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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사들은 왜 이리 과격한가?-하

과격함, 자신 향할 때 아상 부수는 힘으로 작용

▲ ‘백척간두’ 고윤숙 화가

아상이란 사실 얼마나 강고한가? 사라졌다고 믿는 순간에도 의연히 살아남아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게 아상이다. 그러니 아무리 세심하게 설득하고, 아무리 진심으로 수긍해도 사라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다. 선사들의 언행이 파격적일 뿐 아니라 저리 ‘과격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감각기관을, 신체 전체를 강한 당혹 속으로, 절벽 밑의 심연으로 밀어 넣는 강밀함 없이는 결코 깨부수어줄 수 없는 것이 아상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래서 임제나 정상좌뿐 아니라 많은 선사들이 말 대신 할이나 방을 구사하고 뺨을 때리고 때론 손가락을 자르는 ‘노파심’을 발휘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백척간두에서 감히 누가 뛰어내릴 것이며, 맨손으로 은산철벽을 오르겠다고 누가 달려들 것인가?

굳이 아상을 깰 때뿐 아니라, 불법의 요체를 가르칠 때도 선사들은 이리 과격하고 강밀한 방법을 사용한다. 관념을 꿰뚫고 신체의 벽을 깨는 강밀함으로 학인들을 깨우침의 길로 밀어붙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체를 가격하고 감각기관을 엄습하는 방할 같은 언행은 단지 아상을 깨주는 것일 뿐 아니라 깨달음을 향해 학인의 심신을 밀어붙이고 추동하는 강력한 격발장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가령 백장회해(百丈懷海)의 얘기가 그렇다. 백장이 어느날 마조를 모시고 가다가 날아가는 들오리떼를 보았는데, 마조가 물었다.

방·할은 깨달음 추동하는 강력한 격발장치
흉내 내며 소리 지르면 정형화된 언어 불과
선어록, 쓰여진 당송 시대로 회귀할 것인지
21세기 한복판으로 불러올 건지 고민 필요

“저게 무엇인가?”
“들오리입니다.”
아... 걸려든 것 같다. 그저 들오리인 것을 몰라서 마조가 물었을 리 없다. 마조가 다시 묻는다.
“어디로 가는가?”
“날아갔습니다.”

이런,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다시 보이는 대로 답하고 있다. 마조는 저 보이는 것 뒤의 보이지 않는 것을, 흔히 ‘본분사’라고들 하는 ‘체(體)’를 묻고 있는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마조는 갑자기 머리를 돌려 백장의 코를 쥐고 세게 비튼다. 백장은 아픔을 참느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조가 말한다.
“다시 날아갔다고 말해봐라!”

백장은 그 말끝에서 느낀 바가 있었다. 시자들의 거처인 요사채로 돌아와 대성통곡을 하니 함께 일하는 시자가 물었다.
“부모 생각 때문인가?”
“아니.”
“누구에게 욕이라도 먹었나?”
“아니.”
“그럼 왜 우는가?”
“마조스님께 코를 비틀렸으나 철저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철저히 깨닫지 못한 건가?”
“스님께 물어보게.”
직설적 대답을 하지 않고 스승에게 미는 것이 이전과 무언가 크게 달라졌다. 어쨌건 궁금했던 시자는 마조에게 가서 물었다.

“회해시자는 무슨 이유로 깨닫지 못했습니까? 요사채에서 통곡을 하는데, 스님께 물어보라고 하던데요.”
“그가 알 테니 그에게 묻도록 하라.”
다시 그 시자는 요사채로 돌아와 말했다.
“스님께선 그대가 알 것이라 하시며, 그대에게 물으라 하셨네.”
이 말을 듣고 백장이 깔깔 웃자, 그 시자가 말했다.
“조금 전엔 통곡하더니, 무엇 때문에 금방 웃는가?”
“조금 전엔 울었지만, 지금은 웃네.”

