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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벽 선사상의 시대적인 배경

기자명 정운 스님

안사의 난과 회창파불 격동기 속
황벽 스님, 선종사 큰 물줄기 형성

‘전심법요’의 저자 황벽 희운(黃檗希運, ?~856)이 활동하던 시대는 당나라 말기에 해당한다. 황벽이 활동하던 때는 조사선이 싹터 한창 발전하던 시대이다. 황벽이 활동하던 전후 사회적인 배경 및 불교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대(唐代) 교학불교의 여러 종파가 형성되어 최대의 전성기를 누릴 무렵, 사회적으로 두 개의 큰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당 무종 때 회창파불(845~847)이고, 또 하나는 회창파불보다 80여년 앞서 일어난 안사의 난(755~763)이다.

회창파불, 역대 가장 큰 법난
경전 중심 교종 치명적 피해
실천 중심 수행 전념한 선종
피해 대신 오히려 크게 번성

안사의 난은 태평하던 중국사회에 문화와 역사, 정치까지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특히 당 왕조의 정치적 권위를 붕괴시킨 사건으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혁신적인 분위기가 태동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지방 절도사의 권력이 막강했으며 민정ㆍ재정ㆍ군사를 장악한 강대한 지방 권력이 형성되는 지배체제가 열리기 시작하던 때였다.

회창파불은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 가운데 가장 피해가 심했던 대규모적인 법난이었으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파불사건이다. 이 사건은 황제의 신임을 받은 도교의 도사 조귀진이 무종(在位 840~846)과 결탁해 일으킨 대대적인 법난이다. 물론 당시 불교 내부에서도 자정(自淨) 능력이 부족했다. 승려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유랑하는 승려나 사도승(私度僧) 등의 횡행도 한몫했다.

‘구당서’의 ‘무종본기’에 의하면, 회창파불로 인해 불교계에 피해가 매우 컸다고 한다. 곧 파괴된 유명 사원은 4600여개소, 무명 사원 4만여개, 환속한 승려와 비구니는 26만500명, 몰수된 전답은 수천만경, 양세호로 바뀐 사원 소속의 노비는 15만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다음 황제인 선종의 불교 부흥에도 파불 이전으로의 회복이 불가능했다고 하니,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파불사건으로 경전 중심의 교학불교가 큰 피해를 입은 반면 실천면을 반영한 선종이나 정토종은 오히려 번성하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사선이 확장 발전되기 시작했는데, 선종이 번창한 것도 사회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선종이 발전하는 데는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교종은 귀족사회와 중앙제도권 중심이었던 반면 선은 토속적인 시골을 배경으로 실천이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어려운 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수행에 열망 있는 많은 선자(禪者)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황벽 희운도 이런 선사들 중 한분이다.

이와 같이 안사의 난과 회창파불의 격동기를 지나 황벽이 활동하였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파불이 끝나고, 선종의 5가(마조 문하 위앙종과 임제종, 석두 문하에서 운문종ㆍ조동종ㆍ법안종) 7종(황룡파와 양기파)이 성립되는 무렵, 황벽의 선사상은 선종사의 큰 물줄기를 형성하는 진원지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황벽은 복건성 복주 출신으로 속성이나 생몰년이 정확치 않다. 다만 선종사에서 그의 입적을 대중년간(847~859)이라고 하는데, 위앙종의 위산 영우(771~853)의 생몰년에 비추어 추정할 뿐이다. 황벽의 법휘는 희운(希運), 시호는 단제(斷際)이며, 그는 일찍이 자신의 고향인 복건성 복주 황벽산 만복사에 출가하였다. 황벽은 후에 강서성의 의풍현에 거주하며 법을 펼쳤는데, 고향의 산 이름을 그대로 따서 황벽산이라고 고쳐 불렀다. 황벽산이 중국 선종사에 강서성과 복건성, 두 곳에 위치한 셈이다.

황벽은 출가 후 어떤 노파로부터 백장 선사 이야기를 듣고, 멀리 강서로 가서 위산과 함께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의 법을 받았다. 황벽은 신장이 7척으로 이마에는 육주(肉珠)가 있는 대장부였으며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는 활달한 천성이었다고 한다. 마조·백장 법맥인 황벽의 선풍禪風은 간명직절하고, 실천은 고고한 면이 드러나 있다. 이어서 제자 임제 의현(臨濟義玄, ?~866)으로 법이 이어졌다. 황벽의 선사상이 드러난 어록은  ‘전심법요’와 ‘완릉록’인데, 이 두 어록에 의해 조사선 선풍이 확립되고 체계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375호 / 2017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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