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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보다 풍요로운 마음이 진정한 선물

기자명 금해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7.01.10 12:43
  • 수정 2017.01.10 12:45
  • 댓글 0

흙길에 삼배하는 아이의 천진함
마애불 앞에 놓인 ‘하얀 눈’ 마지
형식과 틀을 벗어난 진실된 마음

할머니를 따라 우리 절에 자주 오는 16개월 된 아기가 있습니다. 아직 말을 못해서 부처님을 ‘아부’라 부릅니다. 법당에 들어서면 꼭 목탁을 치면서 절을 올립니다. 무거운 목탁을 겨우 잡고 일어서고 앉는데, 목탁이 바닥에 끌릴 지경입니다.

얼마 전, 뒷동산에 마애불을 봉안하는 불사가 있었습니다. 마애불의 무게 때문에 중장비가 동원되고, 절 마당도 어수선했습니다. 큰 장비차가 움직일 때마다 바닥은 울퉁불퉁 패이고 흙은 구석구석에 쌓여갔습니다. 바닥돌이 흩어져 있어서 걸음도 조심스러웠지요. 할머니와 아이도, 모두 함께 기도하며 마지막을 지켜보았습니다. 좌대가 놓여지고, 마침내 불상 본체가 모셔졌습니다. 그제야 부처님 상호를 덮었던 천이 열리고 모두들 환희로운 마음으로 합장했습니다.

할머니와 같이 있던 아기가 그 순간, 새로 모셔진 부처님 가까이로 다가섰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흙투성이 바닥에 무릎 꿇고 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작은 두 손 모아 합장하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순간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었고, 감탄사가 흘러나왔습니다. 한 보살님이 나오시더니, 아기 옆에서 삼배를 올렸습니다. 대중들이 하나 둘씩 흙바닥 그대로 삼배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지만 꽃 피어나는 봄날처럼 햇살 빛나고 따듯한 날이었습니다. 아이와 사람들의 얼굴에는 새로 모신 부처님 닮은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어느 여법한 법당보다도 더 여법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환희롭습니다.

그 날, 오랜만에 수년 전 선방에서 동안거를 보낼 때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겨울 눈 쌓인 가야산을 등산했는데, 높은 고개를 넘을 즈음에 얼음장 같은 거센 바람 때문에 큰 바위 뒤로 잠깐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사람 발자국도 사라진 그 곳에서 눈 덮인 키 큰 마애불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처님 앞에 놓인 마지그릇에는 하얀 눈이 소복하게 담겨져 있었고, 옆에는 사탕과 귤 하나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어떤 공양물보다도 더 화려하고 정성스러워 보였습니다. 눈 쏟아지는 높은 산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 올린, 만난 적도 없는 그를 위해 며칠을 기도 축원했었습니다. 그 공양물은 마음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렇듯 순수하고 맑은 마음이 전하는 감동은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마음 그대로 드러내는 순수한 아기의 천진함이, 하얀 눈으로 올린 마지와 귤 하나가 우리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킵니다. 형식과 틀을 벗어남에도 오히려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공양물, 기도 의식 등 모든 불사는 부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 방법입니다. 세상의 모든 형식과 여러 의식, 규범들도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형식과 규범이 반대로 우리를 더 힘들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전도된 상황도 많습니다.

정월달에는 인사할 곳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여건이 좋지 않아 가족조차도 보러가지 않겠다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선물이나 형식, 조건에 너무 억눌려서 소중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을 포기하지 않길 바랍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는 오랜만인 그대로, 가까운 이는 가까운 대로 마음을 전하세요. 꾸며진 것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기쁜 새해이길 바랍니다. 올해를 지나치면 어찌될지 모르는 내년까지 기다려야 하니, 차라리 오늘이 좋습니다.

조건보다는 풍요로운 마음을 선물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흙투성이 바닥에서 삼배 올리는 아이처럼, 눈으로 마지를 올린 누군가처럼 모든 형식과 관념을 뛰어넘을 겁니다.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처럼, 타는 듯한 메마른 삶 속에서도 걸림 없는 여유로움이 생길 겁니다. 그리고 상대에게도 연꽃 피어나게 할 겁니다.

금해 스님 서울 관음선원 주지 okbuddha@daum.net

 

[1375호 / 2017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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