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3. 그림과 글의 만남

기자명 명법 스님

중국 그림과 글씨 서로 통하는 것은 선을 조형매개 삼았기 때문

▲ 양혜의 발묵선인도(潑墨仙人圖), 13세기 초반,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일격’은 문인화가 가져온 미적 취미의 변화를 요약하는 비평 용어로, 북송대 소식을 중심으로 문동, 왕선, 이공린(李公麟, 1049~1106), 미불(米芾, 1051~1107)과 미우인(米友仁, 1074~1153) 부자, 황정견 등 일군의 사대부들에 의해 일어난 이 새로운 미적 취향은 휘종 시대에 이르러 그 당시까지 회화 창작의 중심지였던 궁정의 화풍을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이후 중국미술사의 방향을 결정지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동양화’는 궁정화풍의 그림이 아니라 북종 중기 이후 사대부의 그림이 제시한 모범을 따르는 그림을 지칭한다.

중국 문인화의 특징들은
수묵 중심의 구성에 있어

시서화가 하나라는 개념
문인화 등장과 함께 시작

먹으로 오색을 대신하지만
색과 원근, 음영 모두 표현

수묵화 본격 등장과 함께
먹의 쓰임 다양하게 발전

송대 왕선이나 원대 조맹부의 탁월한 청록산수작품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 변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수묵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화면 구성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문인의 인격과 미적 취향,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치를 표현한 문인화는 기존의 회화와 달리 교화적 목적을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다. 사대부들이 자신을 수양하고 세계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의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제화시를 매개로 회화의 서정성이 깊어짐에 따라 미불이 ‘묵희(墨戱)’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그림은 내면적이고 자족적인 것이 되었다.

‘시서화일률(詩書畵一律)’이라고 불리는 중국 예술의 독특한 개념 역시 문인화의 등장과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개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소식은 시와 그림 뿐 아니라 글씨도 뛰어났다. 그것은 훗날 “시서화 삼절”이라고 일컬어진, 시와 그림, 그리고 서예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내는 문인 예술가의 등장을 이야기한다. 소식의 글씨는 미불, 황정견과 함께 송대 사대가의 하나로 꼽히는데, ‘시서화일률’은 시를 잘 짓고 그림과 글씨도 잘 쓴다는 의미를 넘어서 시와 회화, 그리고 서예가 하나의 화면 속에서 융합되는 중국회화 특유의 화면 구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변화는 단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나라 중반기부터 시작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중국화나 한국화 가운데 채색화가 많지 않지만 ‘수묵’의 등장 이전에는 채색화가 주종을 이루었다. “화육법(畵六法)”이라는 중국화의 중요한 이론을 제시한 사혁에 따르면 그림을 그릴 때 ‘수류부채(隨類賦彩)’, 즉 대상의 종류에 따라 색을 달리 칠하는 것이 중국회화의 원칙이었다. 그런데 당나라 중기에 접어들면서 이 원칙이 점차 폐기되고 먹으로 오색을 대신하는 ‘수묵’이 주된 표현 기법으로 정착되었다.

당 중기에 활동한 장조(張璪)는 먹과 물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먹과 물의 배합 비율에 따라 그것들은 다양한 효과를 낳았다. 먹의 용도를 다양하게 변화시켜 농(濃)·담(淡)·건(乾)·습(濕)·묵(墨)이라는 수묵의 효과를 창출했는데, 장조 이후 수묵화는 먹 이외의 색을 칠하지 않고도 자연의 다양한 색과 음영, 원근 등 오채(五彩)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표현했다.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에는 이러한 묵과 오채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음양의 기가 퍼짐으로써 만상이 펼쳐진다. 현묘한 변화는 말없이 이루어지고 신비로운 자연의 솜씨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초목이 꽃을 피우지만 붉고 푸른 색채가 필요 없고, 구름과 눈이 휘날리지만 하얀 색을 칠하지 않아도 희다. 산은 푸른색이 없어도 푸르고, 봉황은 오색을 칠하지 않아도 찬란하다. 그러므로 묵을 사용하면 오색이 다 갖추어지니 이것을 일컬어 ‘득의(得意)’했다고 한다. 만약 마음이 오색에 얽매이면 물상이 어긋난다.(夫陰陽陶蒸, 萬象錯布, 玄化亡言, 神工獨運. 草木敷榮, 不待丹碌之采; 雲雪飄颺 不待鉛粉而白; 山不待空靑而翠; 鳳不待五色而綷. 是故運墨而五色具, 謂之得意. 意在五色, 則物象乖矣.)”

이 글에서 장언원은 천지의 조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자연의 솜씨는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채, 즉 여러 가지 채색으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를 담아내기 어렵다고 하면서, 먹의 사용을 통해 현상적인 색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의 색을 재현할 수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제시한다.

