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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울 부암사 주지 벽공 스님

면면히 이어진 비구니교단사 연구로 비구니 자긍심 높인다

▲ ‘그저 불교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출가해서 무엇을 하겠다, 어떤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묘한 일이다. 행자 시절 “어떤 스님이 되고싶냐”는 입승스님의 질문에 “공부해서 강사가 되겠다”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벽공 스님은 그런 것이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누구에게나 깨달음의 문을 열어 놓고 있으며, 남성 지배 사회와 계급사회에서 여성에게 종교 수행의 기회를 제공한 몇몇 안 되는 종교 가운데 하나이다.…(중략)…그러나 2600여 년이란 긴 역사의 비구니교단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는 실정이다. 특히 동아시아 비구니교단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의 연구 목적은 1차적으로 동아시아 비구니교단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동아시아 비구니교단의 역사’ 중에서.

‘윤회’ 법문에 커진 의문 품고  
불교 배우고 싶어 보덕사  출가

동아시아 교단 비교연구로 박사
중국기록 ‘비구니전’ 연구하며
“내생에도 비구니 되리” 발원

사회적 여건 열악한 시절에도
비구니·여성의 힘이 불교 외호

한중일의 건재한 비구니교단은
미래 불교 이끌 잠재력의 방증 

“철저한 계율정신 토대 다질 때 
사회적 위상 높혀나갈 수 있어” 

 
당찬 선언이다. ‘2600년 역사의 비구니교단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연구’가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동아시아 비구니교단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시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2011년 ‘동아시아 비구니교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서울 부암사 주지 능조벽공(能照璧悾) 스님이다. 학계에서는 드물게 한중일 비구니교단의 역사와 활동을 비교한 논문이다. 한중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에서 십 수세기에 걸쳐 비구니교단의 역사가 이어져 온, 그래서 현재까지 교육, 포교, 역경, 불사 등 각 분야의 일선에서 역량을 펴고 있는 비구니교단이 면면히 존재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파헤치고 있다. 스님은 “이 논문이 결코 잘 쓴 논문이라 할 수는 없다”고 겸손히 자평하지만 “죽을 만큼 열심히 썼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비구니라면 한 번쯤은 이 역사를 살펴보길 바란다”고 권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박사논문의 주제를 이렇게 정한 이유는.

“출가 때 은사 종현 스님으로부터 ‘너는 이제 남자도 여자도 아니니 여자의 일뿐 아니라 남자의 일도 모두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현실서 만나는 비구니스님들의 모습은 달랐다. 비구니스님들은 충분한 역량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또는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곤 했다. 때로는 비구니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위축돼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다. 비구니스님들은 누구보다 당당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런 모습을 조명하고 싶었다.”

▲석사학위 논문에서는 계율을 다뤘다.

“그렇다. 출가자의 기본은 계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많은 부분이 비구니교단 형성의 기본 조건인 수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님의 관심은 ‘여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속가 모친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생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모친이 세연을 접은 2년 후 스님은 출가를 결심했다. 용주사 청년법회에서 접한 정락 스님(1939~2011)의 법문은 일대사인연을 피어나게 한 불씨가 되었다.

▲어떤 법문이었나.

“윤회에 관한 법문이었다. 굉장히 어려웠다. 정락 큰스님에게 ‘윤회의 시작이 어디냐’고 물었다. 스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 자리다’라고 하셨다. 그 답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마도 그때 ‘이게 도대체 뭔지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스님의 답변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오히려 출가의 계기가 된 셈이다.”

▲보덕사에서 출가하게 된 이유는.

“불교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말에 보덕사가 출가본사로 정해졌다. 보덕사의 행자생활은 엄격하고 힘들기로 유명했다. 눈 뜨면서부터 일이 끊이질 않았다.”

생각했던 출가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눈만 뜨면 예불부터 공양 준비까지 하루 종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새벽예불 만큼은 더 없이 좋았다. 나중에 입승스님으로부터 ‘고집도 쌔고 일도 해본 적이 없기에 더 호되게 가르쳤다’는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찌 알 수 있었겠나. 그렇게 2년간 공양주 소임을 살고 강원에 입학했다. 보통은 출가 후 3년은 지나야 강원에 갈 수 있었다. “벽공이는 밥을 잘하지는 못했어도 열심히 했다”며 어른 스님들이 기특하게 보신 덕이다.

