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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천왕사와 문두루비법

기자명 주수완

풍랑 일으켜 당나라 군대 침공 물리친 신라 비밀병기

▲ 문두루비법을 실행하기 위해서였을까? 여느 사지와는 다른 특색이 가득한 사천왕사터 전경.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일으킨 소위 나·당전쟁은 670년 신라가 지원하는 고구려 부흥군이 합세한 연합군이 압록강 너머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당시 신라는 문무왕(재위 661~681)의 통치기였는데,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의 기록은 그의 당나라에 대한 전쟁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670년의 사건은 특기할만한 하다.

문두루 비법은 불교 주문
‘불설관정경’에 내용 담겨

50만 당나라 군사의 침입
명랑, 문두루비법 써 격퇴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이
삼국사기엔 발견되지 않아

해전에서 기후는 매우 중요
문두루비법은 정밀한 예측

주문 외울 때 사용 단석 터
사천왕사 금당 좌우에 남아

사천왕사는 시·공 연구하는
연구소 성격의 사찰 추정

당시 당나라에는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이 외교사절로 가있었는데, 당나라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자 볼모로 억류된 상태가 되었다. 마침 당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의상대사는 억류된 상태의 김인문을 만나 당나라의 대규모 신라 침공 계획을 전해 듣고 서둘러 귀국하여 이를 보고하였다. 이에 왕은 당나라 대군을 어떻게 막아낼지 대신들과 의논하였는데, 각간 김천존이란 인물이 “근래 명랑법사께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 왔다고 하니 그를 불러 물어 보십시오”라며 다소 황당한 책략을 제안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명랑법사가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비법은 ‘문두루비법’이라고 하는 일종의 불교적 주술이었는데, 왜 이를 불교와 연관된 곳이 아닌 용궁에서 배워왔다고 했는지는 다소 의문이 들 수 있다. 여하간 문무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명랑법사를 불러 대책을 물었는데, 명랑은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주문을 외울 단을 만들어주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드디어 당나라 장수 설방이 군사 50만으로 서해를 건너니, 명랑법사가 계획대로 바로 그 문두루비법을 사용하여 큰 바람과 거센 물결을 일으켜 당나라 수군의 배를 모두 침몰시켜버렸다. 당나라는 다음해인 671년에 5만 수군을 다시 파견하였으나 이번에도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은 이들을 막아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당의 670년 공격 기록은 보이지 않고 오직 671년, 설인귀가 수군을 이끌고 백제로 와서 신라에 대항하는 웅진도독부, 즉 당이 백제에 세운 식민정부를 지원하려다가 신라의 공격을 받고 조운선 70여척이 패퇴한 기록이 보인다. 때문에 670년 문두루 비법으로 당의 수군을 물리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불교에 의지해 외세를 물리친 기사는 ‘삼국사기’에서 황당한 이야기라고 배제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670년이나 671년이라는 정확한 연대는 아니더라도, 설인귀의 수군과 신라가 접전한 것은 여러 차례이므로 그 중에 몇 번 문두루비법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 사천왕사의 단석터. 12개의 초석이 있고, 구멍이 뚫려 있다. 십이지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문두루비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해전에서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물과 연관된 어떤 힘을 이용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문두루비법의 전거가 되는 ‘불설관정경’에서는 그것이 반드시 풍랑을 다스리는 법이라고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간 명랑법사는 풍랑을 일으키는데 사용했다. 아마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얻어왔다는 표현도 그것이 물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설화일텐데, 용은 곧 물의 신이기 때문이다.

문두루비법은 정말로 풍랑을 일으켰을까? 물론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삼국유사’의 기사가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풍랑은 일단 날씨와 연관된 사안이다. 지금도 일기예보에서는 풍랑주의보와 같은 바다의 기상에 대한 예보를 해주고는 한다. 특히나 수군은 바다의 날씨에 긴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명랑법사는 아마도 풍랑을 일으키는 마법사가 아닌, 풍랑을 예보할 수 있는 과학자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비법을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설화는 어쩌면 바다의 변화무쌍한 일기를 잘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었던 어떤 경험자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은 사실을 미화한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삼국지연의’에서도 적벽대전의 결정적 승패요인이 동남풍이었고, 제갈량이 기어코 이 동남풍을 불게 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해전에 있어 날씨는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 사천왕사의 목탑지 심초석. 사천왕사는 현재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 배치형 사찰인데, 이 역시 문두루 비법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명랑법사가 날씨를 예보하여 언제 어디서 큰 풍랑이 불지 예측했다고 하더라도 당나라 수군이 그 날 그 길로 바다를 건너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따라서 명랑이 알려준 그 시간, 그 장소로 당나라 수군이 바다를 건너도록 유인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관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전쟁에서의 주도권이란 얼마만큼 자신이 유리한 시간과 장소에서 전투가 일어나도록 유도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래서일까,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무왕이 당에 보낸 편지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신은 원래 당을 때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백제를 때리려고 했는데 당이 백제를 감싸는 바람에 실수로 때린 것이다, 어찌 감히 당을 때릴 생각을 했겠는가 하는 구구절절 저자세의 내용이다. 전면전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겠지만, 황급한 순간에 조금이라도 당의 공격을 지체시켜보려는 지연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나라 역시 어리석어서라기보다는 오랜 싸움에 지쳐 아마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무왕을 폐위시키고 억류된 그의 동생 김인문을 왕으로 삼아 쳐들어오다가도 문무왕의 사죄편지와 조공에 금세 군사를 돌리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신라는 그들이 원했던 시간, 장소에서 과감한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실제는 ‘삼국유사’와 달리 풍랑에 의해 당나라 수군이 아예 당도하지도 못하고 궤멸된 것은 아닌 듯하다. 670년 침공 때는 풍랑으로 인해 당나라 수군이 바다를 건너다 실패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아예 기록이 안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명랑법사의 일기예보는 적벽대전, 인천상륙작전에서 바람의 방향이나 조수 간만의 시간이 중요했던 것처럼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 당시에는 과학이 아니라 마술에 가까운 예언이었을 것이다.

