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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찰의 꽃살문

기자명 정진희

창살에 곱게 피어나 부처님 계신 곳 장엄

▲ 영변 보현사 대웅전 정면 문장식(‘조선고적도보’6).

겨울이 짙어가는 이 시기 우리네 마음속엔 벌써 봄을 기다리지만 시절이 하수상 하니 봄이 올동말동할 것만 같다. 불어오는 차가운 산바람은 세상의 속진(俗塵)을 모두 털어낼 만큼 매섭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찾아간 겨울의 산사는 세상 번뇌와는 무관한 듯 고즈넉하기만 하다. 한겨울 눈바람에 발끝이 시리고 행여 바람이 들까 연신 옷깃을 여미는 이 계절에 부처님에게로 향하는 문의 창살에는 벌써 봄이 와 있다. 내가 서 있는 문 밖과 부처님이 계시는 문 안을 속(俗)과 성(聖)으로 구분이라도 짓듯 법당의 문창살에는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라는 노랫말과 같이 이 엄동설한에 갖가지 꽃이 흐드러지게도 피어있다. 마치 불법의 세상인 법당 내부는 기화요초가 만개한 비밀의 정원과 같아 창을 넘어 바라보는 이에게 몽환적 느낌마저 들게 한다.

문살 교차점에 꽃 조각 일반적
판재 통으로 붙여 장식하기도
용은 불법 수호하는 호법 의미
연지 새겨 연화화생 의미 담아

단아하고 정제된 형태로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고 있는 간결한 격자문 창살에 비해 꽃으로 수놓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꽃살문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사찰의 장엄이다. 선암사의 꽃살문은 괴석 사이에 뿌리를 내린 커다란 나무가 자라 가지를 뻗고 꽃 봉우리를 맺은 모습이다.  우리나라 꽃살문 가운데 최고 수준의 명품으로 인정받는 내소사의 화려한 형태의 꽃살문에는 인간으로 변한 호랑이가 화승이 되어 곱게 곱게 단청하다 다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세월이 지나 고운 빛의 단청은 다 사라지고 이제는 나뭇결이 그대로 보이지만 형태에서 풍겨지는 화려함은 단출한 색감도 문제되지 않는다. 1633년 중건된 내소사 대웅전의 꽃살문은 꽃송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는 잎을 연결고리로 삼았다. 얼핏 보면 모두 같은 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화, 모란, 연꽃 등 그 종류도 다양하고 형태도 만개한 꽃송이에서 봉우리까지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는 불성을 깨우치는 단계를 꽃 봉우리와 활짝 핀 꽃에 비유하기도 한다. 꽃살문의 명칭은 새겨진 꽃의 종류에 따라 빗국화꽃살문, 빗모란연꽃살문 등으로 불린다. 빗꽃살문이 한 떨기 탐스런 꽃송이 하나하나를 모아 놓은 것 같다면 솟을꽃살문은 넝쿨식물이 뻗어나간 육각형의 영역 사이에서 기화요초가 피어있는 듯하고 꽃잎의 크기도 빗꽃살문보다 훨씬 크다.

우리가 익히 아는 꽃살문은 문살이 만나는 교차점에 꽃을 조각하여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朝鮮古蹟圖譜(조선고적도보)’에 실린 20세기 초 사찰의 사진을 보면 문살에 판재를 통으로 붙여 문양을 투조하여 창을 장식한 꽃살문의 형태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어 아마도 꽃살문의 고식은 통으로 투조한 양식이 더 많이 애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향산 보현사의 대웅전 정면 문살은 한 쪽은 솟을빗꽃살문 양식으로 창살로 만들고 나머지 한 면은 통판투조 양식으로 문양을 새겨 넣었다. 통판투조 창살에는 연지에서 뻗어 자란 연꽃과 잎을 배경으로 하단에 두 명의 동자를 새겨 넣고 상단에는 하늘로 승천하는 한 마리의 용을 운문(雲紋)과 함께 조각하였다.

▲ 예천 용문사 윤장대 꽃살문 부분.

