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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

최장집 교수의 책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정치적으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6번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5년 단임제 한계로 인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기존의 정책은 중단되고, 정부부처 조직과 명칭도 바뀌고 3만개가 넘는 공직의 장도 바뀌는 등 5년짜리 공화국으로 전락했다. 급기야 2016년 10월부터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시민들의 촛불저항,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정치적 외환위기로 접어들었다.

경제적 어려움의 경우, IMF 외환위기가 1997년 말 시작된 이후 20여년간 경제 불황의 장기화가 지속되고 있다. 현재 한국 경제가 처한 구조적 문제로 빈부격차 심화, 인구 고령화, 가계 부채 증가, 부족한 노후 준비, 기업 경쟁력 둔화 등이 꼽힌다.

사실 이 난제는 하루아침에 우리 앞에 던져진 게 아니다.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던 1997년 말 외환위기는 대기업에 집중된 경제 정책과 더불어 불투명한 회계, 높은 부채비율, 열악한 기업지배구조 등이 주원인이었다. 외환위기 때는 기업 부채가 도화선이었지만, 지금은 가계부채가 문제다. 그렇게 힘들게 위기를 극복하고, 약 20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금 한국의 상황은 그 당시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30여년간 지속된 5년 단임제의 적폐로 인한 정치위기, 20여년간 지속된 경제위기 이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리 없는 아우성은 이미 사회위기로 이어졌다. 자살, 저출산, 비정규직, 빈부격차, 남녀임금 격차, 노인 빈곤율, 산업재해 사망, 자녀 살인, 부모 살인 등 지표들은 OECD 최악의 수준이다. 사회위기의 진전은 사회규범의 붕괴, 가족 해체의 신호로서 아이를 버리는 현상, 가정 폭력, 가정주부의 윤락 행위, 이혼율의 급등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헬조선’ ‘구포 세대’ ‘청년실신’이란 말이 바로 우리 사회의 위기 상황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헬조선은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란 뜻이다. ‘삼포’(연애, 결혼, 출산)를 넘어 ‘오포’(인간관계, 내 집), 여기에 ‘칠포’(꿈, 희망), 또 ‘구포’(외모, 건강) 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실업과 신용불량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를 가리키는 ‘청년실신’이란 신조어도 등장했다.

신용정보원의 빅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인 25세 청년들은 심한 ‘부채 보릿고개’를 겪고 있다. 전체 37%가 빚이 있으며 1인당 평균 부채액이 1926만원에 이른다. 요즘 청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자신이 태어난 조국에까지 화살을 돌려 ‘헬조선’이라 조롱하는 것이다.
인간관계, 희망, 건강처럼 우리 삶에서 기본적인 것까지 포기한다는 것은 삶 자체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닌가?

취업포털 ‘사람인’이 2011년 2030세대 1837명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2.5%가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고, 스트레스가 심각한 사람이 63.3%로 밝혀졌다. 이 자료는 이미 6년 전 조사 결과다. 그러니까 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가 된 지 10년이 넘었고, 자살대국 일본보다 자살률이 50% 정도 더 높은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헬조선, ‘지옥같은 대한민국’에서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청년, 삶을 포기하기 위해 자살로 뛰어드는 게 아닌가!

사회위기는 경제위기보다 훨씬 심각하다. 일단 사회위기가 닥치면 회복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사회병리 현상은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게 문제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체질, 시스템, 그리고 가치관을 바꾸는 일이다. 지난 30여년간 누적된 불합리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제도를 손보고 잘못된 인식을 바꿔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오진탁 한림대 철학과 교수 jtoh@hallym.ac.kr
 

[1381호 / 2017년 3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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