닌 100배 성장이었다.

▲ 전북불교룸비니산악회는 서귀포룸비니불교산악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부처님 가르침 실천을 위한 교류를 약속했다.

올해 3월에는 화엄불교대학 총동문회장이라는 소임을 새롭게 맡았다. 그간 불교계 활동을 통해 다져온 뜻을 펼치기로 했다. 불자들의 응집력을 강화해 개개인에 부처님 제자라는 자부심을 심겠다는 꿈이다. 똘똘 뭉쳐 하나가 될 때 자부심이 생기고, 그것에서 자비 실천이 비롯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회장 취임 직후 회칙을 개정하고 기수별 모임을 만들었다. 기수별 모임마다 사비를 털어 지원금도 전달했다. 회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총동문회가 기수별 모임 구성으로 한층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문회원들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스님이 해주길 바라는 재가자가 아니라, 스스로 갖춰놓은 뒤 스님을 모셔오는 재가자가 되기 위한 노력이 현실로 이뤄졌다는 보람이다. 전북지역 최초 불교계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인 금선백련마을의 후원회장 소임 역시 그의 삶에 지치지 않는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는 아직 화엄불교대학 총동문회장 명함을 만들지 않았다. ‘동문회가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명함을 파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이다. 화엄불교대학 총동문회가 그가 생각했던 궤도에 닿으면, 그때 ‘회장’이라는 거창한 단어의 의미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불자 ‘안준아’다. 내어줬지만 돌려받지 않았고, 화합하되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자부한다. 오로지 부처님 법을 삶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한 하루하루를 살아왔을 뿐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결국 지금 자신을 만들어냈다고 믿는다.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될 때 행복해진다는 진리가 불자들 몸에 배길 기원한다. 직함보다 삶을 통해 그 진리를 전달할 수 있길 바란다.

그가 살아온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찾아오는 이 빈손으로 보내지 말라”는 어릴 적 가르침에 이른다. 크건 작건 상관없다. 나눌 수 있다는 자체로 좋다. 사업을 할 때, 앞문으로 들어와 도움을 청했던 이가 뒷문으로 다시 들어왔어도 마다치 않았다. 나눔은 늘 좋았다. 너와 나,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그는 언제나처럼 어릴 때부터 걸어온 그 길을 삶의 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주=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369호 / 2016년 1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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