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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봉률스님 생애 재조명

기자명 김태형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해인사 만세운동 주도···만해스님에게 군자금 제공 옥고치러

전 직지사 주지 봉률스님의 독립운동 업적이 사후 47년만에 공식적으로 입증돼 화제가 되고 있다. 이에 봉률스님의 업적과 관련한 각종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스님의 생애를 재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봉률스님은 1897년 6월 2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31-2번지에서 태어났다.망태(망태)라는 호를 가진 포월당 봉률스님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해인보통학교와 해인사지방학림에서 수학했으며 1919년 3.1운동때는 해인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1919년부터 22년까지 만주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후 만주일대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봉률스님은 1922년 전국사찰을 무대로 광복군 자금 모금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러야만했다. 당시의 상황을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찬)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해인사쪽으로 연락이 왔다. 서울에 유학중이던 도진호(都鎭鎬)는 송복만(宋福晩)에게, 김봉신(金奉信)은 김봉률(金奉律)에게, 김용기(金龍基)는 박근섭(朴根燮)에게, 최항형은 최범술에게 각각 독립선언서를 보내주었다. 이것을 계기로하여 해인사 학생의 독립만세 운동은 활기를 띄게됐다.(중략) 이들은 활동 범위를 넓혀가기로 하고 3인으로 1개조를 짰다. 제1조의 참가자는 강재호, 김봉률, 기상섭 등인데 이들은 양산 통도사, 동래부산 범어사, 김해, 경주지역에 선언서를 나누어주고 활동했다'고 전한다.봉률스님은 3.1운동이후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됐다는 소식이 전해짐을 계기로 1919년 5월 해인사의 강재호, 송보간, 이달준, 김봉률 등 10여명과 대흥사의 박영희 등이 속속 자진하여 지원 입교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금룡사에서 체포돼,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와 함께 봉률스님의 양아들이며 《청춘을 불사르고》란 책으로 유명한 일엽스님의 아들이기도 한 일당스님(속명 김태신˙화가˙직지사 중암거주˙관응스님 상좌)은 91년 펴낸 자서전 《라훌라의 사모곡》에서 직지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을 당시 봉률스님의 활동을 상세히 밝혔다.`김봉률 아버지가 나를 최영환 선생에게 보낸 것부터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것이다.(중략)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허백련 선생이 주축이 되어 전라도 광주지방에서 갹출한 독립운동자금이었다.(중략) 이것이 내가 독립운동자금을 운반해준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다음 방학때 조선에 돌아왔을 때는 김봉률 아버지도 최영환 선생도 독립운동자금 운반을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봉률스님의 입적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의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버지(봉률스님)의 몸 여기저기에는 고문의 흔적이 얼룩져 있었다. 김봉률 아버지는 남로당 지하공작원으로 몰려 고문받은것 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김봉률 아버지는 공산당 지하조직같은것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누명을 씌워 남로당원으로 몰려했던 것은 아버지가 이승만정권에 반대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봉률 아버지는 백범 김구 선생과 만주에서 함께 생활했던 애국 동지였다. 김봉률 아버지는 이승만씨가 아니라 김구 선생을 강력히 지지했었다.'이와 관련 유족인 김죽자(57세)씨와 김송자(55세)씨는 "당시 이승만 정권에서 아버지에게 금릉군수를 줄테니 협조하라는 등 회유책을 썼으나 아버지는 당시 정부 주요 요직을 비롯, 지방 행정관서를 친일파들이 그대로 장악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이승만정권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이승만 정권에 의한 탄압은 봉률스님 사후 47년만에 독립유공자로 지정, 명예획복을 하게된 가장 큰 이유였다. 한편 봉률스님은 직지사 탄옹 정혜스님을 은사로 출가, 1927년부터 48년까지 직지사 주지로 재임했다.

지난 15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봉률스님을 대신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유족들은 이날 오후 대구 통천사에서 모셔진 스님의 영전에 훈장을 헌증했다.

현재 스님의 유족으로는 김죽자씨와 송자씨가 있으며 스님의 두 아들인 광윤, 광기씨는 6˙25한국전쟁에 국군으로 참전, 전사했다.



대구=김태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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