고지식하게 보이는 대로 대답하던 둔한 시자가 울고 웃음에 자재로운 가벼움을 얻은 것을 보면, 그는 다는 아니라 해도 깨달음의 한 끝을 본 게 틀림없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다음날 마조가 설법을 하려고 법당에 올랐는데, 대중이 모이자마자 백장은 법석(法席)을 치워버렸다. 들오리고 지붕 끝 풍경이고 온통 다 불법인데 따로 설법할 게 뭐 있느냐는 말일 게다. 그러자 마조는 바로 내려왔다. 백장의 생각을 간파한 것이다. 백장이 방장실로 따라가자 마조가 묻는다.

“내가 조금 전에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별안간 자리를 치워버렸느냐?”
뭐라 말하려는지 시험하려는 질문이다.
“어제 스님께 코를 비틀려 아파서였습니다.”
아픔의 고통에 격발되어 슬쩍 들여다보니, 온통 다 불법이더라는 대답일 게다.
“그대는 어제 어느 곳에 마음을 두었느냐?”
“코가 오늘은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더는 아플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이기도 하다. 보아야 할 것, 자신이 찾고자 하던 것을 보았으니까.
“그대는 어제 일을 깊이 밝혔구나.”

백장은 절하고 물러나왔다. 그 다음 다시 마조를 참례하고 모시고 서 있는데, 법상 모서리를 불자(拂子)를 보고 백장이 물었다.
“이 불자를 통해 작용합니까, 아니면 이를 떠나 작용합니까?”
이전엔 마조가 들오리를 들어 ‘본체’를 물었지만, 이번엔 백장이 불자를 들어 ‘본체’의 작용에 대해 묻는 것이다. 곧바로 고지식하게 대답해줄 마조가 아니다. 마조가 다시 물었다.
“그대가 뒷날 설법을 하게 된다면 무엇을 가지고 대중을 가르치겠느냐?”
백장이 불자를 잡아 세웠더니 마조가 다시 묻는다.
“이것을 통해 작용하느냐, 이것을 떠나 작용하느냐?”

백장의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준 것이다. 묻는 이와 답할 이가, 주객이 어느새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탁월한 솜씨인가! 백장이 대답 대신 불자를 제자리에 걸어두자 마조는 기세 있게 악! 하고 고함을 쳤다. 백장은 이 할 한 방에 곧장 사흘 동안 귀가 멀었다고 한다. 마조는 이처럼 제자의 코를 비틀고 귀를 뭉개버려 눈을 뜨게 한 것이다. 백장의 제자 황벽은 나중에 이 얘기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할도 자주 쓰면 으레 예상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 효과는 사라져버린다. 정형화된 ‘언어’가 되어 버려, 잘 알지도 못한 채 흉내 내어 소리를 질러대는 일도 흔하게 된다. 황벽의 제자인 목주도종(睦州道?)이 자신을 찾아온 스님에게 물었다.
“요즘 어디 있다 왔느냐?”

그러자 스님은 대뜸 소리를 질렀다. 있던 장소를 순진하게 대지 않고 할을 한 것을 보면 좀 가락을 타 본 스님인 듯하다. 이에 목주가
“노승이 너에게 일할을 당하였구나.”
하니 스님이 또 다시 소리를 질렀다. 분명치 않으니 한 번 더 시험해보려는 것인데, 이 스님, 다시 소리를 질렸으니 제대로 걸렸다.
“서너 차례 소리를 지른 다음엔 어찌하려는고?”
이에 스님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목주가 한 방 후려치면서 고함을 친다.
“이 사기꾼!”

