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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나무아미타불” 만으로

‘나무아미타불’일컫자 불보살 내영
보배연꽃서 12경 듣고 초지 들어가

앞에서는 12부의 대승경전의 제목을 듣는 공덕이 “나무아미타불”이라 칭명(稱名)하는 공덕에 비하여 훨씬 더 적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나라 선도대사는 바로 이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비록 많은 경전 제목을 듣게 되더라도 듣는 사람의 마음이 산란하게 됨에 반하여, 부처님의 이름은 다만 하나이기에 능히 산란함을 다 거두어 들여서 마음이 안정된다고 답하였습니다.

12부 대승경전 제목 듣는 공덕
‘나무아미타불’ 공덕보다 적어
견성을 인가받는 선종과 달리
정토문엔 어떤 중개자도 없어

정토문에서는 “나무아미타불” 하나에 집중하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옛날 어떤 스님은 정토삼부경을 천 번 읽겠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수백 번 넘게 읽었는데,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정토삼부경에서 말하는 것이 결국은 “나무아미타불을 외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천 번 독송의 서원을 중도에 내버렸습니다.

잇펜(一遍) 스님은 왕생하기 7일 전에 평소 쓰신 편지나 저술 등을 다 모아서 불태우고 맙니다. 평생 책중독에 빠져서, 책 쓰고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저의 입장에서는 적지 않게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바로 “나무아미타불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가령 팔만대장경이 다 사라져도, 선종의 천칠백 공안이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만 있으면 다시 팔만대장경을 만들 수 있고, 천칠백 공안이 생길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 부처를 낳고 조사를 낳기 때문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 오십억겁토록 지어온 죄를 다 소멸케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서 “그때, 저 부처님께서는 화현의 부처님, 화현의 관세음, 화현의 대세지보살을 파견하여 수행자의 앞에 이르러 찬탄하며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부처님의 이름을 일컬었기에 모든 죄가 소멸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그대를 맞이하러 왔다.’”

이렇게 화현의 불보살님이 내영해 주시기에 왕생의 여건이 갖추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수행자는 화현의 부처님께서 (놓으시는) 광명이 온 방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광명을) 보고나서는 기쁨에 차서 문득 목숨을 다하였다.”

불보살님의 내영을 받았으므로, 왕생은 이제 매우 쉬운 일이 됩니다. 광명이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그 행자가 왕생하였다는 하나의 증좌입니다. “보배 연꽃을 타고서 화현의 부처님 뒤를 따라서 (극락의) 보배 연못 속에 태어나서, 칠칠(49)일을 지나서 연꽃이 마침내 피어난다. 연꽃이 피어날 때가 되면 크게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큰 광명을 놓으시며 그 사람 앞에 나타나서는 매우 깊은 12부경을 설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앞에서 12부의 대승경전의 제목을 듣는 공덕이 “나무아미타불”만 외는 공덕보다 적다고 해서, 그러한 수행을 버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12부의 대승경전 제목을 다 “듣고서는 신해(信解)하여 위없이 높은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발하고서 10소겁(小劫)을 지나서 백법명문(百法明門)을 얻고서 초지(初地)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를 하품상생이라 말한다.”

신해라는 것은 결정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정토문에서는 안심(安心)이라 합니다. 안심은 선종에서 견성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위상을 갖습니다. 다만 선종에서는 견성을 한 뒤에, 먼저 견성한 선사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하지만, 정토문에서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아미타불과 나 사이에는 어떤 중개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은 핫라인(hot line)입니다.

물론, 초지라고 하니 그 안심 자체가 궁극적 성불은 아닙니다. 10지 중의 첫째일 뿐입니다. 하지만 선종에서 돈오 이후에 점수를 통하여 성불하지만, 돈오를 중시합니다.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토문에서도 안심은 출발점으로서 중시됩니다.

이렇게 “(저) 부처님의 이름과 가르침의 이름을 듣고, 스님의 이름을 듣게 된다. 삼보의 이름을 들으면 곧 왕생을 얻게 된다.” 이름을 듣는 것은 곧 이름을 일컫는 것이고, 이름을 일컫는 것은 곧 이름을 듣는 것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69호 / 2016년 1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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