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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척사의 의미

기자명 최원형

동지팥죽은 삿된 기운 몰고 새날 맞이하는 소망

아이들 어릴 적에 책 귀퉁이가 닳도록 읽고 또 읽어주던 옛이야기 가운데 ‘팥죽할멈과 호랑이’가 있다. 어느 날 열심히 밭을 매고 있는 할멈 앞에 호랑이가 쓱 나타나 잡아먹겠다고 한다. 할멈은 팥 농사가 다 끝난 뒤 팥죽 쑤어줄 테니 팥죽이나 먹고 잡아먹으라 한다.

암흑시간 정점 달하면 밝음 시작
동지는 태양시간 도래하는 희망
자연과 조화롭게 살 방법 모색이
지속가능한 삶으로의 전환의미

이윽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팥죽을 쑤는 할멈에게 알밤, 송곳, 개똥, 맷돌, 자라, 멍석 그리고 지게가 차례로 와서는 팥죽을 한 그릇 달라고 한다. 팥죽을 얻어먹은 이들은 할멈이 흘리는 눈물의 자초지종을 듣고 할멈을 도와주겠다 약속한다. 뭐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할멈에게 그 말은 얼마나 고맙고 반가웠을까.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은 팥죽 한 그릇의 힘으로  합심해서 기적처럼 호랑이를 물리친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는 당시 탐관오리 혹은 백성을 괴롭히는 탐욕스러운 세력을 상징하는 것 같다.

아메리카 어느 선주민들은 12월을 시작과 끝이 만나는 달이라 했다.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움의 시작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본다면 12월 또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수한 날들 가운데 어느 날들일 뿐이다. 오히려 내게 12월은 대단히 희망찬 달이다. 12월 끄트머리에 자리한 ‘동지’라는 스물 두 번 째 절기의 힘 때문이다.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 않다는 말은 괜한 위로의 말이 아니다. 시인 신경림은 ‘새벽이 어둠속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새벽을 잉태하는 어둠, 멋진 말이다. 동지를 기점으로 가장 긴 밤을 뒤로하고 서서히 태양의 고도가 올라간다.

어느 종교에서 죽은 지 사흘 뒤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과 동지 사흘 뒤부터 태양의 고도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전깃불은커녕 호롱불조차 귀하던 시절, 해 떨어지면 사위가 칠흑 같던 그런 시절에 밤이 길어진다는 것은 다양한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북유럽에 요정과 신화가 풍부했던 것과 매섭고 긴 겨울밤은 결코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동지는 이렇듯 암흑의 시간이 정점에 달하는 날이다. 동지를 지나면 다시 빛의 시간이 어둠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그러니 동지는 곧 새로운 날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빛은 어둠이라는 말이 없다면 설명할 길이 없듯이 동지가 어둠의 최정점일 수 있는 건 이후로 낮의 길이가 다시금 길어지기 때문이다. 태양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모든 생명은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에 기대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깜깜한 어둠의 바닥에서 곧 이어질 태양의 시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으면 ‘부활’로 표현했을까? 행여 그 시간에 삿된 기운이 끼어들까 저어하는 마음은 또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결국 동지란 태양의 시간이 도래한다는 희망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런 동지가 12월의 후반에 자리 잡고 있으니 저무는 12월은 한자락 희망을 우리에게 점지해주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던 풍습은 이러한 어둠의 정점에서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새롭게 시작될 새날을 경건하게 맞이하고 싶은 소망이 담겨져 있다. 동지 팥죽은 그런 의미에서 척사의 대표적인 문화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척사, 그렇다면 무엇이 나쁜 기운이고 무엇이 삿된 것일까? 역으로 어떤 것이 경건하고 복된 것일까? 아니, 어떤 것을 복되다 생각할까? 자손대대로 복된 삶을 사는 것, 이 말에 무수한 바람이 함축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원하는 일들이 술술 풀리고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사는 것과 같은 바람들은 일반적으로 바라마지 않는 ‘복’된 삶의 영역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이들이 원하는 일들이 하나같이 술술 풀린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모두가 돈을 많이 벌어 모두가 부자로 사는 삶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말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이 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저개발 국가들의 가난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더욱더 이러한 바람이란 게 얼마나 허망하면서 동시에 이기적이고 욕망 덩어리인지 인식하게 된다. 자연에 살고 있는 무수한 생명들의 희생과 지구자원을 고갈시키며 누려온 게 오늘날의 편리와 풍요라는 걸 알고 나서도 과연 우리는 궁극의 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작가이자 사회비평가인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는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를 석탄, 석유, 천연자원에 빚진 대단히 비정상적인 시대라 했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삿된 것을 물리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의 전환에서 시작될 것이다. 올 한해를 마무리하며 보다 자연과 조화롭게 살 방법을 모색해보는 건 어떨까?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372호 / 2016년 1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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