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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경주 남산 서출지-칠불암-신선암 마애불

서라벌에 천년의 미소 띄워 온 마애불을 친견하다

▲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1000여 년 전부터 경주 땅에 자비로운 미소를 띄워왔다.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남산에는 사지(寺址) 150개소, 불상 129체, 탑 99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부도 8점 등의 수많은 성보가 산재해 있다. 하여 누군가는 ‘불적의 보고’라 했고, 누군가는 ‘한국 최대 노천 박물관’이라 했다. 경주 남산이 학자들에게는 ‘보고’요 ‘박물관’으로 보이겠지만 불자들에게 경주 남산은 불산(佛山)이다.

남산 마을 초입에서 만난 서출지
소지왕 목숨 살린 편지 나온 연못
불교 전래 과정서 생긴 갈등 단면

바위에 일곱 부처님 새긴 칠불암
동쪽 향해 선 삼존불 중 본존불은
‘항마촉지인’을 한 위엄 있는 모습
나라 지킨 호국의 마음 담아 조성

암벽 꼭대기에 홀로 앉은 마애불
은은한 미소 부드러운 선의 보살
마을뿐 아니라 산에도 절·탑 즐비
경주 자체가 성지임을 다시 느껴

남과 북으로 8㎞에 걸쳐 길게 늘어서 있는 경주 남산은 고위봉(494m)과 금오봉(468m)으로 이뤄져 있고 넓이는 약 4㎞다. 규모면에서는 그리 장대한 산이라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루, 이틀 만에 돌아볼 수도 없는 산이다. 하루 한 코스만 골라 법음 가득한 성지서 푹 젖었다 나오는 게 좋겠다 싶어 남산의 서쪽 고위봉으로 향했다. 그 산 중턱에 일곱 부처님이 나투신 칠불암이 있고,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자애로운 마애반가상을 친견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남산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서출지(書出池)가 이른 아침의 햇살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년) 정월 보름날 왕이 서라벌을 행차하는데 쥐가 까마귀와 함께 나타나 아뢰었다.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셔야만 합니다.” 왕은 장수를 시켜 따라가게 했다. 장수가 경주 동남산 마을 못가에 이르렀을 때 까마귀는 사라졌고, 그 순간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이 글을 왕에게 전하셔야 합니다.” 봉투를 건넨 노인은 못 속으로 사라졌고 봉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

▲ 오른 발을 내려 놓은 모습에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마애보살유희상’이라고도 불린다.

소지왕이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한 신하가 말했다. “두 사람은 평민이고 한사람은 왕입니다.” 소지왕이 봉투를 뜯어보니 편지에는 ‘사금갑(射琴匣)’이라 적혀 있었다. 대궐로 돌아 간 소지왕은 왕비의 침실에 세워둔 거문고 갑을 향해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거문고 갑 속에는 왕실서 불공 올리는 승려가 화살을 맞고 죽어있었다. 왕비와 승려가 모의를 해 왕을 해하려 했던 것이다. 소지왕의 목숨을 살린 편지가 나온 연못이라 해서 서출지라고 한다.

서출지 전설을 놓고 역사가들은 ‘민속신앙 속에 불교문화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한 단면’이라고 평한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건 법흥왕 15년인 527년이니 이 전설은 불교 공인 40년 전에 피어났다. 눌지왕 시대의 묵호자, 소지왕 시대의 아도 스님 역시 본격적인 불교전파에는 실패했다. 왕가의 조상을 섬기는 신앙이 강했던 신라 귀족들이 불교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점을 감안하면 역사학자들의 평은 일리 있다.

▲ 소지왕의 목숨을 살린 편지봉투가 나왔다는 서출지 전경.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절이다. 제법 큰 절로 조성하려는지 불사가 한 창이다. 몇 걸음 걸으니 삼층석탑 두기가 남산을 떠받치려는 듯 웅장한 자태로 서 있다.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남산동 동서석탑이란다.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 양식이고, 서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전형적인 3층 석탑 양식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대부분이 같은 양식으로 조성된다고 들었는데 저 두 탑은 양식이 각각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저런 보물이 마을 한 중앙에 서 있다니 놀랍다.