그는 먹이 단일한 색이지만 농담의 변화만으로도 자연의 다양한 색을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먹의 사용이 채색화보다 화가의 뜻, 즉 의경을 전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채색을 할 때 자칫 화가의 마음이 사물의 외관에 치우쳐서 사물의 진짜 모습을 놓칠 우려가 있다는 장언원의 염려가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먹의 사용은 화가의 마음을 더 단순화 시킨다. 문인화가 전하려고 하는 것이 마음의 단순성이라면 먹보다 더 적합한 매체가 따로 있기 어렵다. 수묵의 사용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색을 단일한 색으로 표현함으로써 마음의 경계, 즉 담백하고 맑은 마음의 상태로 표현했다. 중국회화에 자주 쓰인 청록 역시 비슷한 효과가 있기 때문에 선호된 것으로 보인다. 당 중기 이후로 수묵의 다양한 용법이 개발되어 화면에 표현되면서 수묵 산수화는 동양회화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전환되었다.

수묵화의 등장과 더불어 먹의 쓰임은 다양하게 발전했다. 용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으며 자유로운 조형적 실험을 통해 발묵(發墨), 파묵(破墨)과 새로운 용묵법이 개발되었다.

파묵(破墨)은 선을 그린 다음, 마르기 전에 더 짙거나 묽은 먹으로 덧칠해 윤곽선을 없애서 더 입체적이고 깊이 있게 표현하는 기법으로, ‘처음에 칠한 먹을 깨뜨린다’는 의미지만 점차 담묵을 사용해 농묵에 변화를 주거나 농묵으로 담묵을 깨뜨리는 효과를 모두 다 가리킨다.

이 기법은 당나라 중기에 시도되었는데, 장조는 끝이 뭉툭한 붓이나 손바닥으로 그림을 그리는 등 파격을 통해 선염법(渲染法)과 파묵법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왕유의] 파묵산수(破墨山水)를 보았는데 필적(筆迹)이 굳세고 상쾌하였다(余曾見破墨山水, 筆迹勁爽)”라는 장언원의 기록으로 보아 왕유 역시 수묵선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왕유는 또한 수묵으로 청록을 대신했는데, 이 시기의 수묵은 채색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청록을 담채로 변화시킨 정도에 그친다. 당 말기에 이르러 먹만을 사용한 수묵화가 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발묵(潑墨)은 준법을 거의 쓰지 않고 먹물을 번지게 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필선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자유로운 형태 때문에 유묵무필(有筆無墨)이라고도 한다. 먹물을 번지게 하기 위해 붓 대신 입으로 불거나 손, 발, 그리고 머리카락까지 사용하여 퍼포먼스적인 성격을 갖기도 한다.

당나라 덕종(德宗) 때 활동한 왕묵(王墨)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먹물을 비단 위에 뿌려 그림을 그린 것에서 발묵법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술에 취하면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렸다고도 전해진다. 송원 교체기에 활동한 선승 옥간(玉澗)의 작품이 유명하며 일격을 중시하는 문인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기법으로, 미불, 미우인 부자의 그림이 유명하다.

필법의 도입은 당대 이소도의 부벽법(斧劈法), 왕유의 피마준법(披麻皴法)과 같이 산수화에 필수 구성요소인 나무 그리는 법과 산봉우리나 산의 바위를 그리는 선에 의한 준법, 사물의 괴량감과 질감, 강도를 표현하는 파묵, 발묵과 같은 다양한 준비가 있은 후에 이루어졌다.

중국 그림과 글씨가 서로 통하는 것은 모두 선을 조형의 매개로 삼았기 때문이다. 붓의 운용이 작가의 기와 정신성을 표현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정신을 수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화의 정신성을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구양수는 “붓을 시험하며 기나긴 날을 보내고, 서예에 빠져 모든 근심을 잊네. 남은 인생에 이와 같은 것을 얻었으니, 만사에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조용한 가운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서예뿐이다”라고 그 가치를 평가하였다. 또한 소식은 “필묵의 자취는 형태가 있는 것에 의탁한다. 형태가 있으면 폐단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죽음에 이르지 않았으나 스스로 한때의 즐거움으로 삼아 하는 수 없이 마음에 깃들여 노년의 근심을 잊으니, 오히려 바둑보다 낫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모두 서예의 인격수양에 대한 의의를 평가한 것이다.

서화동원론(書畵同原論)은 당나라 장언원이 ‘역대명화기’에서 제기한 ‘서화동체(書畵同體)’ ‘서화용필동법(書畵用筆同法)’에서 비롯되었다. 그 다음으로 원대 조맹부의 ‘서화본래동(書畵本來同)’의 관점으로 펼친 창작이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서화에 대한 의미 규정은 다른데, 장언원의 ‘서(書)’는 ‘문자’를 가리키고 조맹부의 경우는 ‘서법’을 의미한다. 장언원의 서화동원론은 감상가의 입장에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서(書)를 통해 회화의 위상을 제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시서화를 하나의 장르로 융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서화의 융합은 이러한 주장보다 오히려 문인화가 의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요청된 것으로 이해된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71호 / 2016년 1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