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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랍비의 지혜로운 대답

공감은 나를 성장시키는 훌륭한 밑거름

▲ 그림=근호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에 두 명의  위대한 랍비(rabbi : 신의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가 있었다. 샴마이(Shammai)와 힐렐(Hillel)이 그들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학파를 창시했는데, 샴마이는 경전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편이었고, 힐렐은 보다 융통성있게 해석하는 편이었다.

공감능력, 자의식에 기초해 성립
동서양 망라한 ‘추기급인’의 윤리
불교공부, 계·정·혜 단계로 나가
‘계’는 본심에서 우러나 지켜야

어느 때 한 이교도 청년이 샴마이를 찾아와 말했다.

“랍비님은 토라(모세가 전한 히브리 성서 중 창세기 등 다섯 경전)에 정통하신 분이니 제가 한 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에 그것을 요약해서 한 마디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유태교로 개종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샴마이는 화를 내며 들고 있던 목공용 자를 휘둘러 그를 내쫓았다. 자는 척도(尺度)이고, 척도가 인간에게 적용되면 규범이 된다. 따라서 샴마이가 휘두른 자는 그가 준수해온 율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샴마이에게 실망한 청년은 힐렐을 찾아가 똑같이 말했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힐렐은 율법을 책에 적힌 그대로 딱딱하게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율법의 조목 자체보다는 조목이 생겨난 원리를 탐구해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게 궁금하군그래.” 하고 힐렐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자넨 참 욕심이 많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심오한 경전을 한 마디로 요약해달라고 하다니 말야.”
“그조차도 깁니다.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이 일에 긴 시간을 쓸 만큼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쪽 발로 서보게. 내가 토라를 한마디로 정리해줄 테니.”

청년이 그렇게 하자 힐렐이 말했다.

“자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게.”

힐렐은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느 때 친구 간인 두 사람이 힐렐을 화나게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내기를 걸었다. 그를 화나게 할 수 있는 쪽에 돈을 건 남자는 힐렐이 목욕을 하고 있을 때에 맞추어 그를 찾아갔다.

목욕탕 문을 두드려 힐렐을 불러낸 남자는 힐렐에게 인간의 머리는 왜 동그랗게 생겼느냐고 물었고, 힐렐은 성의껏 대답해주었다. 대답을 마친 힐렐이 목욕탕으로 되돌아가자마자 남자는 다시 목욕탕 문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힐렐에게 흑인의 피부는 왜 검은지를 물었다. 이번에도 힐렐은 처음과 다름없는 태도로 대답해주고나서 목욕탕으로 되돌아갔다. 남자는 또다시 문을 두드려 힐렐을 부른 다음 다른 문제를 물었다. 그렇게 다섯 번을 반복했지만 힐렐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힐렐을 화나게 할 수 없게 된 남자가 소리쳤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어야 좋았을 것이오! 나는 당신 때문에 돈을 잃게 되었단 말이오!”

남자로부터 그가 화가 난 까닭을 듣고나서 힐렐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인내심을 잃기보다는 당신이 돈을 잃는 편이 낫소.”

인간은 기본적으로는 동물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동물인 한편 동물 그 이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을 동물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의 고통과 행복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다.

물론 기본적인 공감 능력은 동물에게도 있다. 그렇지만 동물에 비해 인간의 공감 수준이 훨씬 높다. 이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은 자의식, 즉 자신이 자신임을 아는 것에 기초하여 성립된다.

불교 유식학(唯識學)은 대상의 인식을 상분(相分)·견분(見分)·증분(證分)·증자증분(證自證分) 등 네 단계로 분별한다. 상분은 대상을 마음으로 본 것을(유식학에서는 대상 또한 마음이다), 견분은 주체의 마음이 대상과 접촉하는 것을, 증분은 견분으로써 알게 된 내용을, 증자증분은 아는 것을 깨우쳐 다시 아는 내용을 의미한다.

이 네 단계 중 여타 동물에게도 앞 세 단계는 있다. 여타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네 번째 단계, 즉 증자증분이다. 아는 것을 안다는 것은 곧 내가 나인 줄을 안다는 것이며, 이 단계에 이르러 인간은 주체자로서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되고, 그를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위대한 문화가 전개된다.

내가 나인 줄 아는 능력은 미성숙한 아기에게는 없다. 아기는 생후 몇 개월 동안 자기와 대상 세계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점차 자신과 세계를 구별하기 시작한다. 그 구별이 두드러지는 만큼 아기는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존재, 즉 자유를 갖고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로 성장해간다.

물론 여타 동물에게도 자유가 있고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갖는 자유와 책임은 동물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차원에서 볼 때 동물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그들의 자유는 본능이 시키는대로 하는 피동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동물에게는 자유가 없으므로 책임 또한 없다. 펭귄은 집단을 위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만 그것은 그가 이성적으로 책임감을 느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감정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인간은 증자증분에 근거하는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로서 입장을 바꿔 생각할 줄 안다. 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이성적 인식은 여타 동물에게는 없는 것이며, 윤리는 이 인식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추기급인(推己及人), 즉 나의 경험을 통해 얻은 인식을 타자에게까지 확장하여 적용하는 능력은 인간을 여타 동물과 변별시켜 주는 윤리의 기초인 것이다.

이 윤리적 기초는 공자에 의해서도 설파되었고, 예수에 의해서도 강조되었으며, 부처님에 의해서도 선포되었다. ‘법구경’은 “매 맞는 것과 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이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남을 때리고 죽이겠는가”라고 설한다. 불교에서 이 정신은 불살생(不殺生)과 함께 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婬)·불망어(不妄語) 등의 계학(戒學)으로 권장된다.

다만, 불교의 공부는 계학을 성숙시켜 정학(定學)·혜학(慧學)으로 나아가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철학보다 체계적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정학은 계학을 돕고, 나 자신을 덜어내고 비워내는 지혜는 정학을 돕는다. 바꿔 말하면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고요하고, 고요한 마음은 윤리적일 수밖에 없다고 불교는 설파한다.

계를 잘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몸으로만 지키는 계는 상계(相戒: 겉모양으로서의 계학)에 불과하다. 계는 상계로부터 시작되어 성계(性戒: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계학), 즉 억지로 지키는 계가 아니라 본심으로부터 우러나와 자연스레 지키는 계로 성숙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여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귀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그 숙고로부터 얻게 되는 타자의 고통과 행복에 대한 공감은 나를 성장시키는 훌륭한 밑거름인 것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77호 / 2017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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