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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작고 사소한 이야기의 시작

기자명 조정육

지금 이대로의 나,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 호세희, ‘사계분경도 중 봄’, 공단에 명주실, 360×370cm, 2006년, 작가소장 : 재능보다 중요한 것이 정성입니다. 이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자수(刺繡)입니다. 작가는 꽃과 나비를 재봉틀로 드르륵 박아버리는 대신 바늘로 한 땀 한 땀 수놓아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손가락이 찔리고 눈이 빠질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굳이 자수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남루한 일상도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때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올 것입니다.

송년 모임에 갔을 때였습니다. 나이 지긋한 원로 선생님이, 당신은 10년 동안 한 번도 원고마감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10년은 고사하고 매번 마감 시간에 쫓겨 허둥거리던 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자부심이 담긴 말을 할 수 있을까.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앞좌석에 앉은 작가가 치명타를 날립니다. 새로 연재를 맡았는데 벌써 두 달분 원고를 미리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부지런함이라니. 저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부러움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꼈습니다.

머리가 둔했던 바보 주리반특
마당 쓸며 노력 끝에 아라한과
빠르든 느리든 완결성이 문제
중요한 건 지속해서 하는 것

얘기가 여기까지였더라면 잠깐 동안 우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뒤이어 더 놀라운 사연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떤 작가는 한 달 만에 책 한 권을 썼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작가는 일주일 만에 소설 한 편을 썼다고 했습니다. 한 문장 쓰고 머뭇거리고 또 한 문장 쓰고 뭉그적거리는 저로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한 프로의 세계였습니다. 이쯤 되면 부지런함의 차원이 아니라 재능의 영역을 점검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글쓰기는 여기까지인 듯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신문에 글이 실렸으니 글과 함께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제야 적성을 의심하다니. 늦어도 너무 늦은 후회입니다. 한 해의 아쉬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참석한 송년회에서 저 자신에 대한 모자람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쳐 밤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마음도 달랠 겸 경전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설상가상이 있으면 금상첨화도 있나 봅니다. 머피의 법칙이 있으면 샐리의 법칙도 있는 법입니다. 우연히 펼친 경전 부분이 ‘증일아함경’의 주리반특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머리가 둔한 바보 주리반특은 형 반특과 함께 출가했습니다. 동생 주리반특은 영민하고 똑똑한 형과 달리 공부에 전혀 진전이 없어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주리반특은 형에 의해 기원정사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마침 사위성에서 돌아오시던 부처님께서 울고 있는 주리반특을 발견하고 사연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서 ‘나는 먼지를 턴다. 나는 더러움을 닦는다’라는 문구를 외우게 함으로써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만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무리 영험하신 부처님이라도 단번에 주리반특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앞 문장을 외우면 뒷 문장을 잊어버릴 정도로 둔한 주리반특이었으니 아라한과를 얻기까지 자신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뒷받침되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알고 있던 내용인데 다시 읽으니 또 다른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달에 책 한 권을 쓰든 일 년에 글 한 편을 쓰든 결국 완결성이 문제일 것입니다. 빨리 가나 더디 가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기특한 결론에까지 도달했습니다. 다시 힘을 얻었으니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스로 주저앉다 일어선 일이 어찌 글쓰기뿐이겠습니까. 사는 것 자체가 앉았다 일어서는 일의 반복이겠지요.

긍정모드로 전환되었다 하여 불안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 집안에는 주리반특뿐만 아니라 선재동자나 문수동자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 좋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화려한 언변과 재치 있는 문장으로 많은 사람들의 앞길을 밝혀주는 사람들 역시 많습니다. 저같이 어리바리한 사람이 괜히 왔다 갔다 하면서 시야를 방해할 곳이 아니란 뜻입니다. 제 글을 읽는 누군가는 글 속에서 불교의 정법을 발견하고자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불교학 전공자가 아닙니다. 당연히 불교공부가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해 검증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불교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부족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또 다시 불교와 관련된 글을 쓴다는 것이 실은 매우 조심스럽고 주저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두렵습니다. 물론 제가 연재를 하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나름 비장한 목적도 없지 않습니다. 불교 공부도 많이 하고 수행도 열심히 한 독자님들이라면 저와 같이 부족한 사람이 하는 얘기도 귀담아 듣고 타산지석으로 삼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제가 쓰게 될 글은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살면서 느낀 아주 작고 사소한 얘기들을 들려드릴 참입니다. 그 얘기들은 반짝거리지도 강렬하지도 않습니다. 관심이 없다면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하찮은 소재가 대부분입니다. 별 얘기가 아니니만큼 무슨 심오한 뜻이 담겨 있을 리 만무합니다. 대단히 부끄럽지만 저는 당연히 하늘의 뜻을 알아야 될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데도 여전히 하늘의 뜻을 몰라 날마다 하늘을 쳐다봅니다. 무엇이 하늘의 뜻입니까? 그런 질문과 함께 말입니다. 저는 아직도 삶의 모범답안을 다 쓰지 못했습니다. 언제쯤 완성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작성된 누군가의 모범답안을 보는 것도 좋지만 저와 같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을 읽는 것도 나름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신문에 글을 쓰는 사람도 모자라구나. 별거 아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자로 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구나.’ 독자님들이 그렇게만 느낄 수 있어도 저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저하고는 출발부터 다른 훌륭한 성품을 가진 독자님들이 어쩌다 지치고 힘들 때 저의 글이 반딧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가끔씩은 자신에게 실망할 때도 있지만 지금 이대로의 자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기를. 거듭 기원합니다. 그럼 함께 시작해볼까요?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74호 / 2017년 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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