동자가 연꽃줄기를 쥐고 있는 문양은 고려 청자대접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연(蓮)과 연(緣)이 동음이라 ‘연생다자(緣生多子)’의 기원을 의미한다. 연못 바닥에서 자라난 연꽃줄기는 하늘 높이 피어올라 구름과 함께 승천하는 용의 배경이 되고 있다. 창살에 새긴 용은 부처님이 계신 법당이 장경(藏經)을 담고 있는 용궁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거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표현일 수 있다. 연꽃이 피어 있는 연지를 배경으로 동자와 물고기, 수금(水禽)이 묘사된 연지수금꽃살문은 경북 영주 성혈사 나한전의 어간에도 있고 황해도 박천의 심원사 보광전 문살에도 보인다. 불화의 배경으로 연지를 주로 사용하는 도상은 아미타여래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며 이때 연지는 불법을 믿고 따라 서방정토의 연지에서 태어난다는 연화화생의 의미를 담고 있어 아마도 문살에 표현된 연지도 그와 같은 기원을 담았을 것이다.

예천 용문사 윤장대의 문살 장식은 격자문양의 창살과 함께 연지수금꽃살문과 빗꽃살문을 모두 이용하였다. 연지를 새긴 문살은 보현사의 연지수금꽃살문과 같이 통판투조이다. 부처님의 법인 경전을 보관하였던 윤장대의 창호를 사찰의 큰 법당 문살과 같은 양식으로 한 까닭은  각양각색의 꽃으로 장엄된 문살이 속세와 불법의 세계를 구분하는 의미도 품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강화도 정수사 법당 꽃살문은 판재를 통으로 붙인 양식으로 현병(賢甁)에 꽂인 갖가지 꽃이 넝쿨을 이루며 상부로 뻗어나간 모습을 문살에 새겼다. 그 모습은 마치 부처로 향하는 신심의 표현으로 법당을 장식했던 화만(花鬘)이나 법석에 장식되었던 지화와 유사성을 보이며 화려한 모란과 장미가 꽂힌 꽃병을 그린 네 폭의 민화병풍을 보는 느낌도 있다. 동학사 대웅전 문살에 사군자와 세한삼우(歲寒三友)를 투각한 것과 같이 민화병풍에 사용되는 모티프를 차용하여 문살을 장식한 예도 드문 것은 아니다.

영산재에 사용되는 지화장엄에서 상중하단에 사용되는 꽃은 단상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작약과 모란은 상단에 올리는 꽃으로 아름다운 꽃술과 향기가 은은해 최상의 꽃으로 여긴다. 불교의식에서 작약과 모란을 잡고 법무를 추다 두 손을 모으면 세상의 꽃을 부처님께 헌화한다는 뜻이다. 중단에 올리는 국화는 기국연년(杞菊延年), 송국연년(松菊延年)이라는 축수의 문구를 부쳐 장수화를 의미하는 꽃으로 불단에 헌화되고 국화와 대칭을 이루는 타리화(陀利華) 역시 중단에 공양되는 꽃이다. 마지막으로 하단에 올리는 꽃은 연화이다. 윤회와 환생을 의미하는 연화는 영단의 장엄에 사용되는데 다른 꽃들과 달리 연지단을 함께 꾸며 못 속에 피어난 연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사찰의 창살에 곱게 피어난 꽃들은 부처님이 계신 곳을 장엄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부처에서부터 영가에게 이르기 까지 모두를 공양하는 헌화의 의미이기도 하다.

꽃살문을 통해 속계에서 바라보는 법계는 비밀의 화원과 같이 기화요초로 장엄된 세상이다. 하지만 법계에서 바라보는 속계는 장엄을 걷어낸 고요함이 문살에 비치는 것처럼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살문을 법당 안에서 바라보면 단정한 마름모 살 그림자만 비춘다. 법당의 문짝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의미를 담아 정성을 기울여 만든 선조들의 지혜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정진희 문화재청 감정위원 jini5448@hanmail.net

[1376호 / 2016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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