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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하는 아이를 위한 기도

기자명 조정육

보이지 않게 쌓은 덕은 자식에게 돌아온다

▲ 이혜형, ‘향기’, 15.8×15.8cm, oil on canvas, 2015 : 귀하고 귀한 내 아이가 예쁘게 자라기를. 풀꽃 한 다발에도 환하게 웃던 그날을 잊지 않고, 넘어지고 주저앉을지라도 다시 힘차게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기를. 혼자 앞장서서 달려가기보다는 뒤처진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어주는 배려심 많은 아이로 자라주기를. 그런 자식을 위해 부모가 먼저 손을 내밀고 덕을 쌓아주기를.

연말연시에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뵈러 갔다. 아주버님 내외가 내려가니 그 동네 사는 시동생도 왔다. 우리는 아이들이 다 커서 대학입시에 대한 부담을 잊은 지 오래지만 올해 고3 수험생이 있는 시동생은 얼굴빛부터 달랐다. 그 얼굴을 보니 예전 일이 생각났다. 5년 전 1월이었다. 둘째 아들이 고3이 되자마자 나는 수술날짜가 잡혔다. 수험생 뒷바라지는커녕 자칫하면 영영 아들을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아들에게 유언처럼 말했다. ‘엄마가 없어도 부처님법과 책을 스승 삼아 살면 인생에 큰 실수는 없을 것’이라고. 다행히 수술 결과가 좋아 살아났다. 환자가 수험생에게 해 줄 수 있는 일 역시 많지 않았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들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일과 아들을 대신해 복을 짓는 일이었다. 내가 아들을 위해 덕을 쌓으면 그 결과가 아들에게 돌아가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신도가 거금 주며 49재 청하자
시장서 불쌍한 이들 돈 나눠줘
아무리 많은 재산 물려주어도
덕 쌓아 계교 쌓는 것만 못해

아들을 대신에 복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은 내 창작품이 아니었다. 우룡 스님이 쓴 ‘정성 성이 부처입니다’라는 책에서 혜월 스님에 대한 일화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한 신도가 혜월 스님한테 찾아와 거금을 주고 49재를 청했다. 혜월 스님은 그 돈을 들고 재 준비를 하기 위해 시장으로 가던 중 불쌍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돈을 나누어주었다. 결국 돈이 없어 재 준비는커녕 빈손으로 절에 돌아왔다. 그러면서 혜월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재 잘 지냈다. 진짜 재를 잘 지내 주었다.” 진짜 재를 잘 지낸 혜월 스님은 경허 대선사의 ‘삼월(三月)’ 제자 중 한 사람인 바로 그 혜월 스님이다.

타인을 위해 덕을 쌓는 행위는 꼭 불교집안에서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유교집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명대(明代)의 범립본(范立本)이 엮은 ‘명심보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많은 재물을 자손에게 물려줄지라도 자손이 능히 지키지 못하고, 책을 쌓아서 자손에게 남겨줄지라도 자손이 능히 읽지는 못할 것이니, 이 모두가 보이지 않게 덕을 쌓아서 자손을 위한 계교를 세우는 것만 못하다.”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한 말이다. 사마광은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학자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은 사람이다. ‘자치통감’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그런 책을 쓴 사람이 오랫동안 인간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내린 결론이 덕을 쌓으라는 얘기였다. 맨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 깜짝 놀랐다. 사마광은 불자가 아니라 유학자다. 그런 그의 사고방식이 매우 불교적이라는 게 놀라웠다. 사람의 도리는 종교나 사상을 뛰어넘어 보편적이다. 종교는 그 보편성을 사람의 길로 인도해줄 뿐이다.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염불을 하며 아들이 고3생활을 잘 견뎌내기를 기원했다. 운전도 하지 못해 다른 엄마들처럼 아들을 등하교시켜줄 수는 없었지만 아들의 등하굣길이 안전하기를 바라는 응원은 할 수 있었다. 조용했지만 힘찬 응원이었다. 응원은 그렇다 치고 덕은 어떻게 쌓을 것인가. 돈만 쓰고 있는 처지에 큰돈을 들여 복을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내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이 땅에 보탬이 될 만한 선행을 실천하기로 했다. 선행이라고 해봤자 거창한 행동은 아니었다. 마트 야채코너에 가면 가장 볼품없고 시들시들한 야채를 샀다. 과일가게를 가면 멍들었거나 상처 있는 과일을 샀다. 내가 사지 않으면 주인은 손해 보고 팔아야 할 상품성 없는 물건들이었다. 선물이 들어오면 그 중 가장 좋은 물건을 골라 경비실이나 청소 아줌마에게 보냈다. 동네 사람들을 위해 아파트 화단에 꽃을 사다 심었고 운동 삼아 화단의 풀을 뽑았다.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뿌듯했다. 왠지 내가 지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 것 같은 자부심도 없지 않았다. 얼마나 큰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큰마음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도 들었다.

아들을 직접 챙기는 대신 나만의 방식으로 했던 아들을 위한 행동은 매우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 일단 아들을 쫓아다니면서 뒷바라지를 하지 않으니 잔소리할 일이 없었다. 엄마가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 아들의 마음도 편해 보였다. 가끔씩 아들이 공부 무게에 짓눌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은근슬쩍 경전 구절을 읽어주며 격려했다. ‘자신이 원하는 일에 좋은 결과를 바란다면 인간으로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받아들여라.’ ‘숫타니파타’에 나온 문장이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날 있었던 얘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들어주었다. 수험생이 있는 집안은 발자국 소리도 내면 안 된다는데 얘기를 듣는 내가 지칠 정도였으니 감지덕지였다. 사소한 선행의 실천으로 받는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분에 넘치는 복이었다. 상황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들은 고3수험기간을 무사히 잘 보냈다.

시동생은 학원비도 만만치 않게 드는데 아이의 성적이 생각만큼 잘 나오지 않아 무척 걱정하는 눈치였다. 먼저 그 과정을 다 거쳐 간 우리 부부가 새로 수험생의 부모가 된 시동생에게 덕담 한 마디씩을 건넸다. 공부 잘하는 것도 중요하고 명문대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도리를 하는 것이다. 걸핏하면 모자에 마스크 쓰고 TV에 나온 사람들을 봐라. 그들 모두 명문대 출신에 금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들이다. 우리 부부는 최근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던 여러 사건들을 예로 들며 열과 성을 다해 조언했다. 그러나 시동생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그건 그거고 자신의 문제는 별개였다. 지금 시동생에게는 딸이 높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가 없어 보였다. 조금 안타까웠다. 그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우리도 그랬으니까. 어떤 일의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은 잘 알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되는 진리도 있다.

세상에 자기 자식 귀한 줄 모른 부모가 어디 있을까.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심정이다. 그런 귀한 자식을 위해 부모가 작은 덕이라도 베푼다면 언젠가는 그 덕이 이자에 이자가 붙어 돌아올 것이다. ‘선을 쌓은 집안에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積善之家必有餘慶)’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올 한 해를 불안과 번민 속에서 보내게 될 조카에게 응원을 보낸다. 조카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어서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그 시간도 알고 보면 아주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마운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75호 / 2017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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