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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도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하

정법으로 전 세계 통치하는 이상적 불교 제왕상 성립

▲ 전륜성왕에 대한 내용인 ‘아육왕전’은 해인사 고려대장경에도 포함돼 있다. 사진은 고려대장경 ‘아육왕전’ 권1 인출본. 고려대장경연구소 제공

지금까지 살펴온 바와 같이 석존의 상가가 추구한 이상은 화합이었다. 그리고 불교교단의 성립에 앞서 이미 상가로 불리어졌던 공화국과 상인조합의 이상도 화합이었다. 석존은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집단으로서 일찍이 공화국과 상인조합을 주목하였고, 그것을 모델로 하여 자신의 교단을 조직하고 운영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평등한 관계 속에서 민주적인 운영을 통하여 완전한 화합을 이룬 이상적인 공동체를 구현함으로써 역으로 세속사회에서의 공동체생활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였다.

석존 높이 평가했던 공화국
선진 왕국들의 위협에 몰락

왕국이 공화국을 병합하고
왕국은 더 강한 왕국에 병합

4개의 강대한 국가 출현 후
결국 마가다국이 인도 통일

찬다라굽타의 마우리아 왕조
인도 역사상 최초 통일국가

세계 제왕 아쇼카왕의 출현
불교 통해 보편적 이념 전파

아쇼카왕과 불교 융합되면서
불교식 전륜성왕 이념 완성

전륜성왕의 신화적 제왕관
불교와 더불어 세계로 확산
고대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

그런데 세속사회의 현실, 특히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석존이 희망했던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석존이 높이 평가하였던 공화국들이 신진 왕국들의 위협을 받아 먼저 쇠퇴하고 몰락하여 갔다. 그리고 강력한 왕국 중심으로 통합이 추진되면서 세계제국으로의 발전이 모색되고 있었다. 공화국 가운데 어떤 국가는 4세기경까지 존속한 것도 있지만, 역사의 흐름은 왕국이 공화국을 병합하고 또한 그 왕국은 더욱 강한 왕국에 의하여 병합되는 결과를 낳았다. 석존의 조국인 카필라국은 석존의 말년 경에 벌써 강력한 왕국의 하나였던 코살라국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리고 석존이 가장 훌륭한 공화국으로 칭송하였던 밧지연맹도 석존이 열반한지 오래지 않아 역시 강력한 신흥 왕국인 마가다국에 병합되었다.

석존은 생전에 자신의 친족들을 대부분 불교교단에 출가시켰는데, 샤카족의 멸망을 예견하고 출가를 통하여 구제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석존은 사촌동생인 아난다, 아누룻다, 데바닷타, 이복동생인 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라후라 및 샤카족의 이발사인 우팔리 등을 출가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석존의 이모이자 양어머니인 프라자파티의 출가를 받아들인데 이어 석존 자신의 아내였던 야소다라를 비롯하여 샤카족의 많은 여성들을 함께 출가시킴으로써 비구니 교단이 발족되었다. 샤카족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게 되자 당시인들은 석존이 샤카족을 멸망시킨다고 우려하였다고 한다.