명랑법사는 사천왕사에서 문두루 비법을 행할 때 유가종의 승려 12명을 불러 함께 했다고 한다. ‘불설관정경’에 의하면 지름 77푼의 둥근 나무 기둥에 오방신의 이름을 새겨놓고 주문을 외우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사천왕사에는 둥근 구멍이 뚫린 12개의 초석으로 이루어진 방형 건물지가 금당 좌우로 남아 있다. 마침 그 뚫린 구멍의 지름이 20㎝를 웃도는 크기들이라 만약 문두루비법에 필요한 원형 기둥을 여기에 꽂는다면 적당하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주문을 외울 때 사용한 단석의 터로 추정되고 있다.

▲ 망덕사지 당간지주에서 바라본 낭산. 당 사신 악붕귀가 바라본 덕요산 아래 절이 혹시 저 낭산 아래에 자리한 사천왕사가 아니었을까?

과연 여기에 남아있는 12개씩의 기둥과 12명의 유가승은 무엇을 의미할까? 동양에서 12는 12지를 의미하고, 12지는 전통적으로 방위나 시간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사천왕사의 두 단석 유구는 각각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와 방향을 상징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그것이 아직 해시계와 같은 정밀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상징적이나마 시·공을 의미하는 시설을 둔 연구소 성격의 사찰이 바로 사천왕사였다고 짐작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나·당 전쟁이 평화조약으로 끝맺음할 즈음, 당은 마지막 협상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이 바로 사천왕사에 대한 사찰이었다. 당은 사천왕사가 나당전쟁 기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마치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핵사찰을 받아야 평화회담이 열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에 당은 예부시랑 악붕귀란 인물을 파견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이 비밀병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때문에 당의 사찰단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사천왕사와 가까운 곳, 그리고 사천왕사처럼 쌍탑이 세워진 절을 급조하여 그쪽으로 사찰단을 안내하기로 했다.

무척이나 대담무쌍한 계획이었지만 아무리 급조한다고 한들, 절이 새로 만들어지면 곳곳에 대패질한 나무조각이나 톱밥이 남아있을 것이고 급히 칠하다보니 안료의 아교 냄새도 남아있었을 것이다. 절에 도착한 악붕귀 일행은 그 절이 가짜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는 심지어 문 앞에서 들어가기조차 거부했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부시사천왕사(不是四天王寺) 내망덕요산지사(乃望德遙山之寺)” 이에 대한 해석이 조금 다른데, 어떤 책은 “이는 사천왕사가 아니라면서 이내 덕요산의 절을 바라보았다”로 해석했고, 어떤 책은 “이는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의 절이요”라고 풀었다. ‘덕요산’을 바라보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 절이 ‘망덕요산’이라는 뜻일까? 둘 다 모호하다. 일단 ‘덕요산’이란 산도 주변에 없고, ‘망덕요산’의 뜻도 불분명하다. 후에 이 급조한 절을 ‘망덕사’로 불렀다는 내용으로 보아 후자의 해석에 무게가 더 실리기도 한다. 그러나 왜 당 사신이 망덕요산의 절이라 했는지, ‘망덕’이나 ‘요산’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해석이 없다.

때문에 오히려 전자의 해석에 관심이 간다. 사신이 절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산아래에 보이는 절을 보면서 저곳이 진짜가 아닐까 의심했다는 것으로 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 덕요산은 분명 진짜 사천왕사가 있는 낭산이었을 것이다. 낭산을 왜 덕요산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를 지금은 사라진 낭산의 또다른 이름으로 본다면 문장구조상 어색할 것이 없다. 현재의 망덕사 뒤쪽으로 바라보이는 산이 낭산이고 그 아래 사천왕사가 있으므로, 결국 ‘덕요산만 바라보다 갔다’는 뜻으로 망덕사라 한 것이 아니었을까? 덕요산의 ‘덕’은 혹시 낭산에 장사지낸 선덕여왕과 관련된 명칭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 문장은 신라 최고의 비밀병기인 사천왕사가 뿜어내는 아우라를 당나라 사신도 느낄 정도였다는 것을 강조하여 그 위용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행간의 뜻이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사천왕사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평화협정은 체결되었고, 신라가 다시금 문두루비법을 꺼내 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신라에게나 당에게나 다행한 일이었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79호 / 2017년 2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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