▲선방으로 갈 생각은 없었나.

“선방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불교 공부 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스님 돼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행자 때부터 입승스님이 ‘너는 이담에 뭐 할래’ 물으면 ‘공부해서 강사 해야죠’라고 대답했다. 참선수행도량에서 출가하고도 학승이 됐으니 그런 것이 인연 아니겠나. 또 참선은 최상근기가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몸이 약해 참선은 못하겠다 싶었다.”

강원에서 만난 경전은 불교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 가르침 한 말씀 한 말씀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씀’ 같았다. 쉬는 시간에도 경상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계율의 중요성이 크게 다가왔다. 청암사승가대학과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한 후 3년간 일본으로 유학한 스님은 그곳에서 만난 일본 스님교수들의 모습을 보며 계율을 연구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단단히 굳혔다. 그들은 한국비구니들의 지계행을 존경한다고 했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대천 오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2003년 석사학위를 취득한 스님은 박사과정에서 비구니교단사에 초점을 맞췄다.

▲박사학위 논문서 중국의 ‘비구니전’을 중요 텍스트로 다룬 이유는.

“중국비구니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 ‘비구니전’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중국서 전래됐기 때문에 중국비구니교단의 역사를 모르고는 우리 비구니교단의 역사도 고증하기 힘들다. ‘비구니전’을 보면 중국 비구니스님들의 활동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연구를 하면서 비구니로서의 자부심이 커졌다. 10년 전만 해도 ‘내생에는 남자로 태어나 비구가 되겠다’고 발원했었는데 논문을 쓰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생에도 여성으로 태어나 비구니가 되겠다고 발원한다.”

박사학위 논문서 인도 비구니교단의 탄생을 시작으로 중국 비구니교단의 성립과 형성, 한국 비구니교단의 형성과 역할, 그리고 일본 비구니교단의 발전과 종파 등을 꼼꼼히 살피며 각국 비구니교단의 특징과 비교를 시도한 스님은 이후 ‘고중세 일본 비구니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고찰’ (2011), ‘중국 선종사에 등장하는 비구니의 수행-속비구니전을 중심으로’(2013), ‘동아시아 비구니계율 전래와 수계의 변천’(2014), ‘한국 승가교육의 전개와 변천’(2015) 등 각국의 사례 분석을 심화시킨 논문들을 발표하며 비구니교단사 연구에 새로운 반석을 마련하고 있다.

▲인도, 스리랑카, 중국 등 각국 비구니교단 성립 당시 수계방식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구족계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삼사칠증의 계사와 사분율의 전래, 번역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경우 임시방편의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계의 적용방법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인가.

“구족계를 통해 받는 사분율은 변함없이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현대 상황에 맞게 응용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실에 맞게 응용하지 못하면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에 대한 철저한 연구, 현대에 적용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병행돼야 한다. 그것이 청규다. 부처님께서도 출가자들에게 상황에 맞게 살도록 가르치셨다. 또한 제일제자인 가섭은 부처님께서 제정하는 계는 모두 지키자고 했으니 두 가지를 병행하기 위한 길이다.”

‘팔경계’에 대한 기록에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최초의 비구니인 인도의 대애도비구니가 팔경계 수지를 조건으로 수계한 이후 팔경계를 수지했다는 기록은 없다. 스님은 이에 대해 “팔경계는 수계의 대상이 아니라 비구니교단 성립의 전제와 같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대만에서는 1965년 인순대사와 증엄대사 등이 “팔경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 벽공 스님은 석사학위를 받은 후 2011년까지 봉녕사승가대학 강사 소임을 맡았다. 스님은 이 사진을 “학인스님들과 함께 갔던 소풍”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만불교계에서는 그에 따른 파장이 없었나.

