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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처분과 얄팍한 휴머니즘

20일 만에 가금류 800만 ‘학살’
인간들 ‘자타카’의 염소와 비슷
생명존중의 불살생 정신 절실

2017년은 정유년 닭띠 해다. 그런데 닭띠 해를 앞두고 닭들이 혹독한 수난을 겪고 있다. 11월16일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로 불과 20여일 만에 살처분 가금류가 800만 마리까지 늘었다. 지난 2014년 1월 발생한 AI로 195일간 1400만 마리의 닭과 오리가 죽임을 당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AI는 자칫 사상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AI의 피해가 확산되면서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축산 농가에 큰 피해가 예상된다느니, 달걀값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느니, 살처분을 하는 이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얘기들도 많다. 또 공무원이 닭·오리를 매몰하지 않고 거름으로 만들 수 있는 기계를 개발했다느니 지난해 5월 수십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살처분한 미생물 처리방식이 엉터리로 확인됐다는 등 보도들도 잇따르고 있다. 이러한 사안들이 누군가의 생계를 위태롭게 하고 자연환경을 크게 오염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매일 쏟아지는 숱한 AI 관련 기사들 중 닭과 오리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닭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인간의 먹거리로 간주하는 얄팍한 ‘휴머니즘’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류는 누군가의 먹이로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해서는 지독히 무관심한 것이다.

철학자 이진경 교수의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에서는 이 ‘거대한 학살’이 학살로 인식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사람 아닌 가축, 우리에 ‘고기를 대주기 위한 것’들의 숫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재 방역당국은 일단 AI감염 의심가축이 발생하면 즉시 해당 농장에서 사육 중인 모든 가금류를 죽이고, 해당 농장에서 반경 500m 이내에서 사육 중인 모든 가금류도 예방적 차원에서 곧바로 땅에 묻고 있다. 서울의 각 구마다 몇 사람의 감염자가 발생했다면 서울 시민 전체를 살처분하는 방식, 그것이 동물들에게 버젓이 자행되는 것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이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듯 병은 자연스러움이다. 그런데도 면역력이 생기기도 전에 병에 걸리면 멀쩡한 동물들까지 죽이는 행위, 이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

초기경전인 ‘자타카’에는 제사를 주관하는 바라문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염소 얘기가 나온다. 이 염소는 죽음의 찰나에 웃음을 터트리더니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괴로워했다. 염소의 이상한 행동에 의아해한 바라문이 묻자 염소가 대답했다.

“지난 오백 생 동안 염소로 거듭 태어나면서 괴로워하다가 이제야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기에 기뻐서 웃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죽인다면 당신도 나와 같은 운명으로 오백 생을 고통 받을 것임을 잘 알기에 울었습니다.”

▲ 이재형 국장
깜짝 놀란 바라문이 염소를 풀어주었다. 잠시 후 번개가 염소를 쳤고 그러자 염소가 인간이 됐다는 얘기다.

사실상 닭들은 살처분 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만 매일 260만 마리, 연간 10억만 마리가 먹거리로 죽어간다. 동물들에게 21세기는 생지옥이자 아우슈비츠인 셈이다. 부처님께서 불살생을 강조한 것은 생명에 차등을 두는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어떤 동물이건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좋아하는 나와 동일한 ‘이고득락’의 존재임을 새겨야 할 때다.

이재형 mitra@beopbo.com
 

 [1371호 / 2016년 1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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