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불법이 강남에 이르다-아육왕 탑상
3. 불법이 강남에 이르다-아육왕 탑상
  • 오중철
  • 승인 2017.02.1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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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육왕 계승은 불법홍포와 대륙통일 과업 상징

▲ 막고굴 98굴 나한이 해를 가릴 때 팔만사천탑이 나타나는 장면.

이상적인 지도자란 어떤 모습일까? 불교에서는 정법(正法)에 의지해 세상을 평정하는 전륜성왕의 개념으로 이 질문에 화답하고 있다.

아육왕, 중국에 불교 전래 이후
이상적인 통치자 모델로 인식
양무제 시기에 아육왕상 성행
황실 주도로 진신사리 공양도


역사상 실존했던 아육왕(Aśoka)은 이런 전륜성왕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아육왕은 기원전 3세기에 인도 대륙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살육의 전쟁을 벌였지만, 불교에 귀의한 후 홍법에 힘쓰고 덕의 정치를 펼쳤다. 불교 전파 이후 중국에서도 아육왕은 하나의 이상적 통치자의 모델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존숭은 탑과 상을 통해서 구현되었다.

막고굴 98굴 통도 천정부의 불교감통화 중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보인다. 하나의 거대한 손이 태양을 가리고 있다. 손으로 가려 생긴 어둠 속에서 무수한 탑들이 나타난다. 이 장면은 아육왕의 홍법활동을 대표하는 팔만사천탑 건립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석가모니 열반 후 부처님의 사리는 여덟 개의 탑에 흩어져 모셔졌다. 아육왕은 그 중 일곱 개의 탑을 열어 진신사리를 수습한 후, 이를 다시 팔만사천 개의 탑 속에 봉안하고 세계 각지에 배포하였다. 여러 불전에서는 한 아라한이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사이, 아육왕이 천신들을 부려 순식간에 팔만사천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실제로 인도 각지에서는 아육왕이 세운 석주와 탑이 발견되었고, 그의 홍법을 계기로 불교 전파의 권역이 국제적으로 확대되었으니,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팔만사천탑 이야기는 전설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돈황석굴의 여러 굴에서 반복적으로 그려진 이 장면은 당시 아육왕의 전기를 신앙했던 중국인들의 인식을 그대로 전해준다. 즉, 아육왕의 신력으로 세워진 팔만사천탑이 중국에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고승전’은 4세기 혜달이라는 승려가 죽음으로부터 깨어나 계시를 받고 단양(현 남경) 장간사와 회계(현 영파) 아육왕사의 아육왕탑을 참배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인도 전승에 의탁한 아육왕탑의 존재가 실질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6세기 남조의 양무제 때 일이다. 양무제는 이 두 곳에서 다시 소형의 아육왕탑과 진신사리를 ‘발굴’하였으며, 탑과 사찰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이것은 수나라 이전에 중국에서 아육왕탑을 모신 것으로 확인되는 유일한 사례이므로, 이를 통해 두 사찰이 불교의 성지로 부상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양무제는 아육왕의 관련 경전을 번역하고, 즉위 후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황실 주도하에 진신사리 공양의식을 집전하는 등 적극적으로 아육왕을 추종하여 “황제보살”로 불리던 인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에서 행해졌던 아육왕탑에 대한 존숭이 아육왕상, 즉 아육왕이 만들었다는 불상의 출현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막고굴 323굴에는 6세기에 아육왕상으로서 가장 존숭 받았던 불상을 소개하고 있다. 주실 남벽의 상단에는 여러 장면을 통해 하나의 사건이 묘사되었다. 한 불상이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을 한 채 빛을 발하며 서있고, 그 옆의 배 위에서는 속인과 승려가 함께 상에 대해 예배를 올리고 있다. 상의 우측에는 연화대좌와 광배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로 그려져 있는데, 역시 각자 빛을 발하고 있으며, 이를 둘러싸고 예배하는 이들이 보인다. 이 상과 대좌와 광배는 본래 한 몸일 터인데, 어째서 이같이 따로 그려놓은 것일까?

▲ 막고굴 323굴 동진 양도에서 발견된 금불상이 빛을 발하는 장면.

이것은 장간사에 모셔진 서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를 위한 ‘고승전’의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고리라는 관리가 강가의 포구에서 광배나 대좌도 없는 금불상을 한 구 발굴하였는데, 범어로 아육왕의 넷째 딸이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었다. 고리가 불상을 수레에 태워 가져가는데, 소가 문득 중간에 멈춰 서서 아무리 잡아끌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소가 움직이는 대로 놔두었더니, 스스로 장간사로 들어갔기에, 불상을 장간사에 모시게 되었다 한다. 훗날 다섯 명의 서역승이 찾아와 말하길, 이 불상은 본래 인도의 아육왕상으로, 업성에서 전란을 겪어 강가에 숨겨 놓았던 것이 어찌된 일인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후 몇 년을 사이에 두고 대좌와 광배가 연이어 발견되어 동진 함양 원년(371)에 불상과 완전한 짝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4세기는 위촉오 삼국을 통일했던 진나라가 5호16국의 전란 속에서 남쪽으로 후퇴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불상이 물길을 따라 스스로 이동하여 진의 옛 수도였던 업에서 당시 동진의 수도 양도로 왔다는 것은 불법의 중심이 진의 남하를 따라 이동하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본래 하나여야 할 상, 대좌, 광배가 제각기 흩어졌다가 양도에 이르러 다시 모이게 되었다는 내용은 종교적 상징을 넘어 정치적 통합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상이 왜 6세기에 편찬된 ‘고승전’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인지, 또한 왜 경전에도 전거가 없는 아육왕상이라는 이름을 빌리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추정이 가능하다. 아육왕을 계승하는 것은 불법의 홍포뿐만 아니라 분열된 대륙 통일의 역사적 과업을 완수해야 함을 상의 이동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상의 이동’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구현되었다. 양무제의 활동시기와 맞물려 아육왕상의 전승(傳承)이나 조성(造成)의 풍조는 남조에서 대단히 성행하였다. ‘고승전’은 장간사 불상 외에도 세 건의 불상을 아육왕상으로 소개한다. 또한 사천성 성도에서는 고고학적으로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아육왕상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는 상의 모사를 통해 아육왕 신앙이 널리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복제될 수 없는) 진신사리를 모신 탑 중심의 신앙이 갖게 되는 지역적 한계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제2의 아육왕이 되고자 했던 양무제의 의지는 아육왕의 탑상을 통해 시각적으로는 잘 드러났지만, 끝내 현실적인 결실은 보지 못하였다. 양무제는 북방의 동위와의 패권 다툼에서 패했고, 정치적 지도자로서 현실과 이상 사이의 조율에도 실패하였다. 만년 양무제의 몰락은 종교적 이상이 담긴 아육왕의 외형적 불사에 집착한 나머지, 국민들의 평화와 안녕을 확보하는 ‘현실적 불국토의 실현’이라는 전륜성왕의 본질적 책무를 망각하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육왕의 탑상을 통하여 불법(佛法)의 도래를 선언하고 통합을 이루려던 염원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구현되었다. 신라의 진흥왕이 “아육왕도 완성하지 못했다는” 장륙상을 완성하여 황룡사에 봉헌하였고,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지게 된 것이다. 

오중철 중국 사천대학 박사과정 ory88@qq.com

[1379호 / 2017년 2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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