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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평등한 삶의 가치-상

“생명을 존중하면 법계 중생이 나 아닌 것이 없습니다”

▲ 평등공동체를 구현해 온 불광산의 공승법회. 불광산 불자들이 세계 각국의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세상 모두가 평등의 참뜻을 안다면 서로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니 이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이 강하고 약함으로 나뉘어야 하고 크고 작음으로 나뉘어야 하며 못살고 잘사는 것으로 나뉘어야 한다면 평등하게 서로를 대할 수 없으니 어찌 평화롭게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세간 만물이 균형을 이룰 수 있고 남을 침범하지 않으며 서로 존중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평등의 참뜻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할까요? 바로 평등입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 크고 작음이 있지만 국가이기에 국가적인 존엄이 있는 것입니다. 큰 나라의 대통령이 작은 나라를 방문하면 작은 나라의 귀한 손님이고 작은 나라의 대통령이 큰 나라를 방문하면 큰 나라의 귀한 손님이 됩니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 간에 서로 존중하는 것이 바로 평등입니다.

세계 여러 인종 가운데는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등이 있는데 조상, 혈연, 겉모습, 역사, 문화, 풍속, 언어의 다름으로 인해 다른 종족이 있게 됩니다. 종족 간에 서로 존중하고 포용해야 하는 것이고 인격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나셨고 종족계급이 엄격하던 당시 ‘사성(四姓) 평등’과 ‘대지의 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라는 평등 선언을 용감하게 주장하셨는데 오늘날에 보더라도 그 얼마나 위대한 행동입니까? 그래서 부처님의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의 모든 일체중생과 사생구유(四生 : 삼계육도 유정중생이 태어나는 네 가지 방식으로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九有 : 구거(九居)라고도 하며 삼계 유정중생이 사는 아홉 곳) 모두가 다 평등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평등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서로 존중하여야 하고 서로 평등하여 모든 차별이 다 통일되고 모든 복잡함이 다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인연법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우리가 함부로 분별심과 선입견을 갖기 때문에 불평등한 현상이 수 없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현재 오늘날 사회적으로 강하고 약한 불평등, 크고 작은 불평등, 빈부의 불평등, 이치의 불평등, 남녀의 불평등, 잘나고 못난 불평등이 존재하는데 불교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중생에게는 ‘아견(我見), 인견(人見), 중생견(衆生見)’이 있어서 피차 간에 분별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분별을 하고 평등하지 않기에 소리가 나고 충돌이 생겨서 대립하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수많은 불평등 원인은 일체 모두가 멋대로 분별해서 발생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한 몸뚱이와 같이 함께 살아나가는 공동체로 중생과 부처는 결코 둘이 아닙니다.

세간은 평등하여 각각의 쓰임새가 있기 마련입니다. 불교경전에 이러한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얼굴에 있는 눈, 귀, 코, 입이 각자 불평을 늘어놓다가 서로 따져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눈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에서 가장 쓸모가 있는 것은 눈이에요. 눈으로 봐야 세상만물을 알 수 있고 보아야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눈은 영혼의 창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중요한 눈이 전혀 쓸모없는 눈썹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으니 저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눈이 말하고 나자 코가 나서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나는 코로서 숨도 쉬어야 합니다. 만약 숨을 쉴 수 없으면 모두들 살 수 없어요. 이렇게 쓸모 있는 코 역시도 위쪽에 자리하지 못하고 떡하니 쓸모없는 눈썹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저도 불만입니다. 이에 항의합니다.”

코의 말이 끝난 후 입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 불평을 했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쓸모가 많은 것이 바로 ‘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을 해야 당신들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고 내가 밥을 먹어야 당신들이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쓸모가 많은 입도 얼굴 아래쪽에 있는데 쓸데없는 눈썹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저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다들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면서 눈썹에게 항의를 하니 눈썹도 어쩌지 못하고 “여러분 싸우지 마세요. 여러분보다 못났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아래쪽으로 자리를 옮기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눈의 아래쪽으로 옮겨왔는데 눈이 가만히 보니 영 잘못된 듯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눈썹이 다시 코의 아래쪽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도통 사람의 얼굴 같지 않기에 눈썹은 다시 입 아래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모양이 되었습니다.

