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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법당 지도법사 해피 스님

“윤회는 악업 최소화하고 선업 극대화하는 동기 부여”

▲ 해피 스님은 “윤회한다는 사실을 바르고 분명히 아는 사람은 오계·보시·수행의 세 가지 공덕행을 중심으로 살게 된다”고 강조했다.

오늘은 ‘윤회의 진실’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겠습니다.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들로
윤회 부정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
붓다, 고집 놓게 하려 윤회 강조

자아 윤회한다는 주장 사실 아냐
중생 삶 청산하는 길 제시 못해
몸 무너지면 새 몸으로 태어나
새로운 존재의 삶 살아가는 것

근본경전에 의하면 윤회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신 이유이고, 깨달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에 윤회에 대한 확정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윤회의 과정에서 삶을 향상하고 끝내 윤회에서 벗어나 삶을 완성하는 불교신행의 근본이 망각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불자의 불행이고, 또한 불교가 경쟁력을 잃게 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불교는 삶에 대한 부처님의 해석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함으로써 부처님에 의지해 삶의 향상을 꾀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삶에 대한 부처님의 해석 즉 가르침은 불자들에게 삶의 기준이 됩니다. 부처님은 윤회한다고 알려줍니다. 우리가 스스로 확인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부처님의 해석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함으로써 받아들이고, 그 해석을 기준으로 삶의 향상을 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신심을 갖춘 불자라면 윤회는 정말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윤회를 부정합니다. 물론 윤회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도 직접 경험되지는 않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있다는 견해보다는 없다는 견해가 더 공감하기 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의 고집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고집을 놓아버리게 하기 위해 그토록 윤회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실에 괴리된 삶은 괴로움을 만들고, 사실에 부합한 삶은 행복을 만든다”고 강조하십니다. 사실은 존재 일반의 조건관계로는 삼법인, 즉 제행무상·제행개고·제법무아이고, 고의 조건관계로는 연기 곧 십이연기입니다.

십이연기는 중생인 존재의 삶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명색(名色)과 함께하는 식(識)이 삶의 과정을 통해 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존재 상태를 바꾸고, 몸이 무너지면 새로운 몸과 만나 다시 태어나 새로운 존재 상태로 삶의 과정을 지속합니다. 이런 삶의 과정에는 변하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원래 있는 것이어서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 그런 존재 즉 아(我)는 없습니다. 오직 삶의 과정에서 ‘자기 증식에 의한 변화’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그런 존재가 바로 지금 삶의 주인공인 ‘나’인 것입니다. 나는 있되 아(我)라고 불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어서 무아인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되는 삶의 과정이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입니다.

부처님은 “나는 오직 고와 고멸(苦滅)을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삶의 과정에 수반되는 고의 자각과 고멸(苦滅)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사실에 괴리된 삶이 만드는 고와 사실에 부합한 삶이 만드는 고멸(苦滅)로 연결됩니다.

윤회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생(生)-노사(老死)를 반복하며 중생으로의 삶을 반복해야 하는 고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각하지 못하면 고멸(苦滅)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삶의 주인공인 자아가 있어서 그가 윤회한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생의 삶을 청산하고 해탈된 삶을 실현하는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나, 자아의 착각 속에서 중생의 고달픈 삶을 반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삶이 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무아적으로 변화하다가 몸이 무너지면 윤회하여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 새로운 존재의 삶을 살아간다는 주장은 사실입니다.

부처님께서 바른 깨달음을 통해 보고, 거기에서의 벗어남을 실현한 후 알려주신 완성된 지혜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실에 부합한 앎이 고멸(苦滅)의 실현을 안내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토록 윤회를 강조하시고, 자아가 아닌 ‘연기하는 식(識)의 윤회’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간혹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학이 세상을 주도하는 지금, 왜 우리는 윤회를 말해야 하는 걸까요?”라고 말이지요.

과학은 삶의 많은 문제들에 답을 줍니다. 때문에 과학문명의 이기를 잘 활용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윤회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과학의 영역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물질의 영역에서 삶의 문제에 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더 잘 보게 하고, 더 잘 듣게 하고, 더 잘 냄새 맡게 하고, 더 잘 맛보게 하고, 더 잘 느끼게 하는 것들이 모두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이점입니다. 그러나 삶은 물질만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취온(五取蘊)의 삶입니다.

