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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삶 속에서 여유와 틈

기자명 최원형

더불어 살기 위해 도시에 필요한 여유와 틈

어느 여름 날 이른 저녁을 챙겨주신 어머니께서 울밑에 심어 놓은 봉숭아 꽃잎을 따오시는 날이 있었다. 꽃잎과 봉숭아 잎을 절구에 놓고 찧으면 예쁜 꽃이 칙칙한 갈색으로 변했다. 나는 꽃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 칙칙한 것에 백반을 섞어 만든 것을 조금씩 덜어 어머니께선 우리들 손톱 위에 올리고는 헝겊과 무명실로 싸매주셨다. 우리 사 남매 모두 열손가락을 그렇게 싸매고 나면 봉숭아 꽃잎은 아주 조금 남았다. 어머니는 그걸로 당신 새끼손가락에 하나씩 물을 들이곤 하셨다. 어머니의 정성은 다시 생각해도 참 지극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마다 칙칙한 갈색이 아닌 진한 주홍색 물이든 게 신기했다. 어머니는 그 꽃물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행운이 올 거라고 얘기해주셨고, 당시에는 무슨 행운을 바랐는지 기억에 없지만 봉숭아물을 소중히 여겼던 것 같다. 고운 봉숭아물은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문턱에 올 때 즈음 우리들 관심에서 사라졌다. 입동이 지나고 북풍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다시 그 봉숭아 꽃물을 떠올렸다. 손톱 끝에 봉숭아물은 반의반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 마저 다 사라지기 전에 첫눈이 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기다려도 첫눈이 내리지 않으면 손톱을 깎지 않은 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첫눈이 내렸다. 봉숭아 꽃물이 아직 남아있고 첫눈도 내렸지만 나에게 찾아온 행운은 무엇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럼에도 해마다 어느 여름날 저녁이면 봉숭아 꽃물 들이고 그 알 수 없는 행운을 기다리며 어느 새 어른이 되었다.

낭만의 아이콘 봉숭아 물과 첫 눈
도시의 눈은 질척이는 천덕꾸러기
염화칼슘 편리성 뒤에 숨은 독성
가로수 고사시켜 황폐 도시 만들어

여름 그 뜨겁던 태양을 품은 봉숭아꽃이 첫눈 내릴 그날까지 함께 겨울마중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첫눈은 언제나 낭만아이콘일 수 있다. 느닷없이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면 뾰족하던 마음마저 유순해지는 것 같으니 눈이란 것은 확실히 우리에게 각별한 그 무엇인 것 같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몇 차례 폭설을 맞이하던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눈이 한번 내리면 무릎이 푹푹 빠질 정도로 쌓이니 어린 우리들도 마당의 눈을 함께 치워야했다. 내 집 눈을 어느 정도 치우고 나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골목길로 쏟아져 나왔다. 폭설이 내리게 되면 다음날 통행이 불편하니 동네주민들이 모두 눈삽과 대야를 들고 나와 눈을 치웠다. 가로등이 밝지 않던 시절에도 눈 내린 밤은 환했다. 열심히 눈을 치운 건 어른들 몫이었고 어린 우리들은 모처럼 밤중에 동네 친구들과 만나 눈싸움을 하며 몸에서 김이 펄펄 나도록 놀았다. 한 번씩 어른들이 호통을 치면 우리들은 어른들이 한쪽에 밀쳐둔 눈을 대야에 퍼서 날랐다. 골목이며 길에서 퍼 나른 눈은 볕이 잘 드는 동네 공터에 언덕을 이루었다. 그 언덕은 다음날부터 동네 아이들의 미끄럼틀이 되었고 그 아래는 터널을 파 골목대장의 아지트가 되었다. 눈을 치워도 사람들이 다녀서 미끄럽게 된 길에는 연탄재를 뿌렸다. 그렇게 겨울을 났다.

도시에 살면서 눈은 어느새 천덕꾸러기가 됐다. 조금만 내려도 질척거리고 하얀 눈은 금세 도시의 회색빛이 되었다. 그것까진 견딜 수 있었다. 눈이 도로에 조금만 쌓여도 차들은 거북이  걸음을 한다. 그러자 언제부턴가 눈이 내리면 원활한 통행을 위해 염화칼슘을 뿌리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염화칼슘도 양면이 있다. 염화칼슘은 눈을 빨리 녹게 할 뿐만 아니라 눈이 녹아 생긴 물이 다시 얼지 않도록 하는 성질이 있다. 그 때문에 도시에서 눈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편리하게 해결해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떤 날은 밤사이 꽤 많은 양의 눈이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가 빗나가서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로에 하얀 가루가 뿌려진 걸 본 적이 있다. 미리 염화칼슘을 뿌려놓은 것이다. 문제는 염화칼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염화칼슘은 그 자체에 독성이 있어서 자동차와 도로를 부식시킨다. 뿐만 아니라 염화칼슘의 염도는 소금의 4배에 이른다. 공터가 없는 도시에서 눈을 쌓아둘 공간은 대개 가로수 아래다. 염도가 높은 염화칼슘이 뿌려진 눈이 녹아 뿌리로 스며들게 되면 가로수는 고사할 확률이 높아진다.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부족한 녹지를 대신해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가로수, 그도 생명이라는 걸 사람들은 자주 잊는 것 같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도시에 틈이 없다는 것이다. 눈을 쌓아둘 틈조차 없다. 눈이 쌓이면 마을사람들이 함께 나와 같이 치울 여유도 없다. 틈과 여유가 사라진 자리에 염화칼슘이 들어왔다. 봉숭아꽃물들이며 그토록 기다리던 첫눈이 반갑기 이전에 가로수의 고사를 염려해야하는 건 정말이지 낭만적이지 않다. 더불어 살기 위해 필요한 여유와 틈이 아쉽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377호 / 2017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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