“대만불교가 전공은 아니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비구니스님들이 그 후에 보여준 역량이 그 파장을 흡수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교단 내에서나 사회적으로 반발여론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구니스님들의 활동과 성과를 보면 여론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추측해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제도와는 다른 인식의 문제로 보인다.

“여전히 비구니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요즘엔 비구스님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팔경계를 내세우는 경우가 드물지만 사석에서는 여전히 강조하곤 한다. 제도와는 별개로 인식이 평등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비구니스님들조차도 평등한 인식을 가질 수 없다.”

▲팔경계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 방법은.

“현재 우리 불교계 상황에서는 스님들보다 재가자들의 입장이 표명돼야 한다. 스님들이 이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기다리기만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오히려 더 철저히 계율을 지켜야만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며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다. 역사 속 이름을 남긴 비구니스님들은 철저한 지계정신 위에 수행자의 위상을 세웠다. 수행뿐 아니라 포교, 복지, 교학 등 그 활동의 모습은 다르지만 그 토대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계율정신이었다. 철저한 지계정신은 권력 의한 탄압, 사회적 신분하락, 왜곡된 인식 등 수없이 반복돼 온 불교의 위기 속에서도 비구니승가를 견고하게 지켜준 방패가 되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각 국가의 비구니 교단은 어려운 상황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명맥은 불씨와도 같다. 불씨를 보관하고 있어야 다음날 불을 다시 피울 수 있다. 사회적 여건이 열악했을 때는 불씨로 존재했던 것이고 여건이 좋아질 때는 큰 불로 피어오를 수 있었다. 비구니승단의 명맥 자체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는 것은 그 불씨가 살아있음이다.”

▲상좌부불교계에서는 비구니교단의 명맥이 끊어진 곳도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과 한국의 불교발전에는 여성과 비구니교단의 기여가 크다. 비구니승가와 여성들의 활동, 그 독특한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불교가 도성 밖으로 쫓겨났을 때에도 비구니들이 왕실여성들과 교류함으로써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힘을 지닌 중국과 대만, 한국의 비구니계가 미래의 불교를 이끌어 갈 것이다. 그러기에 비구니스님들은 이러한 역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속비구니전’에 대한 완역과 연구는 스님에게 남아있는 가장 큰 과제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조명되지 못했던 비구니스님들에 대한 연구도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다. 특히 일본에 비구니계를 전한 고구려의 혜편 스님과 함께 활동한 노비구니 법명 스님에 대한 연구는 우리나라 비구니승단의 오랜 역사와 활동을 풀어줄 열쇠와도 같다. 연구가 부진한 이유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행적을 기록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어떤 수행을 했으며 어떻게 중생에게 회향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수행은 그 시대의 사회상황과도 연관이 있다. 예를 들어 의상 스님과 원효 스님의 차이는 수행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고 그 배경에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행을 바탕으로 두 스님의 활동은 전혀 다르게 펼쳐진다. 이런 부분들이 정확히 기록돼야 당시 사회의 모습과 종교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

스님의 연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옛 스님들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스스로의 뿌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갈 길이 멀다보니 현대 비구니스님들에 대한 연구는 후학들의 몫으로 남겨야 될 것 같다. 이 연구가 하나의 주춧돌이 된다면, 그래서 비구니교단연구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된다면 충분하다. 그 역할을 비구니스님들이 해 준다면 더 없이 큰 기쁨이다.

▲연구활동을 통해 얻은 가장 큰 보람은.

“우리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게 됐다는 점이다. 특히 옛 비구니스님들의 치열했던 삶에 비해 우리는, 나는 지금 너무 안일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게 된다. 그것이 수행자로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한다.”

▲행자시절의 경험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남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과연 나는 잘하고 있는가, 수행자로 잘 살고 있는가, 계율을 잘 지키고 있는가. 끝없이 스스로를 돌아봐야만 진실 된 가르침이 나올 수 있다. 행자시절의 담금질이 수행자로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었다면 교학의 길을 걸었기에 평생 되돌아보고 재점검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와 다른 이들의 변화를 보는 것이 교학자의 또 다른 보람이기도 하다.”

