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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차돈과 흥륜사

기자명 주수완

신흥종교 불교에 대한 토착종교의 거센 공격 순교로서 막아

▲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한 비석. 백률사에 있었던 이 비석이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국통 혜륭 등이 이차돈을 위해 817년에 세웠다는 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차돈의 무덤을 수축하고 이 비석을 세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비석이 있었던 백률사 인근에 이차돈의 무덤이 있을지도 모른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고구려에서 온 아도 스님에 의해서였는데, 왕실로부터가 아닌 민중에서 시작한 포교여서 그랬는지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다 아도 스님이 법흥왕의 왕녀를 치료해준 사건을 계기로 법흥왕도 불교를 믿으려고 했지만 토착종교집단의 반발이 극심했다. 이로 인해 결국 이차돈이라는 인물의 순교가 있고 나서야 겨우 불교를 공인할 수 있었는데, 이 내용은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에 소개되어 있다.

아도 스님, 왕녀치료 계기로
법흥왕에게 사찰 건립 요구
토착종교 강렬한 반발 직면

토착종교 신성지 천경림에
흥륜사 불사가 시작되면서
토착종교와의 싸움 본격화

이차돈의 죽음 원인에 대해
“왕명 속이고 불사” 기록과
“공사지체” 상반 기록 남아

토착종교 공세 몰린 법흥왕
이차돈의 목숨 버린 순교로
불교공인의 반전 계기 마련

잘린 목서 뿜어져나온 흰 피
이차돈 결백 상징하는 징표
불교공인 금강석 같은 초석

종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한 사회에서 순교자가 나오는 것은 물론 종종 들어온 이야기이므로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읽어보면 순교의 정황에 조금 의문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로마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금지하는 종교를 민간에서 믿으려했기 때문에 박해와 순교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는 왕실에서는 믿으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반대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사실상 법흥왕은 이차돈을 지켜주고 싶었고, 나아가 그들은 한 편이었으며, 더욱이 친족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스스로 이차돈의 처형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국가에서의 처형에 대한 결정권자는 왕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차돈 처형의 명분이다. ‘삼국유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처형의 명분은 대체로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이차돈이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 건설을 지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왕이 흥륜사 창건을 명한 일이 없는데도 이차돈이 왕명이라고 속여 공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설이 분분한 것을 보면 여러 가지 버전의 설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여하간 결국 두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하나는 법흥왕 스스로가 이차돈에게 불만을 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 세력이 이차돈을 고발한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일이고 사실상 법흥왕은 이차돈에게 불만을 가질 일도 없었고 흥륜사 공사 역시 법흥왕이 일으킨 것이지 이차돈의 속임수가 아니었다. 단지 이차돈이 다짜고짜 법흥왕에게 자신을 죽이는 대신 불법이 퍼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둘이서 계획하고 일어난 처형이었다. 불교의 공인을 위해 사람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일까? 실제는 도대체 어떤 일이었기에 이차돈이 죽어야 했을까? 만약 이차돈의 죽음이 법흥왕과 계획한 일이었다면 왜 그가 죽어야 불교를 다른 사람들이 믿게 된다는 것이었을까? 공사를 지체한다고 해서 그 책임자인 이차돈을 죽이면 불교를 안 믿던 사람들이 믿게 되었을까? 공포심을 조장해서 억지로라도 불교를 믿게 만들려고 했다는 말일까? ‘삼국유사’는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애초부터 법흥왕과 이차돈이 서로 약조하고 벌인 일이 아니었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즉, 법흥왕이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또 평소 이차돈 스스로가 법흥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아왔기 때문에 이를 믿고 왕명을 조작하여 함부로 흥륜사 창건을 주도한 까닭에 법흥왕이 그를 제거했다고 보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제거된 인물이 왜 갑자기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게 만든 영웅으로 둔갑한 것일까? 또 예를 들어 인천공항이나 고속철도와 같은 대규모 공사를 일으키는데 최고결정권자도 모르게 이런 일을 주도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더구나 비밀리에 하는 공사도 아니고 신라의 신성한 숲 천경림에서 벌어지는 공사였는데도 말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왕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때문에 일단 흥륜사 공사는 이차돈이 왕명이라 속이고 단독으로 벌인 일로 보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남는다. 

아무래도 그보다는 공사 중간에 토착종교를 믿는 귀족·군신들의 반대가 점점 커져서 결국 이차돈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불만은 무엇이었을까? 그들 불만의 화살이 향한 곳은 결국 법흥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차돈이 죽었을까? 이쯤에서 상상력을 발휘해보도록 하자.

▲ 이차돈 순교의 배경이 된 흥륜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 혹은 영묘사지로 전해지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흥륜사지에서 수습되었다고 전하는 인면문 기와는 당시의 정황을 알고 있을까?

