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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끔씩은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치며

기자명 조정육

‘혼밥’에 지친 당신, 우린 언제나 곁에 있었다

▲ 이진이, ‘Age-2476’, 193.9x112.1cm, oil on canvas, 2013,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 여러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대화는 없다. 그 쓸쓸하고 허허로운 풍경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가끔씩은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풀어보는 것은 어떨까. 대화하는 기술이 서툴러 때론 목소리가 높아질 수도 있겠지만 아예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세계에만 들어가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흔한 풍경인데도 유난히 그 장면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 이유가 그곳이 외국이었기 때문이다. 홍콩 센트럴역 부근의 맥도날드 매장은 무심코 잊고 지내던 나의 일상을 되돌아본 계기가 되었다. 지친 탓도 있었다. 쉼터를 발견하자마자 오전 내내 시내 관광을 하면서 쌓인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홍콩은 인도가 매우 좁다.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도 폭이 좁아 중심가에 있는 길이라도 한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다.

아무 계획 없이 떠난 홍콩 여행
패스트푸드점 쓸쓸한 광경 목도
‘혼밥’에 휴대폰만 보는 사람들
평소 의식 못했던 우리네 모습
혼밥과 혼술 모습 측은해 보여

길은 좁고 사람은 많다 보니 거리는 마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움직이는 것 같다. 게다가 인도 옆에는 트램(tram)이라 불리는 노면전차가 왕복으로 속도를 내며 씽씽 달린다. 인도에는 사람이 가득, 차도에는 차가 가득한 도시가 홍콩이다. 생전 처음 가본 도시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매사에 긴장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더구나 나는 영어회화가 힘든 사람이니 남편 손이라도 놓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한국의 세 배 정도는 빠르게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도 무서웠다. 외국에 나와서 이렇게 피곤한 경우는 난생 처음.

어찌나 신경을 썼던지 나중에는 뒷목이 뻣뻣할 정도였다. 이곳은 내가 기대했던 홍콩이 아니었다.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지난달에 홍콩에 다녀왔다. 나로서는 아무 계획 없는 여행이었다. 논문 자료를 구하러 가는데 함께 가자는 남편의 꼬드김에 넘어가 무작정 따라 나선 여행이었다. 홍콩은 숙박비가 비싸니 친구 있을 때 가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이 나름 설득력 있어 보였다. 여행 좋아하고 부화뇌동 잘하는 나의 성격을 간파한 말이었다. 영화에서 본 배우들의 얼굴도 나의 이성을 마비시킨 한 원인이었다. 홍콩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주윤발, 유덕화, 양조위 등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궁금해졌다.

드디어 영화같이 화려하고 근사한 나라에 가는구나. 들뜸과 설렘으로 찾아 간 도시였다. 이름도 얼마나 멋있고 운치 있는가. 비린내가 아니라 향기(香) 나는 항구(港)라니.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배반한다고 했던가. 이 도시의 어느 구석에 그런 멋진 배우들이 살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홍콩은 낡고 비좁고 멋지지 않았다. 비린내는 아니지만 향기 또한 맡을 수 없는 작고 복잡한 동네였다. 좁은 땅에 사람은 많다 보니 가능한 공간에는 모두 건물을 세웠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여유 공간이 없었다. 닭장집이 이해되었다. 주택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침대 옆 좁은 공간도 세를 놓는다고 했다. 당연히 나무나 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동네에서 새벽부터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도서관과 서점을 찾아다녔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심하게 배가 고팠다. 유명한 국수집을 겨우겨우 찾아 들어갔지만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질려서 그냥 나왔다. 그때 눈에 들어온 간판이 맥도날드였다. 익숙한 간판을 보자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반가웠다. 매장은 지하 1층에 있었다. 제법 널찍한 매장에는 질서 있게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남편이 주문을 하는 사이 나는 빈자리를 찾으러 갔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는 사이로 딱 한 자리가 비었다. 나는 빈자리에 앉아 남편이 앉을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 차 있는 것에 비해 매장은 너무나 조용했다. 사람들은 전혀 대화를 하지 않고 한결같이 고개 숙이고 앉아 심각하게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기업체에서 이 장소를 빌려 회의를 하는 걸까. 홍콩에서는 회의도 사무실이 아니라 패스트푸드점에서 하는구나. 사무실이 좁아 전 직원이 함께 모일 공간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흠칫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공통분모가 전혀 발견되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행동만 똑같을 뿐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개별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혼밥을 하고 있었다. 매장의 의자가 붙어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합석을 했지만 옆 사람이나 앞사람과 대화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혼자 와서 혼자 햄버거를 먹으며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혼밥을 하는 동안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것은 여러모로 편리해보였다. 휴대폰에 꼭 중요한 정보가 있어서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었다. 옆이나 앞이나 생판 초면인 사람들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아도 좋으니 들여다볼 뿐이었다. 나는 비로소 사람들로 가득한 넓은 매장이 의외로 조용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혼밥과 혼술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다만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을 뿐이다. 우리 모두 저 사람들처럼 살고 있구나. 먼 홍콩 땅에 와서 새삼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았다.

혼밥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뜻이 ‘혼이 담긴 밥’인 줄 알았다. 어느 유명한 쉐프가 몇 대째 이어온 비법으로 상차림을 하여, 먹는 사람의 영혼에 잊지 못할 추억을 각인시키는 밥인 줄 알았다. 혼밥이 ‘혼이 담긴 밥’이 아니라 ‘혼자 먹는 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혼술 때문이었다. 혼술을 ‘혼이 담긴 술’로 해석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 확인해본 결과 매우 쓸쓸하고 허전한 단어였다. 현대인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어. 그 단어가 혼밥과 혼술이었다. 함께 있다 하여 덜 쓸쓸하고 혼자 있어 더 쓸쓸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게는 혼밥과 혼술하는 모습은 측은하게 보인다.

‘법구경’에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고 적혀 있다. 또한 ‘잡아함경’에는 ‘좋은 벗이 있다는 것은 수행의 전부를 완성한 것과 같다’는 가르침도 적혀 있다. 혼밥과 혼술도 좋지만 가끔씩 마음에 맞는 사람과 만나 함께 밥을 먹는 것은 더욱 좋을 것이다. 네 곁에 내가 있으니까 힘들더라도 용기 잃지 말라는 대화를 따뜻한 국물에 녹이면서 말이다.

“우리 언제 밥이라도 함께 먹을까?”라는 말처럼 따뜻한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함께 밥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라고 한다. 오늘도 식구와 함께 하는 푸근한 날이 되시기를.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78호 / 2017년 2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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