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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 물건도 없는데, 부처는 어디 있는가?-중

본성없다 말하면 본성없음이 본성되는 말의 역설

▲ ‘청정법신’ 고윤숙 화가

여래장 사상에 대해선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일본의 불교학자 마츠모토 시로(松本史朗)는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자극적인 명제로 유명한데, 이는 그의 저서 ‘연기와 공’에 붙인 부제이기도 하다. 주장의 요체는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열반경’의 명제나 그것을 기반으로 나온 여래장이란 개념은 개개의 중생들 안에 불변의 실체인 아트만이 있다는 인도의 전통 브라만교의 주장이며, 모든 실체를 부정하는 불교와 상충된다는 것이다(‘연기와 공’, 운주사, 1998). 이런 관점에서 그는 ‘능가경’의 여래장 사상에 기반한 선불교 역시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불교는 자아라는 본성도, 모든 현상 속에 있는 어떤 불변의 본성도 부정한다. ‘공’이란 어떤 불변의 자성(自性)이 없음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청정한 자성, 불생불멸의 자성이 항상 있다는 주장, 나아가 그것이 여래가 될 씨앗이라고 하는 주장은 불교의 이런 입장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도 흔히 듣는 ‘참나(眞我)’도 그렇다. ‘참나’란 개념은 글자 그대로 ‘아트만’을 뜻하는 단어 아닌가! 그는 임제의 ‘무위진인’ 또한 이런 아트만의 일종이라고 비판한다.

‘여래장’은 ‘아트만’이라는 비판
방편을 모르는 문법 환상의 결과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
없는 비 실재한다는 착각에 빠져

그렇다면 가령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공’은 어떠한가? 이런 의미에서 ‘일체개공’을 말하는 것 역시 브라만 같은 어떤 실체를 말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또한 불교가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공 개념이 등장하는 반야부 경전이 모두 불교가 아닌 게 된다. 그래서인지 대승불교는 ‘비불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공이란 말은 역설적이다. “모든 것이 어떤 본성도 갖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는 순간 ‘본성 없음’을 본성으로 한다는 주장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수는 ‘회쟁론’에서 ‘일체개공’을 주장하는 것이냐는 말에 “나는 아무런 주장도 갖고 있지 않다”고 물러선다(‘회쟁론’, 김성철 역, 경서원, 144).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분별간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주장도 그렇다. 조주(趙州)가 반복해서 질문을 받았듯이, 그거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이미 하나의 분별간택이 되기 때문이다(‘벽암록’ 중, 장경각, 204). 이는 어떤 주장을 하는 순간, 아니 어떤 말을 사용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사태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이미 어떤 확고한 명제나 실체가 있는 듯한 인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니체나 비트겐슈타인은 ‘문법의 환상’이라고 명명한다. 문법 때문에 야기되는 환상이란 뜻이다. 가령 ‘비가 온다’는 말은 주어인 ‘비’에 ‘온다’, ‘안 온다’라는 동사를 자유롭게 붙이는 문법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오고 안 오고에 상관없이 ‘비’가 실체처럼 따로 있는 듯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오는 비야 그렇다 쳐도, 오지 않는 비는 어디 있는 것일까? 구름 속에? 그럴 리 없다. 오지 않는 비는 따로 어디 있는 게 아니다. 오는 비도 마찬가지다.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현상을 보고 ‘비가 온다’고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주어 자리에 ‘비’라고 쓰고 동사를 온다, 안 온다, 올 것 같다 등으로 바꿔 쓰게 되면서, 온다, 안 온다와 무관한 ‘비’가 저기 따로 있는 것 같은 환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비’든 무엇이든 주어의 자리에 들어갈 모든 것에 대해 문법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불교 용어로 말하면 ‘명언종자(名言種子)’의 일종이다.

