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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부처님은

기자명 이미령

“세세생생 남 이롭게 하기위해 사셨으니…”

▲ 일러스트=강병호

“인생의 주로(走路)는 정해져 있네.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한번만 가게 되어 있네.”

항상 남을 위해서 사신 분
항상 무엇이든 베푸신 분
불자는 부처님 삶 새겨야
1년 동안 편지 벗에 감사

키케로의 말입니다. 스님의 지난 편지를 읽다보니 제 머릿속에 키케로의 이 말이 떠오르더군요.

인생이란 게 달리기와 같지요. 하얀 출발선에 나란히 서서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선수들, 어떤 이는 재빠르게 출발신호가 울리는 동시에 뛰어나가는가 하면, 어떤 이는 출발 자체가 굼떠서 끝내 꼴찌로 결승선에 들어섭니다. 하지만 먼저와 나중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모두 하얀 금을 밟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그 트랙을 그저 달려갑니다. 성적이 좋지 않으니 다시 뛰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떤 편지는 지우고 다시 써서 스님께 띄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아쉬움마저도 안고 그저 앞으로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게 인생인가 봅니다.
어느 사이 1년, 처음 서신교환을 제안했을 때는 불교 이야기를 푸짐하게 나눠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듯이 세상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스님도 저도 세속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기에 세속에서 불어대는 광풍에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주고받는 편지 속에는 세상일에 대한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고, 세연(世緣)을 내려놓고 떠나신 님들을 향해서는 그리움이 사무쳤었지요.

하지만 세상 인연을 따라서 그때그때 품었던 느낌들을 스님과 주고받은 지금, 어떤 아쉬움도 없습니다. 열심히 편지글로 풀어냈고, 지금 이렇게 마지막 편지를 쓰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됐지요. 그러면 된 것입니다.

스님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는 오늘은 마침 2016년 한 해 동안 제 강의가 완전히 끝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강의 내용은 부처님의 32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막상 ‘부처님이란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뭇거립니다. ‘깨달으신 분’이란 대답을 내놓지만 퍽 궁색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는지도 애매하고, 깨달아서 어떻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32상경’이란 경을 보면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를 파악할 수 있어 좋습니다. 아주 현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요. 이 경을 읽고난 제게 누군가 부처님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자랑스럽게 대답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세세생생 남에게 무엇이든 베푸신 분이다.

부처님은 세세생생 남을 위해 사신 분이다.
부처님은 세세생생 남 좋은 일만 하며 지내오신 분이다.
부처님은 세세생생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지, 어떻게 살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인지를 늘 생각하고 현자들에게 물으신 분이다.
부처님은 세세생생 참으로 반듯하게 말씀을 하신 분이다.
부처님은 세세생생 모든 생명을 돌보고 품어주신 분이다.
부처님은 세세생생 분노의 마음으로 남을 대한 적이 없는 분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세세생생 누군가를 대할 때 언제나 정면으로 반듯하게 마주 대하셨으며, 다정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눈길과 오로지 상대를 위하는 마음으로 임하신 분이다….”

스님!

우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늘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가운데 과연 그 누가 부처님 깨달음의 경지를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처럼 깨닫기 전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처님처럼 될 수 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건 경전에 숱하게 나와 있으니 조금만 경을 읽어보면 됩니다.

마지막 강의를 부처님에 대한 내용으로 채우고 나자 한 불자님이 이렇게 제게 묻더군요.

“지금 우리는 청와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공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늘 개개인들에게 분노를 잘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이 시대에 오신다면 사람들의 공분에 대해서는 어떤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까?”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역시나 개개인들을 향해서 분노에 휩쓸리지 말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분노에 휩쓸리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해결해야 합니다. 부조리한 행위, 부정부패는 청산해야 합니다. 죄 지은 자는 벌을 줘야 합니다. 그런데 범법자들은 우리가 분노에 휩쓸려 이성을 잃고 날뛰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에게 핑계의 여지를 주게 되며, 오히려 일은 악화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분노에 휩싸이지 말라고 일러주실 것이요, 저 악업 중생들에게는 인과응보의 이치를 또렷하게 들려주실 것입니다.”

스님!

보살이라면 이 현실을 보고서 분노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따뜻하고 아늑한 집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만든 자들을 향해 분노해야 합니다. 여전히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른 채, 악착같이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자를 향해 분노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건만 죽어가는 동안 속수무책 뭍에서 바라봐야만 했던 유가족의 슬픔을 단 한 번도 가슴으로 느껴보려 하지 않은 자들을 향해 분노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살은 연민을 품어야 합니다. 저들의 사악함이 인과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 이래저래 불보살님은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을 듯합니다. 아무리 말려도 지옥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러고보니 부처님에 대해 한 가지 더 정의내릴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속에 세상을 향해 슬픔을 가득 품고 계신 분이다”라고요. 스님의 편지에서도 드문드문 짙게 배어나오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아, 그런데 스님, 혹시 알고 계셨는지요.

법보신문사 측에서 언젠가 제게 약천사에 한 번 다녀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었는데 제가 사양했었다는 사실을요. 직접 만나 얼굴을 보면 마음속에 스님의 이미지가 사진처럼 딱 박혀버릴 테고, 그렇게 되면 어쩐지 내 속의 이야기들을 맘껏 풀어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게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스님과는 이 서신교환이 다 끝난 뒤에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만나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진짜 작별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1년 동안 편지 벗이 되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제주에서 뵐 때까지 평안하시길 빕니다.

이미령 드림

이미령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72호 / 2016년 1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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