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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며느리 미워한 할머니의 고민

삼독심 없애야 나와 남 사랑할 수 있으니

▲ 그림=근호

한 할머니가 십 리 길을 걸어 절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먼 길을 머리에 쌀을 이고 온 탓에 숨이 몹시 가빴다.

친절한 마음은 ‘부처님 마음’
배우려면 자신부터 다스려야
자아도취적 자기사랑은 탐심
건강한 자기사랑은 마음 닦기

스님을 뵙자마자 할머니가 말했다.

“스님, 제가 불공을 올리려고 왔습니다.”
“그러니까…무슨 바라시는 게 있으시군요.”
“제가 며느리 때문에 여간 속이 상한 게 아닙니다.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마음에 영 안 들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며느리의 마음을 좀 고쳐 보았으면 합니다.”
“허어!”
하며 스님이 탄식했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여기까지 오실 게 없는데 그랬습니다.”
“예?”
“절에 계신 부처님보다 집에 있는 부처님이 더 용하거든요. 그러니 얼른 이 쌀을 갖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집에 부처님이 계신다고요?”

깜짝 놀라는 할머니를 바라보는 스님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보살님이 지금 집에 돌아가 가만히 살펴보시면 부엌에서 앞치마를 입고 온종일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하고 있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분이 바로 집에 있는 용하기 짝이 없는 부처님입니다.”
“지금… 제 며느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 지금은 아니지요.”

하고 스님이 말했다. “그렇지만 내일이나 모레쯤은 그럴 수 있습니다. 보살님께서는 곧 돌아가셔서 이 쌀을 파십시오. 그런 다음 며느님에게 좋은 선물을 하나 해줘 보십시오. 그리고 그 물건에다 마음을 넉넉히 덤으로 베풀어 주시고요. 시어머니가 그렇게 물질도 주고 마음도 주시는데, 세상 어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않겠습니까?”

할머니의 표정이 뽀로통해졌다.

“전 못해요. 며느리가 나를 부처님처럼 대한다면 그때는 혹 몰라도요.”
“그게 문제군요.”

하고 스님이 말했다. 스님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이 문제는 이렇게 풀어야겠습니다. 먼저 보살님께서 보살님 자신을 부처님으로 대해 보십시오. 제 말은 보살님께서 자신을 좀 더 이해하고 아끼고 위로하고 격려해 보시라는 겁니다. 친절이야말로 부처님의 마음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친절한 마음을 기른다는 것은 곧 부처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친절한 마음은 봄바람과 같습니다. 보살님께서는 지금부터 가슴에 훈훈한 봄바람을 넣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요?”
“그게 참 영험이 있거든요. 무슨 영험이 있느냐? 그렇게 하시면 며칠 안 지나 보살님의 얼굴색이 환해지실 겁니다. 다시 며칠이 더 지나면 입가에 웃음이 피어나게 될 거구요.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어느 사이 며느님에게도 친절해지게 되실 겁니다. 친절이란 게, 이게 쉽게 옮겨가는 성질을 갖고 있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는 덧붙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제가 갖고 온 이 쌀은 부처님 전에 올리고 가겠습니다. 집에 가서는 이 절 부처님이 진짜로 영험하다는 걸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도 할 겁니다.”

머리에 인 무거운 쌀과 함께 가슴에 얹혀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할머니는 친절이라는 이름의 봄바람을 가슴에 품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며칠 뒤, 할머니의 집 부엌에서는 며느리의 즐거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기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나르시시즘, 즉 자아도취로서의 자기 사랑이 있다. 불교는 이 사랑을 권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아도취는 불교인이 마땅히 타파해 소멸해야만 하는 탐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건강한 자기 사랑이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건강하다는 것은 탐진치를 적게 하는 것, 즉 탐심을 적게 하여 베푸는 마음을, 진심을 적게 하여 친절한 마음을, 치심을 적게 하여 지혜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수한 점은 친절과 베품을 배우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일 것이다. 미국에서 포교를 하던 때 기독교인 세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그분들에게 불교는 먼저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말했더니 한 분이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가르친다며 크게 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자기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 불교가 가르치는 자기 사랑은 탐진치를 적게 하는 것이라며 자기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자기를 잘 사랑하여 탐진치가 적어지면 그는 자연스럽게 남을 사랑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세 분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법구경’은 “세상 끝까지 가본다고 해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존재는 없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어찌하라는 것인가.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자신을  나르시소스처럼 사랑하라는 것일까. 그리스 신화의 한 주인공인 나르시소스는 아름다운 자신의 외모를 물에 비추어 보다가 물에 빠져 죽는다. 불교 또한 나르시시즘으로서의 자기 사랑은 탐진치를 거쳐 파멸에 이른다고 설한다.

그리하여 ‘법구경’은 앞 구절에 이어서 설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라”고. 이로써 우리는 진정한 자기 사랑이 수행임을 알게 된다. 마음을 닦는 것이야말로 불교에서의 진정한 자기 사랑인 것이다.

예화에 나오는 할머니는 그런 자기 사랑을 모르고 있었다. 나르시소스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랑에 기울어져 타자에 대한 배려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할머니를 맞아 스님은 친절한 마음을 권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친절을 며느리가 아닌 할머니 자신에게 먼저 베풀라고 권한다는 점이다. 며느리에 대한 친절은 그 다음의 일로써, 즉 진정한 자기 사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결과로써 설해진다.

향기로운 꿀을 가진 꽃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변에 있는 벌나비에게 이익을 베풀게 된다. 같은 의미에서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이익을 베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이타-자리(利他自利)라고 말하지 않고 자리-이타라고, 하화중생(下化衆生)-상구보리(上求菩提)라고 말하지 않고 상구보리-하화중생이라고 말한다.

탐·진·치는 마음을 단단하게 응고시키고, 응고된 마음은 독소를 발하며, 무탐·무진·무치는 마음을 부드럽게 풀고 풀어져 부드러워진 마음은 향기를 발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마음의 탐진치를 덜어내어 꽃다운 향기로움으로 바꿔 나가는 것은 자리의 길이자 이타의 길, 상구보리이자 하화중생의 길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76호 / 2016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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