흥륜사 창건은 법흥왕의 왕녀를 치료해준 아도 스님이 대담하게도 그에 대한 보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그것도 신라 토착종교에서도 신성하게 여겨졌던 것으로 보이는 천경림에 세우게 해달라고 했으니, 토착종교집단의 입장은 그야말로 코앞의 쿠바에 미사일이 배치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아야했던 미국의 입장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아마도 강력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단 흥륜사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상호간에 ‘익스큐즈(excuse)’된, 즉 양해된 공사였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법흥왕이 여하간 겨우 이들을 설득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법흥왕에게는 왕녀를 치료해준 것에 대한 보답인데 이를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불만이면 진즉에 그대들이 왕녀를 치료했어야 하지 않는가 등등 나름 명분이 있었다. 그래서 공사의 시작 국면에서는 일단 양해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차돈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간 강력한 토착집단이 처음부터 흥륜사 공사를 막지 못했을 이유가 없다. 때문에 이차돈의 순교를 촉발한 토착집단의 불만은 불교사찰 건립 그 자체에 대한 것일 수 없다.  

불교 자체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면 그 다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공사 진행과정의 여러 문제를 들 수 있다. 이차돈이 공사를 지체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공사 진행 과정상의 어떤 문제점이 원인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아마도 이런 경우 문제는 틀림없이 돈 문제이지 않았을까? 거액의 공사대금을 빼돌렸다, 착복했다, 원래 예산보다 많은 예산이 들어가고 있다, 공사를 공정하게 입찰하지 않고 친족에게 맡겼다 등등의 문제는 지금도 국가적인 대규모 공사에 늘 따라붙는 잡음이다. 특히 그것이 최고통치자가 주도할 때는 단순한 비리가 아니라 국가 스캔들로 확대된다. 흥륜사 공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처음 익스큐즈된 예산규모, 그리고 천경림에서 할당된 흥륜사 부지면적은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불어났고 법흥왕의 반대파에서는 이러한 공사 확대가 곧 법흥왕의 뒷돈을 불리기 위한 수작이었다는 모함도 나왔을 것이다. 법흥왕의 의도는 순수했더라도 역사를 통해서 불교를 핑계로 탈세나 재산축적이 빈번히 일어났던 것을 보면 당시 귀족들은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려고 했던 것을 순수한 의도로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어쩌면 흥륜사 창건은 왕실의 사비로 이루어질 계획이었으나 공사가 예상보다 커지면서 불법적으로 국가예산을 흥륜사에 일부 전용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불교 반대파는 아마도 이런 핑계로 법흥왕에게 책임을 추궁했을 것이고, 급기야는 탄핵 국면까지 갔던 것이 아닐까? 특히 당시로서는 외래종교였고 신흥종교였던 불교에 국왕이 농단을 당했다고 했을 것이니 탄핵까지 못 갈 것도 없다. 결국 이 때 나선 것이 이차돈이었던 것이다. 이차돈은 이 모든 책임을 자신의 일로 꾸몄다. 한마디로 도마뱀 꼬리가 된 셈이다.

‘삼국유사’에서 이차돈이 법흥왕에게 “소신이 저녁에 죽더라도 다음날 아침에 불법이 행해져서 부처님이 다시 나투신다면 왕께서는 길이 평안하게 되실 것입니다”라고 한 말은 어쩌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물어 국법으로 다스린다면 왕은 위기를 모면하게 될 것이므로, 이후 흥륜사를 끝까지 완공시켜 불법을 일으켜달라는 부탁의 뜻으로 해석된다. 법흥왕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정치적 상황은 너무도 급박했다. 아마도 눈물을 머금고 왕실을 지키기 위해 죄를 이차돈이 뒤집어쓰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527년 아마도 8월 5일 아침, 이차돈은 참수되었다.

그런데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서는 이차돈을 참수하자 그의 목에서 흰 피가 뿜어져 나왔다고 했다. 어떻게 피가 흰 색일 수 있을까? 기이한 일이지만, 이 역시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혹 흰 피는 이차돈의 결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이차돈이 모든 모함을 뒤집어쓰고 죽었는데, 그의 사후에야 그 모든 것이 모함이고, 오해였고, 이차돈은 공금을 착복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어쩌면 일부 법흥왕의 공금전용이 있기는 했겠지만 그 작은 잘못보다는 이를 덮기 위해 목숨을 버린 이차돈의 충성이 오히려 부각되면서 법흥왕의 입장에서는 반전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탄핵을 주도했던 토착종교집단은 되레 역풍을 맞게 되었고 더 이상 흥륜사의 공사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모함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보복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법흥왕은 보복 대신 침묵을 요구했다. 흥륜사 공사에 대한 토착종교집단의 침묵이야말로 이차돈의 죽음과 맞바꾼 불교 공인의 금강석 같은 초석이었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77호 / 2017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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