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절벽에 내몰린 스님에게 빛이 된 산골이야기

  • 불서
  • 입력 2017.01.23 16:08
  • 수정 2017.02.07 10:47
  • 댓글 0

‘지율 스님의 산막일지’ / 지율 스님 지음 / 사계절

▲ ‘지율 스님의 산막일지’
“시님, 나는 염불소리 듣기 싫은께 나 죽거든 당최 염불하지 마소.”
“중 보고 염불하지 말라니 할매가 나보다 더 오래 살아야겠는디.”
“그런 법이 있는가. 가는 것도 순서를 다 타놓았는디.”

스님과 시골 할매가 나누는 선문답 같은 이야기에서 정겨움이 물씬 묻어난다. 그저 안부나 묻고 지나칠 사이에 나누는 무미건조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서로가 상대 삶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정감이 담겼다. 이 할매는 때때로 딸 같은 스님의 방문 앞에 쌀이며 고춧가루·나물 주머니를 슬그머니 놓고 갔고, 스님이 없을 때면 아무도 모르게 탁자 위에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 올려놓고 가기도 했다.

천성산을 살리기 위해 긴 시간 단식했던 지율 스님 이야기다. 스님은 2006년 단식을 중단하고 경북 영덕 칠보산 기슭 한 마을로 들어갔다. 겨우 열 가구가 수십 년째 같은 모습으로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다. 한동안 마을을 오가는 외부인에 불과했던 스님은 이 할매처럼 문 앞에 조심스레 음식을 놓고 가고, 낡은 집을 손봐주고, 어설픈 텃밭 농사를 거들어주는 마을 노인들의 무심한 듯 다정한 보살핌에 조금씩 마을 사람이 되어갔다.

스님이 본 마을 노인들은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손발을 쉬는 날이 없었다. 절벽에 매달린 심정으로 생의 끝까지 갔던 스님은 그 틈에서 삶의 빛을 볼 수 있었고, 다시금 힘을 내 자기 삶을 심고 가꿀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너무나 쉽게 살아진 내 삶을 돌아보겠다고 여유롭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일이 나를 돌보고 있다. 쉴 틈 없이 돋아나는 봄풀처럼 산막의 일은 끝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땅에 사랑하는 사람의 옷을 뜨개질하는 여유와 정성 같은 것을 들이고 있다.”

지율 스님은 그렇게 오지 산골마을에서 바람소리, 빗소리, 할배의 장자 패는 소리, 댓잎이 울어대는 소리, 할매의 노랫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긴 겨울 끝에 다시 봄이 오고, 또 다시 낫과 호미를 드는 소농들의 삶, 돌고 도는 자연의 순리가 곧 깨달음이자 경전이었기에 가능했다.

스님은 그렇게 새 삶을 얻은 그곳의 일상, 즉 닷새에 한 번 버스가 들어오는 그 산골 오지 마을의 이야기이자 소농들의 농사일지를 계절별로 엮어 ‘지율 스님의 산막일지’에 담았다.

▲ 지율 스님은 단식을 끝내고 찾은 산촌에서 새 삶을 얻었다. 그곳 사람들의 1년 365일 삶을 엮은 책은 소박하지만 마음 따뜻한 고향소식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책에는 칠순, 팔순을 넘긴 노인들이 자기가 태어나서, 혹은 시집와서 줄곧 살아온 그 집에서 예전 방식 그대로 농사를 지으며 한 해를 보내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동제를 지내고, 길일을 택해 장을 담그고, 분뇨를 모아 거름을 만들고, 소를 몰아 밭을 가는 식의 전통적인 농경은 이제 이 땅에 얼마 남지 않은 귀한 풍경이 된지 오래다. 때문에 스님은 그 일상의 소중함을 전하기 위해 사소한 일화 하나까지 꼼꼼히 수집하듯 기록으로 남겼다.

이 세상이 빠르고 편리하고 화려한 것에 주목하는 동안 누구하나 그들의 삶에 주목하지 않았지만, 풀 한 포기와 도롱뇽 한 마리의 삶까지 귀하게 여겨온 스님은 평생을 심고 가꾸고 낳고 기르고 거두고 나누며 살아 온 오지 마을 할배와 할매들의 벗이 되어 그 일상을 함께했다. 그래서 책은 마을 노인들의 일대기이자, 처음으로 기록된 그 마을의 역사가 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전에 이어 최근 우리 곁에 왔던 부처 성철 스님의 삶과 사상을 오롯이 옮긴 ‘성철 평전’을 펴낸 언론인 김택근이 “지율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 산촌의 일부가 되었다. 지율은 산촌의 어르신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지난날을 보여드리고 싶다. 당신들이 살았던 마을이 극락이고, 그 세월이 천국의 시간이었음을 알려드리고 싶다”며 일독을 권하는 것도 그 속에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살이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삶이 있기 때문이다.

‘지율 스님의 산막일지’는 그렇게 산비탈에 엎드려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이들의 소박한 마음을 전하며,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게도 고향 소식처럼 다가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1만5800원.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377호 / 2017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