‘여래장’도 ‘불성’도, ‘법신’도 심지어 모든 실체를 부정하는 ‘공’도 이런 환상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진정한 실상은 미묘하여 말할 수 없다고 했을 터이다. 말하는 순간 오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불법이란 경전이나 말로 전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고, 부처와 조사의 말도 말에 매이는 순간 어느새 사구(死句)가 된다며 경계했다. 백장(百丈)이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를 물었던 것도, 향엄(香嚴)이 입을 열 수 없게 나뭇가지를 물려놓고는 “조사께서 서쪽에선 오신 뜻이 뭡니까?”란 질문에 답하라고 요구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그래도 말하지 않고선 불법을 전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석가모니가 망설이다 세간으로 내려오는 것이 그렇듯이, 깨우친 분들의 자비심은 심지어 상대방의 근기나 상태에 맞추어 적절한 말을 구사하여 가르침을 펴고자 한다. 하여 불교에서 사용되는 모든 개념들은, 어떤 조건에서 무엇을 하고자 말했던 것일까를 보지 않으면 오해하기 딱 좋다. 트집을 잡으려 맘먹으면 어떤 개념도 자가당착에 빠지는 걸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깨달음을 얻은 이들의 말도 철저하게 그 연기적 조건에 따라 이해해야 함을 뜻한다 하겠다.

여래장의 개념도 그렇다. ‘능가경’은 여래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혜(大慧)여, 때에 따라 공이라거나 무상이라거나…법성이라거나 법신이라거나 열반이라거나 자성을 여읜다거나 불생불멸이라거나 본래적정하다거나 자성열반이라거나 같은 말로 여래장을 말했느니라.”(‘능가역 역해’, 이상규 역해, 해조음, 122) 이는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실상’을 표현하는 개념들이다. 그런데 이를 굳이 ‘여래장’이라는 말로 바꿔 쓴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건 아마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대승불교의 중요한 교의를 설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일체중생이 여래가 될 능력을 갖고 있음을 말하려는 문제의식이 공이나 법성, 열반 같은 말로 표현하던 걸 중생 각자에게 감추어진 잠재적 능력이란 뜻을 담아 ‘여래장’이라고 했을 것이다. 일체 중생이 이미 부처라는 ‘본각(本覺)’사상을 표현하려는 것이었을 게다. 불변상주하고 자성청정하다는 말을 여래장을 서술하는 문장에서 물고 늘어지는 한, 여래장이 아트만 같은 실체임을 증명하는 건 내가 보아도 어렵지 않다.

그런 이가 이미 있었음인지, ‘능가경’에서는 그 말을 방편으로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여래는 어리석은 범부의 무아(無我)에 대한 두려움을 끊기 위하여 망상을 여읜 무소유의 경계인 여래장을 말한 것이니라…법에 본래 실체가 없어 모든 망상의 모습을 여의는 것이지만, 갖가지 지혜와 선교한 방편으로 때론 여래장을 말하고 때론 무아를 말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은 까닭에 여래장을 말함은 외도가 말하는 ‘나(아트만)’와 같지 않나니…나에 집착한 모든 외도를 열어 이끌고자 여래장을 말하여, 부실한 나(我)라는 소견에 대한 망상을 떠나 세 가지 해탈의 경계에 들어 빨리 아뉴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를 바라게 하려는 것이니라.” 여기에 덧붙인다. “이와 같지 않다면 곧 외도와 같을 것이다.”(‘능가경 역해’, 122~123) 그 개념을 방편으로 사용하는 이유를 잊는다면, 아트만 개념으로 오인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인 셈이다.

‘능가경’에서 아뢰야식 개념을 끌어들여 청정한 여래장이 물들고 오염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본래는 자성청정이라고 했던 것은 이처럼 “중생즉부처”라는 명제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 망상의 티끌들을 털어내고 닦아내어 자신에게 내장된 여래장이 작동하게 하는 것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가르치려는 것이었을 게다. 이는 여래장 개념과 결부된 또 하나의 논점으로 이어진다. ‘본체’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하는 것이 모든 중생의 경우에는 항상 오염되어 있기 마련이란 말이 되기 때문이다(마츠모토 시로가 ‘아트만’이라고 비판했던 여래장이 실은 번뇌와 객진에 물들어 있는 마음을 뜻한다 함은 뜻밖의 반전이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이란 바로 이 먼지와 티끌을 매일 열심히 닦아내는 것이 된다. 흔히 이를 ‘돈오(頓悟)’와 대비하여 ‘점수(漸修)’라고 한다는 것은 모두 아시는 바 일 터이다. ‘돈오’를 강조하는 혜능 이후의 선사들이 여래장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처럼 객진에 물들지 않는 ‘청정법신’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가어록(四家語錄)’에 기록된 마조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번뇌 속에 있으면 ‘여래장’이라 하고 거기서 벗어나 있으면 ‘청정법신’이라 이름한다.”(‘마조록·백장록’, 장경각, 29)

이진경서울과학기술대 교수solaris0@daum.net

[1378호 / 2016년 2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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