석존시대 직전(B.C. 6세기)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데칸고원 북부부터 서북인도에 미치는 지역의 수많은 군소 국가 가운데 처음에는 바라나시에 도읍을 둔 카시국이 가장 유력하였지만, 그 후 이 왕국 북쪽의 코살라국, 동쪽의 마가다국, 서쪽의 밤사국, 서남쪽의 아반티국 등 4개 왕국이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여 ‘4대 강국’으로 불리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가졌던 라자그리하(王舍城)를 도읍으로 한 마가다국이 가장 강성하였다. 이 나라의 빈비사라왕은 석존과 같은 연배로서 교류한 사실이 여러모로 불전에 전해지고 있다. 그의 아들인 아자타샤트루는 부왕을 유폐하여 죽게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능하여 카시국을 병합한 코살라국과 밧지연맹을 정복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우다윈왕은 수도를 갠지스강 건너편의 파탈리푸트라(華氏城)로 옮겨 통일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수륙교통의 요지였던 이 도시는 동인도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번영하였다. 이 왕조는 몇 대 뒤에 시슈나가왕조로 교체되었는데, 이때 앞서 서쪽의 밤사국을 병합한 아반티국을 정벌하여 서인도에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이 왕조도 50년을 넘기지 못하고 난다왕조로 교체되었는데, 마가다국은 마침내 인도 대륙의 동해안과 서해안을 관통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난다왕조를 건설한 우그라세나왕은 낮은 계층의 출신으로서 브라만의 절대적 우월성과 계층적 분단을 요구하는 브라만교보다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윤리를 설하는 불교나 자이나교 같은 신흥종교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정신적 지주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 왕조는 2대 30년간으로 단명하였지만, 구질서의 파괴자로서의 역할은 대단히 커서, 역시 구질서를 파괴하고 급진적인 중앙집권화정책을 추진하다가 단명으로 끝난 중국의 진(秦)에 비교될만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다. 이 진제국의 토대 위에서 한(漢)제국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난다왕조의 토대 위에서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인 마우리아왕조가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난다왕조는 B.C. 321년 같은 마가다국 출신의 찬드라굽타에 의해 멸망되었는데, 그는 알렉산더대왕의 인도 침공과 퇴각 과정에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의 틈을 이용하여 서북 인도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빈두사라왕을 거쳐 3대 아쇼카왕대(B.C. 268~231)에 이르러 인도 남부지역 일부를 제외한 인도대륙 전체를 통합함으로써 마침내 세계제국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석존의 입멸부터 아쇼카왕의 즉위까지의 기간은 스리랑카의 불교도 전승에 의하면 218년, 북방 불교도의 전승에 의하면 100년, 또는 116년으로 추산되는데, 역사적으로 볼 때 부족연합 형태의 공화제 국가로부터 전제적 왕국을 거쳐 세계제국으로의 발전을 이룩하고, 그에 상응하여 초부족적인 정신을 모색하면서도 여기에서 일보 나아가 도시국가를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제왕(世界帝王)의 관념을 출현케 한 과도적인 시기였다.

아쇼카왕은 B.C. 261년 참혹한 격전 끝에 카링가를 정복했는데, 이를 참회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무력에 의한 정복을 중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가 사회관계 속에서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보편적 윤리인 정법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데 진력하였다. 그가 새로 정복한 지역과 불교유적을 순례하면서 남긴 마애법칙(磨崖法勅)과 석주법칙(石柱法勅)에 의하면 인간과 동물 등 생물에 대한 자비심, 부모·은사·어른에 대한 순종, 종교인에 대한 보시와 존경, 친구와의 바른 관계, 극빈자와 하인에 대한 바른 대우, 그리고 국민 개개인의 자기 규제 윤리로서의 자비·유화·자제·보은·분수에 맞는 생활·신앙과 다르마에 대한 존중 등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장려하였으며, 또한 도로, 관개 등의 공공사업을 전개하는 등의 많은 치적을 남겼다.

현실적으로 마우리아제국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없었던 당시 인도의 정세에서 문화전통과 생활습속 등 생활양식이 각기 다른 광대한 영토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아쇼카왕이 취한 정책은 매우 현명한 것이었으며, 그 이면에는 불교의 영향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쇼카왕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었고, 또 불교의 해외보급에 기여했으나 그의 정치이념과 사회윤리는 불교만에 의거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른 종교들도 함께 존중되었다. 그의 통치이념인 정법은 어느 특정 종교의 틀을 넘어선 보편적 이념인 것이며, 만인에게 보편타당한 절대적인 진실과 인간의 도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관철하여 일체의 인간생활의 기준을 이루는 것이다. 크게는 국가의 정치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것을 떠날 수 없는 것으로써 곧 그 시대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보편적인 이법(理法)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아쇼카왕의 다르마는 세계제국의 중앙집권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다중적인 사회구조에 의하여 요구된 온정주의(溫情主義)였다.

