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아공법유와 아공법공
47. 아공법유와 아공법공
  • 김정빈
  • 승인 2016.12.20 1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대과학은 교리의 정비를 요청

위빠싸나 명상은 남방불교의 논전(論典)인 ‘아비담마(Abhidharma)’ 교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아비담마는 아공법유 주장
대승불교는 아공법공 주장

남방불교는 과학에 대해서
북방불교는 ‘공’에 대해서

각각 현대적으로 정비하고
명확히 설명하고 보완해야


북방불교에도 ‘아비담마’에 해당되는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라는 논전이 있는데, ‘구사론’은 중국어로 번역된 것만 남아 있을 뿐 인도어로 된 원전이 없는데 비해 ‘아비담마’는 인도어(팔리어) 원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개념이 명확한 장점이 있다.

문제는 한국불교가 대승불교라는 점, 대승불교 창안자들이 ‘구사론’의 철학을 ‘소승’으로 보았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를 적극적으로 확장한 미래불교를 구상하기 위해서는 ‘아비담마(구사론)’ 중심의 불교와 대승불교의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아비담마(구사론)’는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주장하고, 대승불교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주장한다.

불교에서 ‘법(法, dharma, dhamma )’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에서의 ‘법’은 ‘사물의 궁극적인 실재’를 의미한다. 이로써 우리는 남방불교에서는 물질(色, rupa : 몸)과 비물질(名, nama : 마음)을 이루는 궁극적인 실재가 ‘있다(有)’고 본다는 것을, 대승불교에서는 ‘없다(空 : 부재(不在)가 아니라 연기적(緣起的) 현상일 뿐이라는 의미에서)’고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두 불교가 ‘나(我, atta)’가 없다고 보는 점(我空=無我, 非我)에서는 같지만, “그렇다면 왜 ‘나’는 없는가?”라는 문제 즉 ‘나’를 이루는 구성 요소로서의 ‘법’의 해석에서는 서로 다르다. 전자는 ‘나(물질+마음)’를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마지막 요소(諸法)까지 분석한 다음 “이들 요소 중 어느 것도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말하는데 비해, 후자는 “그대가 말하는 ‘마지막 요소’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空)”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두 견해 중 대승불교의 견해를 존중하는데 그 배경에는 현대 물리학이 밝혀낸 진실이 있다. 현대 물리학은 물질의 궁극적인 실재로서의 입자(粒子,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입자는 파(波)에 상대되는 개념인데, 이 둘은 하나의 장(場, field)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의 ‘장’은 대승불교의 공(空)과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마음에 대해서도 과학이 이루어놓은 성과와 ‘아비담마’는 상충된다. 현대 생리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마음은 하나하나의 단위로 변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아비담마’는 마음을 심왕(心王)으로서의 식(識, viññāṇañā)과 그 부수 52가지로 분석하고 있는데, 현대 생리학은 마음이 수십 가지 수준으로 분석한 만큼 단순하지 않다고, 수백, 수만, 수천 단위로도 그 다양함을 다 분석해낼 수 없다고, 또한 그것들을 하나하나의 단위로 나눌 수 있는 경계선을 명확하게 그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불교는 물리학이나 생리학으로써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 즉 고(苦, dukkha)를 해결하기 위한 길(道, magga)을 제시하는 체계로서의 종교이다. 따라서 과학적인 진실이 종교적 여과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불교에 도입될 수 없다는 점은 명확하며, 따라서 이 부분은 앞으로 깊은 논의를 요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아비담마’는 필자가 지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대승불교는 ‘공(空, suṅṅa)’이 무슨 뜻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현재 한국불교에 널리 퍼져 있는 진아론(眞我論), 즉 ‘공’이 ‘참나·주인공·본래면목 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는 ‘공’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공’은 ‘무아’의 적극적인 표현이며 ‘무아’는 ‘연기법’을 견지하는 한 필연적으로 유도될 수밖에 없다.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법’을 버리지 않는 한 ‘진아’는 주장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72호 / 2016년 1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