이럴 수가! 한 10m 이동하니 절과 선원이 마을길 따라 줄지어 들어 차 있다. ‘절이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이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는 서라벌’이라는 일연 스님의 표현이 결코 헛된 게 아님을 실감하겠다.

한 3미터쯤 걸음 하니 두 개의 석탑이 또 나타난다. 염불사지 삼층석탑이다. 두 개의 탑 중 동탑은 누군가에 의해 1973년 불국사역 광장으로 옮겨졌었다. 2008년 초 지금의 원래 위치로 돌아와 복원작업이 진행됐고 지난 2009년 5월 사리봉안식과 함께 완성됐다. 성보는 제 자리에 서 있을 때 진가가 발휘된다는 사실을 저 탑은 무언의 몸짓으로 전하고 있다.

▲ 염불사지 동서석탑 전경.

소나무 숲 사이를 파고든 햇살이 나그네 발걸음 앞에 눈부시게 떨어진다. 우악스런 바위가 길을 막는 것도 아니어서 휘돌아 갈 필요도 없다. 길은 분명 산길인데 야트막한 동네 뒷산의 작은 오솔길을 걷는 듯하다.

대나무 숲길이다. 경사도가 좀 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산행인가? 마음 단단히 먹고 돌계단을 오르려는 찰나 암자가 떡 하니 나타났다. 칠불암이다. 서쪽 암벽 앞 바위에 일곱 분의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이 동쪽을 향해 서 있고, 그 앞 바위에 사면불이 조각돼 있다. 

삼존불의 본존불은 이 세상 모든 마귀들의 항복을 받은 표식으로 통하는 ‘항마촉지인’을 한 채 위엄 있게 앉아 계셨다. 아, 그러고 보니 불국사 본존불도 항마촉지인을 한 채 동쪽을 바라보고 계셨더랬다. 양근석 선생은 경주의 석굴암, 골굴암, 칠불암 본존불이 모두 항마촉지인을 한 채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공통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삼존불과 사방불의 일곱 부처님은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

‘침략해 오는 적을 마귀로 봤을 때 항마인상으로 적의 항복을 받는 뜻도 되므로, 이 부처님들은 모두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부처님으로 조성된 것 같다.’

다른 의견도 있다.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 즉 동남각 약 30도 라는 점에 착안 해 ‘해의 생일’을 의미한다는 설이다. 죽어(낮이 짧아) 가던 해가 다시 살아나는(낮이 길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왼쪽 보살은 연꽃을 들고 있고 오른쪽 보살은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두 보살은 좀 더 다가가려는 듯 본존 쪽을 향해 몸을 약간 비틀고 있다. 보살들의 다리 길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미술사학자들에 따르면 백제 말기의 보살들은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은데 비해, 8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보살들은 가슴이 짧아지고 다리가 길어지면서 몸매가 날씬해진다고 한다. 칠불암 협시 보살은 ‘다리가 짧은’ 백제 말기 양식을 띄고 있다. 김숙희 선생의 논거를 엿보자.

‘이 불상들이 만들어진 연대를 7세기 말엽에서 통일초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무늬 없는 보주형 두광이나 연꽃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점도 7세기 말엽 불상들의 특징이다. 7세기 전반 수(隨) 시대의 영향을 받은 불상들의 딱딱한 자세에서 당(唐) 시대의 부드러움으로 바뀌려는 새로운 수법을 칠불암에서 볼 수 있다.’

사방불의 동면상은 약사여래상이다. 가난하여 밥을 굶고 있을 때 ‘약사여래’명호를 부르면 여래가 음식을 베푼다고 했다. 옷이 없어 추위에 떨고 있을 때도 ‘약사여래’를 찾으면 따뜻한 옷을 내어주신다 했다. 유리광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서면에 새겨진 여래는 서쪽을 바라보고 계시니 서방정토 교주 아미타여래다. 괴로움이 사라지고 즐거움만이 충만 된 곳, 죽음 없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곳, 이 땅에 들면 그 누구라도 지옥, 아귀, 축생의 세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아미타 세계가 새겨져 있는 셈이다. 남북면의 여래 존명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연꽃 대좌 위에서 불국정토를 장엄하려는 염원만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칠불암의 일곱 불상군은 모두 국보(312호)다.