아쇼카왕의 다르마는 불교에서 말하는 다르마와 다르지만, 그는 다르마의 개념을 빌어 나라를 다스리고 정복군주의 이상을 실현하여 불교의 중흥에도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그 당시 세력이 쇠약해져 가던 불교가 아쇼카왕의 행적 및 이념을 모방하여 불교식 전륜성왕의 사상적인 체제로 윤색하고 그를 전륜성왕으로 추앙하게끔 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또한 아쇼카왕을 철륜성왕(鐵輪聖王)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전설도 만들어졌다. 따라서 역사적 인물인 아쇼카왕을 전륜성왕의 하나로 인식하던 불교의 세계제왕의 관념은 통일제국으로의 지향이며, 강대국을 중심으로 통일 사업을 진척시킬 때 각 지역의 상이한 전통과 관습 등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윤리와 법에 의한 새로운 통치원리를 모색하는 사상적 기반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고대인도의 국왕관(國王觀)으로서는 원시사회계약설적인 입장과 신수설(神授說)적인 입장을 찾아볼 수 있는데, 브라만 전통의 입장에서는 후자를 지지한데 반하여 석존 당시의 불교는 공화제를 옹호함과 함께 전자를 지지하였다. 브라만교의 궁극적 실재를 기반으로 하는 위계적 세계관이나 사회질서를 부정하고, 수평적 세계관이나 사회질서의 근거인 연기설을 주장한 석존의 세계관에서는 당연히 귀결될 수밖에 없는 국왕관이다. 그러나 석존이 입멸한 이후 부족연합의 공화국이 몰락하고 전제적인 왕국을 거쳐 세계제국으로의 발전방향이 모색되는 사회변화의 과정에서 두 국왕관은 융합되어 신화적인 세계제왕, 곧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ra-jan) 관념이 출현하게 되었다. 불교 경전에 나타난 이 전륜성왕은 4종의 덕(長壽 無憂 顔貌 寶藏)과 7종의 보물(輪 象 馬 珠 女 居士 主兵臣 : 7종 보물 가운데 바퀴는 특히 제왕의 막강한 힘을 상징하는 전차의 바퀴, 곧 전차(戰車)를 의미하며, 그밖에 상병(象兵과) 기병(騎兵), 대상(大商)과 군사령관을 상징하는 보물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의미한다.)을 갖추었으며, 무력(武力)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법(政法, dharma)으로 전세계를 통치한다고 하는 이상적인 제왕으로 관념되었다.

그런데 이 전륜성왕의 관념은 B.C. 4세기 이후 마우리아 왕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와도 융합되어 불교의 국왕관 자체를 변화시키면서 그 전륜성왕의 치세를 돕기 위하여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여 교화한다고 하는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되었다. 특히 마우리아왕조의 3대 아쇼카왕(As´oka, 阿育王, 無憂王)은 B.C. 268년 즉위하여 인도 역사상 최초 최대의 통일국가를 완성함으로써 전륜성왕의 관념, 곧 세계제국의 이념은 실현되었다. 신화적인 전륜성왕은 위대성에 따라 4종류(金輪聖王 銀輪聖王 銅輪聖王 鐵輪聖王)로 분류되었는데, ‘인왕반야경’에는 4종류의 전륜왕을 십신·십주·십행·십회향의 보살의 계위에 역순으로 배대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제왕인 전륜왕에 대하여 작은 나라의 왕이나 한 지방의 통치자는 속산국왕(粟散國王, Prades´a-ra-jan)이라고 하여 구분하였다. 또한 초기불교의 세계관인 수미산세계설에 의하면 아쇼카왕은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네 방위의 세계 가운데 남쪽 세계인 남염부주(南閻浮堤, Jambudvipa) 1주를 통치한다고 하는 철륜성왕으로 비정되었다. 전륜성왕이라고 하는 신화적 제왕의 설화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 세계에도 전해져서 고대국가의 발전과 국왕의 권위 강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380호 / 2017년 2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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