눈과 코, 입은 이에 대해 서로 토론을 하였습니다.

“아까 우리들이 전혀 쓸모없는 눈썹이 우리 위쪽에 있다고 생각돼 아래쪽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했지만 막상 눈썹이 우리들 아래쪽으로 오니 우리들이 전혀 사람 같지가 않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모두 이리저리 상의를 하였지만 결국은 쓸모없이 보이는 눈썹을 그대로 위에 있도록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리 쓸모가 없어 보이더라도 존재 그 자체가 쓸모 있는 것이라서 위쪽에 자리하고 있어야 사람의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위 세간에서 말하는 평등에는 각각 그 쓰임새가 있기 마련입니다. 세간 만물이 균형을 이루면서 남을 침범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는 것이 바로 평등의 참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같음 속에 다름이 존재하고 다름에 굳이 같음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평등에 대해서 잘못 인식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가 쥐를 먹으려고 하자 쥐가 “같은 생명인데 너는 왜 나를 먹는 거야?”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고양이가 “그럼 네가 나를 먹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쥐가 “내가 어떻게 너를 먹을 수 있느냐?”고 말하자, 고양이는 “너는 나를 못 먹으니까 내가 너를 먹는 거야. 이러니까 공평하지.”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평등 아래서 쥐는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닭과 오리, 돼지, 개, 소, 양을 먹으면서 “이러한 동물들이 태어난 것은 우리 사람에게 먹히려고 태어난 것이야”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깊은 산속에 사는 사자, 늑대, 호랑이, 표범이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시내에 나타나 “사람은 우리들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거야”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이런 것이 평등의 이치일까요?

당신은 부자라서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으며 고급 옷을 입으면서 살고 나는 가난해서 세끼 밥을 해결하기에 바쁘면서 옷도 추위를 가릴 정도로 입고 살고 있다면 겉보기에는 잘살고 못살고 불평등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격적인 존엄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돈이 있어서 비행기를 일등석으로 타고 있는데 가난한 내가 만약 추첨에 당첨되어 일등석을 타게 되었다면 내가 가난하니 당신과 같이 일등석을 타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한 당신이 부자라서 많은 돈으로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샀는데 가난한 나한테 만약 돈이 생긴다면 똑같이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살 수 있는 것처럼 당신과 나의 빈부 차이로 인해 자동차의 가격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세상 모두가 평등의 참뜻을 안다면 서로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니 이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이 강하고 약함으로 나뉘어야 하고 크고 작음으로 나뉘어야 하며 못살고 잘사는 것으로 나뉘어야 한다면 평등하게 서로를 대할 수 없으니 어찌 평화롭게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빈승은 출가하기 이전부터 평등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안 모든 사람이 하루 세끼를 먹었지만 집에서 기르던 개는 하루에 한 끼만 먹이던 것에 대해 저는 고양이와 개들을 대신해 불만을 가졌습니다. 모기나 벌레가 괴롭히면 사람들은 얼른 손바닥으로 내려쳐서 죽였지만 저는 모기가 조금의 피를 빨았다고 해서 그 목숨을 죽이기에는 너무 불공평한 처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옛말에 ‘하늘은 모든 생명을 아끼는 덕목을 갖고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명을 존중함은 바로 법계중생 모두가 다 같은 소중한 존재라는 뜻으로, 평등의 뜻에 부합된다고 하겠습니다.

넓은 의미의 생명은 우주의 모든 존재가 한 몸이고 공생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서양 텔레비전의 동물 채널에서 한 다큐 기록물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죽은 어미 호랑이를 대신해 남겨진 다섯 마리의 새끼 호랑이들을 개가 돌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린 새끼 호랑이 한 마리는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익사하였지만 나머지 새끼 호랑이 네 마리가 오랫동안 개에 의해서 길러졌습니다. 동물에게도 이러한 정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은 어떠할까요?

옛 성현이 “누가 뭇 생명의 목숨이 미천하다하였는가? 똑같이 골격을 갖추고 살과 피부를 가졌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함은 이 모든 생명에 너와 나 그리고, ‘그’라고 하는 제삼자가 모두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이 바로 평등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78호 / 2016년 2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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