▲ 칠불암 전경.

일곱 부처님을 떠받치고 있는 저 암벽 꼭대기에 또 한 분의 마애불이 앉아 계신다고 했다. 다소 가파른 된비알을 타야 하지만 철계단이 설치돼 있어 힘들어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불과 100m 거리다.

아! 어쩜 저리도 가파른 벼랑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다소곳이 앉아 계실까? 전체 윤곽의 선이 부드럽다. 삼면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의 눈과 코, 입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김숙희 선생의 말을 빌려보자.

‘신라의 보살들은 대개 윗입술이 아랫입술을 감싸듯하고 입 언저리에 깊은 홈을 파서 이지적인 미소가 나타나는데 이 보살은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이 더 크게 표현되어 있어 누구에게나 정다움을 느끼게 한다.’

두 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서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천의 자락은 두 어깨와 좌우 팔목을 거쳐 두 무릎 아래로 흘러 내렸다가 곡선을 그리며 무릎 위를 돌아 의자 양쪽에 흘러내린 후 다시 구름과 함께 사라져 간다. 오른쪽 발은 의자 아래로 내려놓았다. ‘마애보살 반가상’, 또는 ‘마애보살 유희상’이라 이름 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구름 속에서 피어 난 한 송이 연꽃이 보살의 오른 발을 정성스럽게 받들고 있다. 마치 천상의 보살을 그대로 모셔놓은 듯하다. 이 마애불은 보물 199호다.

이 보살의 정식 명칭은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慶州南山神仙庵磨崖菩薩半加像)’이다. 칠불암의 일곱 부처님을 호지하는 암벽 꼭대기에 조성되었으니 ‘칠불암 마애보살반가상’이라고 불릴 만도 한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라고 한 걸 보면 저 마애보살을 보살피는 또 하나의 암자 신선암이 옛적부터 있었던 듯싶다.

그러고 보면 저 산 아래의 마을에만 ‘절이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이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었던 게 아니라 여기 이 산에도 ‘절이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이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경주’자체가 성지인 것이다. 그 누군가 이 성산(聖山)에 올라오거든 이런 말은 삼가시라.

“경주 남산을 정복했다!”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참고자료 : ‘김숙희 논문 ‘남산 마애불의 연구-탑곡사 방불암·칠불암을 중심으로’. 양근석 논문 ‘신라 사방불상 연구(2)-경주 남산 봉화골 칠불암 칠불상’.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남산 통일전 주차장. 차도를 걷는다면 입산 통제소까지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가능한 절과 탑이 즐비한 마을길로 들어서 걷는 게 좋다. 염불사지와 입산통제소에 닿기 전까지 마을 길을 따라 쭉 직진하면 된다. 칠불암까지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 않다. 칠불암서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까지의 길이 제법 가파르지만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안전하다. 철계단을 오른 후 좌측에 서 있는 이정표를 보고 조금만 내려가면 마애보살반가상이 있다. 등산은 1시간 40분이면 충분하다. 하산은 약 1시간.


이것만은 꼭!

 
남산동 동서석탑: 경주 동탑은 모전석탑의 형식이고, 서탑은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세운 신라 양식의 석탑이다. 서탑의 상층기단 면석에는 팔부신중이 새겨져 있다.  9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물 124호다.

 

 

 
염불사지: 입산통제소 닿기 직전 두 개의 삼층석탑과 함께 자리한 절 염불사가 있다. 절에서 지내던 한 스님이 늘 ‘아미타불’을 염했는데 그 소리가 궁궐까지 들렸다고 한다. 염불하던 스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염불사라 했다고 전해진다.

 

 

 
중흥사: 불사가 진행중인 절이다. 아직 담도 제대로 두르지 못했지만 칠불암의 본사 격에 해당하는 절이다.

 

 

 

[1372호 / 2016년 1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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