아무리 과격한 방법도 이처럼 패턴화 되면 그 힘을 잃는다. 그러면 과격함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문제는 과격함이 아니라 예상 밖의 지점에서 학인을 덮치며 일깨우는 강밀함이다. 그래서였을까? 할로 유명한 임제는 이를 걱정했는지, 자신의 입적이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내가 떠난 뒤에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잃지 말라.”
당시 원주를 맡고 있던 삼성혜연(三聖慧然)이 나오며 말했다.
“어찌 감히 스님의 정법안장을 잃겠습니까?”
“이후에 어느 사람이 너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삼성은 대뜸 소리를 지르자, 임제가 말하였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비구(比丘) 대에서 사라지게 될 줄이야!”
이에 삼성이 곧바로 절을 올렸다.
임제의 제자인 삼성이 소리를 지른 것은 임제가 ‘할’로 가르친 것을 이어 가겠다는 말이었을 게다. 그런데 임제는 자신의 정법안장이 거기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선가에서 흔히 하는 말 중 하나가, 모름지기 스승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으면 스승의 뜻을 반도 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스승의 가르침이나 언행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반도 전하지 못해 결국 사라지게 하는 일이다. ‘정법안장’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후대에 전할 수 있을까?

스승을 넘어서는 무엇을, 다시 말해 스승에게 없던 것을 더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펴야 한다. 그것이 ‘스승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말의 속뜻일 게다. 끊임없이 갱신하지 못하는 것, 과거의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은 오래지 않아 고사하고 소멸한다. 새로이 태어나길 반복하는 것만이 계속 살아남아 그 생명을 활발하게 지속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전통은 그걸 잇고 유지하는 것으론 유지할 수 없다. 갱신하고 창조하며 변화시키는 현행적인 시도만이 그것을 잇고 유지한다. 임제의 할이 탁월하고 유명하다 하나, 소리 지르는 것만 반복한다면 그 역시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하여 할을 하는 삼성을 보고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비구 대에 사라지게 될 줄이야”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성이 이를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그 말을 듣고 난감해하는 게 아니라 태연하게 절을 하는 것을 보면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임제 또한 그걸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그게 아니었다면 절을 하는 삼성을 발로 걷어찼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할을 하는 삼성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식으로 오해될 수 있을 마지막 말을 했던 것은, 삼성의 언행에 빗장을 질러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하려 함일 것이다. 노파심에 마지막 경계의 말을 덧붙인 것일 게다.

이처럼 선사들은 학인들의 아상을 깨주기 위해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고 몽둥이를 휘두르지만, 그뿐 아니라 자신들의 가르침을 펴는 것에서조차 하나의 상(相)이나 방법에 매이지 않도록 제자들을 가르쳤다. 내 가르침에 연연하지 말고, 네 길을 가라! 새로운 길을 만들며 가라! 선사들의 가르침이 파격적이고 과격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남의 전제 아닌 자신의 전제, 남의 상이 아니라 자신의 상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남에게는 엄격하지만 자신에겐 너그러운 이들은 강밀한 게 아니라 권위적인 것이다. 과격함이 남을 향할 때 그것은 그저 가혹한 억압이나 폭력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를 향할 때 그것은 자신을 뒤집고 모두를 바꾸는 전복의 힘이 된다.

임제의 후예들은 그 뒤 어떻게 임제의 정법안장을 펼쳤는가? 삼성이 할을 했지만 임제 이후 할을 해서 특별히 유명해진 스님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임제종을 크게 부흥시켰던 것은 오조법연(五祖法演), 원오극근(圓悟克勤), 대혜종고(大慧宗?)였다. 이분들이 임제의 정법안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잘 알다시피 할이 아니라 간화선이라는 새로운 참구의 방법을 창안함으로서였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임제가 “나의 정법안장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그의 후예들은 무어라고 답할까? 오백년 전에 대혜종고가 했던 답을 다시 반복한다면 임제는 무어라 응수할까?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몽둥이도 할도 모두 통하지 않게 된 시대에, 뜰 앞의 잣나무는커녕 뜰도 잣나무도 보기 힘든 이 도시의 공간에서, 개에게 생명의 권리가 있는지는 관심이 있어도 개에게 불성이 있는지는 누구도 관심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선의 종풍을 되살릴 수 있을까? 선가의 어록 속으로, 그것이 쓰여진 당송 시대로 사람들을 계속 데리고 들어가야 할까? 반대로 선가의 어록마저 21세기의 도시 한 복판으로 불러낼 수는 없는 것일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76호 / 2016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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