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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난민과 한파

기자명 최원형

혹한의 벼랑 끝에서 떨고 있는 이들 기억해야

이젠 겨울이어도 눈 쌓인 풍경을 보는 일 자체가 드물어졌다. 겨울 날씨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들이 올 겨울에도 어김없이 나온다. 아무리 겨울이 포근해도 강원도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터라 내 겨울의 기억은 여전히 매섭다. 손등은 쩍쩍 갈라지고 처마마다 굵고 긴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으며 판유리 한 장이 고작이었던 창에는 이른 새벽 온갖 기하학적인 모양의 성에가 들러붙었고, 어린 내 키를 훌쩍 넘는 폭설이 겨울이면 찾아왔으니까. 눈에 갇힌 날은 며칠이고 두문불출하고 지루한 방안 생활을 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도 두툼한 옷과 이불이 있었고, 연탄불로 뜨끈한 아랫목이 있었으며 끼니를 때울 음식은 충분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침마다 창에 아로새겨진 성에를 손톱으로 지우고 그림을 그리며 놀던 그 시절이 지금 돌아보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나라밖에서 전해지는 소식들로 우리에겐 포근하기만 한 이 겨울이 다시금 매섭게 느껴진다. 유럽과 미국에 기록적인 한파가 닥쳤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는 25cm가 넘는 폭설에다 한파까지 겹쳐 초, 중, 고가 휴교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기상관측 이래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것은 다섯 차례 정도였다고 하니 이번 한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된다. 뉴욕은 폭설로 도로가 마비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유럽도 사정은 비슷하다. 유럽 전역에 불어 닥친 한파로 서른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진다. 폴란드, 러시아 등 유럽 지역을 강타한 혹한으로 모스크바 인근은 지난 8일 새벽기온이 영하 41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이번 유럽과 미국에 한파가 엄습한 것은 작년 내내 북극의 기온이 높았던 탓이라 한다. 지난해 11월 북극 기온이 평년보다 무려 20도 이상 높게 유지되었고, 북극해를 덮은 바다 얼음 면적이 가장 적었다 한다. 이렇게 북극이 따뜻하다보니 평상시 북극의 찬 기운을 그곳에 가둬두고 돌던 제트기류가 약해져 힘을 잃었고 그 때문에 북극의 찬 기운이 남하하면서 북미대륙과 유럽이 혹한을 겪고 있는 거라는 얘기다.

북미대륙·유럽에 기록적 한파
작년 내내 북극기온 높았던 탓
난민·노숙인 생존 위협하는 혹한
이들 위해 바티칸 기숙사 개방

아무리 혹한이 닥쳐도 살 집이 있는 이들은 난방비를 걱정할지언정 그래도 견딜 수 있다. 문제는 집도 절도 없이 거리에 나 앉은 이들이다. 며칠 전 추위 속에 처한 난민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짤막한 영상을 봤다. 전례 없이 불어 닥친 혹한으로 난민들의 생존이 벼랑 끝에 몰려있었다. 혹한의 날씨임에도 맨발에 헤진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난민청년은 담요 한 장을 뒤집어 쓴 채 눈발이 날리는 바깥에 서서 수프를 떠먹고 있었고, 폭설로 난민 캠프가 무너져 오갈 곳이 없게 된 한 난민 여성은 오열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녹아들어갔을까를 생각하니 내 눈도 뜨거워졌다. 그들이 추위를 면할 수 있는 거라고는 회색빛 담요 한 장과 장작불에 불을 잠깐 쬐는 게 고작이었다. 밤 동안에도 짧게 토막잠을 자고는 내내 추위에 떨고 있다는 그들을 생각하니 따뜻한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내 일상이 과분했다. 노숙인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도시의 밤 풍경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게 노숙인들이다. 파리의 밤도 마찬가지였다. 명품가게가 즐비한 곳이 밤이 되면 그 주변으로 노숙인들이 찬 바닥에 몸을 뉘이곤 했다. 대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인터넷을 뒤지며 뭔가 도움을 줄 방법을 찾다보니 작년에 한 의류회사가 안 입는 옷을 기부 받아 난민들에게 보내는 천만 벌 의류 기부 캠페인을 진행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티칸에서 훈훈한 소식도 들려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자선소와 협력해서 난민들과 노숙인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바티칸의 기숙사를 24시간 공개하기로 했다. 만약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침대가 다 차버렸다 해도 언제든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누구든 따뜻한 공간과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으며 원하는 이들에게는 침낭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페미니스트이자 평화주의 이론가인 바바라 데밍의 멋진 문장을 발견했다. ‘우리의 맥박은 모든 타인의 목구멍에서 뛰고 있다.(Our own pulse beats in every stranger’s throat)’ 내가 너일 수밖에 없는 연기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말을 몇 번이고 곱씹으면서 관계성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바라가 언급한 그 ‘타인’은 저 유럽 세르비아의 난민수용소에서 혹한에 떨고 있을 그일 수 있다. 내 맥박이 힘차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뛰기 위한 지구촌의 지혜가, 십시일반의 지혜가 절실한 때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376호 / 2016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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