스님의 회향은 대중을 향해있다. “철저하게 수행하거나, 철저하게 봉사하거나, 철저하게 교학을 해서 재가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시대를 탓할 수도 있다. 스님이라는 모습만으로 존경받는 시대는 사실상 끝나지 않았나. 하지만 스님은 “그것이 대승불교의 가치”라고 강조한다.

“현대인들은 간혹 사찰에서의 활동을 여러 문화생활 중의 하나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불자라고 할 수는 없죠. 그들을 어떻게 제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불교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기도 합니다.”

스님은 수원지방법원에서 이혼 신청을 하는 부부들의 화해와 조정을 위한 상담위원으로 10여년 넘게 활동했다. 그 후에는 서울 남부교도소에서 미성년자나 장애인 성폭행범 등 중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성교화프로그램’의 불교대표로 상담활동을 했다. 그야말로 전공과는 무관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님은 이런 활동들이 ‘불씨’라고 생각한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역량이 닿는 한 이웃과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비구니교단의 역사를 통해 배운 교훈이며 오늘날 비구니승가의 일원인 ‘벽공 스님’을 존재하게 한 원동력임을 잘 알고 있다. 스님은 연구와 봉사를 통해 그 원동력의 불씨를 찾고, 밝히고, 스스로 불씨가 되고자 한다. 그 빛을 따라 비구니후학들의 걸음, 당당히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머뭇거림 없는 장부 기질…인간관계 고민엔 직설 조언도


내가 본 벽공 스님


서울 법림사 주지 희철 스님=30여년 전 청암사승가대학 학인 시절 윗반 선배로 스님을 처음 만났다. 출가 후 낯선 사찰문화와 승가풍습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 힘들 때였는데 쉬는 시간에도 큰방에 앉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경을 보는 스님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런 스님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을 털어 놓았고 큰 힘이 되었다. 계율을 전공한 스님답게 때로는 엄격한 틀 안에 자신을 가둬 놓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제는 조금 자유롭게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이 율사 특유의 타협하지 않는, 깨지지 않는 단단함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에서는 머뭇거리지 않는 장부의 기질도 보인다.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생각이 말을 만들고 말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행동이 모습이 됨을 생각하면 스님의 내면에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한편으로 고집이 세다 소리를 듣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동국대 박사 우석 스님=후배들에게 더 없이 좋은 선배스님이다. 사중에 들어온 공양물이 있으면 대학원생들 연구실에 갖고 오셔서 대중공양을 해주신다. 그 모습이 마치 사형님 같다. 해주 스님의 제자 모임인 수미회에서도 맏형 역할을 톡톡히 한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시키기 전에 스스로가 솔선수범하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 뜻을 따라가게 된다. 부드러운 리더십이라고 할까. 무엇이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없고 항상 대중의 뜻을 물어 결정하는 것도 주변 사람들이 따르게 되는 이유다. 계율을 전공하셨기 때문에 스스로의 지계에는 빈틈이 없지만 그것을 내세워 주변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질책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다 보면 산중이 아닌 도심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럴 때 스님의 모습은 이정표가 되어준다. 음악이나 공연 등에 대해서는 깜짝 놀랄 만큼 높은 안목이 엿보이기도 한다.

부암사 신도 이정진씨=스님의 성격은 그야말로 솔직 담백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 특히 인간 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으면 듣기 좋은 말이나, 교과서적인 정답보다는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조언을 해주신다. 듣기 좋고 아름답기만 한 말씀이 아닐 때도 있지만 진짜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는 그 조언이 가장 큰 힘이 된다. 연구자나 학자로서 공부의 시작은 조금 늦은 편이지만 열심히 하는 것만큼은 젊은 사람들도 따라오기 힘들 정도다. 학문에 힘을 쏟기 위해서는 체력이 중요한데 스님은 워낙 공양하는 양이 적은 편이다.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잘 드셨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요즘 세상에는 돈에 대한 개념이 너무 없는 것도 단점인데, 노후대비는 어떻게 하고 계신지,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1372호 / 2016년 1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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