삶은 물질인 색(色) 이외에도 수(受)-상(想)-행(行)의 물질 아닌 것들과 식(識)이라는 물질 아닌 것으로의 마음이 함께하여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의 자각과 고멸(苦滅)의 실현이라는 불교적 삶은 과학만으로 모든 해답을 제공받지 못합니다. 이때, 물질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으로 알고 이해해야 합니까? 여기서도 역시 종교의 영역에 속한 문제에 대해서는 부처님의 해석을 기준으로 하는 불자의 삶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대로 수-상-행 그리고 식에 대해 배워 앎으로써 고멸의 실현을 위해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준 위에서 부처님은 연기하는 식의 윤회라는 삶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않으면서 삶의 과정마다 변화하는 식(識)입니다. 그래서 삶은 이 몸으로의 한시적 기간을 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행으로 해탈할 때까지는 새로운 몸과 함께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과학이 세상을 주도하는 지금 윤회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삶은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이 몸으로의 시간에 국한되지 않고 해탈할 때까지 끝없이 죽고 태어남을 반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은 진화론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물질의 영역 안에서 진화론은 몸의 변화-발전을 설명합니다. 부정해야 하는 이론이 아닙니다. 우리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진행되어 가는 현상이니 그 현상에 대한 정당한 해석은 인정하면 됩니다. 그러나 진화론이 삶의 모든 점을 해석하지는 못합니다. 진화론이 마음[식(識)]의 연기하는 과정을 설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명색(名色)과 서로 조건 되는 것으로의 식을 설명합니다. 몸이 아직 발전하지 못했을 때는 발전하지 못한 몸, 즉 뇌의 수준에 조건 지어진 만큼의 식이 몸과 함께 조금은 원시적인 삶을 살았고, 몸이 발전한 지금은 발전한 몸, 즉 뇌의 수준에 조건 지어진 만큼의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몸 즉 뇌가 더 발전할 미래에는 더 발전한 몸 즉 뇌의 수준에 조건 지어진 만큼의 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과학과 불교는 이렇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과학문명의 이기를 충분히 활용하는 가운데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고멸은 훨씬 더 효율적으로 우리 삶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과학과 불교에 대한 이런 접근은 중요합니다.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냄새 맡고, 더 잘 맛보고, 더 잘 느끼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가집니다. 인식작용이 단순히 대상에 대한 앎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의 경험 즉 수(受)를 함께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냄새 맡고, 더 잘 맛보고, 더 잘 느끼는 것의 높은 의미는 그로 인해 고를 경험하지 않고 락(樂)을 경험해야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냄새 맡고, 더 잘 맛보고, 더 잘 느끼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고멸, 즉 행복을 경험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식의 몫이고, 식이 그 일을 잘 해내도록 하기 위해 믿음-정진-염(念)-정(定)-혜(慧)의 기능과 함께하는 수행의 영역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윤회가 우리 삶,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윤회에 대한 분명한 앎은 죽음 이후를 대비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살아서도 행복하다가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을 이어지게 하는 방법을 배워서 그런 삶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세 가지 공덕행을 짓는 방법을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오계(五戒)와 보시와 수행입니다.

윤회한다는 사실을 바르고 분명히 아는 사람은 당연히 세 가지 공덕행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혹 수행에 접근키 어려운 사람이라도 오계를 지키고 보시하는 삶을 이어간다면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는 욕계(慾界)의 하늘에 태어나게 됩니다.

흔히 삶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자책에 의한 제어’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것에 의한 제어’ ‘형벌을 두려워함에 따른 제어’ ‘악처(惡處)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의한 제어’가 그것입니다. ‘자책에 의한 제어’와 ‘남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에 의한 제어’는 내적인 것입니다. 내적으로 마음을 잘 단속해서 업(業)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또 ‘형벌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는 사회적인 것입니다. 징벌이 두려워 법을 지키기 위해 업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악처(惡處)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는 죽은 뒤에 지옥-축생-아귀의 삼악처(三惡處)에 태어날 것이 두려워 업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악업(十惡業)의 삶을 최소화하고 십선업(十善業)의 삶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때 자책에 의한 제어와 남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에 의한 제어는 고급스런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업의 제어를 위해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방법은 형벌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와 악처(惡處)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입니다.

악처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는 윤회를 전제로 설해진 방법입니다. 윤회가 부정될 때는 그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업의 제어를 위한 두 가지 동력 중 한 가지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들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꺼리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만큼 사회는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는 우리 삶, 우리 사회에서 악업(惡業)을 최소화하고 선업(善業)을 극대화하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삶이 향상할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근본경전연구회 해피법당이 12월3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한 제1회 학술세미나에서 ‘윤회의 진실’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해피 스님의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한편 해피 스님은 내년 1월14일 부산일보 소강당에서 ‘윤회’를 주제로 특강을 진행할 예정이다.

[1372호 / 2016년 1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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