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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선배 발자취에서 이정표 찾기

기자명 조정육

현재 고통 속에 진리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 남경민, ‘초대받은 N-김홍도 화방을 거닐다’, 200×450㎝, oil on linen, 2014 : 인생을 걸어가다 보면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선배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자기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김홍도도 신윤복도, 사마천도 굴원도 우리 모두의 선배다. 부처와 예수, 공자 등 성인의 행적도 우리 인생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어. 이상하다. 목이 왜 이렇지. 새벽에 눈을 뜨는데 고개 들기가 힘들다. 죽창으로 찌르면 이렇게 아플까. 연자맷돌을 목에 걸면 이렇게 무거울까.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날카로운 통증이 뒷목을 치받는다. 새벽이라 병원에 가려면 서너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데 목을 돌릴 수도 숙일 수도 없다. 항상 내가 쓰는 몸이라 내가 주인인 줄 알았는데 결코 내 것이 아니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닦아주고 재워줬는데 이렇게 가차 없이 배신을 하다니. 당혹감도 들었다. 불안해진 남편은 응급실에 가자고 했다. 우선 통증에서라도 벗어나고 싶었지만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니고 당장 목이 부러질 정도로 위급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 동네병원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목 움직이지 못할 정도 통증
그대로 받아들여 평정 되찾아

병고로써 양약 삼고자 한다면
절박한 상황서도 깨달음 얻어

역경 극복 역시 역사속에 있어
그들 삶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목을 쓸 수 없게 되자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저 눈동자만 굴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 ‘보왕삼매론’의 한 구절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맞다. 내가 그동안 나이를 무시하고 너무 함부로 살았다. 이십대도 아닌데 이십대처럼 몸을 부려먹으려고 했으니 고장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저지른 일이어서인지 억울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치료받으면 목을 움직일 수 있을까. 계속 이렇게 목을 쓰지 못하면 어떻게 살지? 나이 들면 젊었을 때 하지 못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보람차게 살 예정이었는데 자칫하면 내가 봉사를 받게 생겼네.

이런 걱정에 빠져 한동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뇌종양도 이겨낸 사람인데 이까짓 게 뭐 대수라고 풀이 죽어 있어. 나이 들면 한두 군데 고장 나는 것은 당연한 거지. 그동안 수행하면서 쌓은 에너지는 다 어디로 간 거야. 좋든 싫든 외부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겠다던 자신감은 전부 거짓말이었어? 한 사람의 역량은 위기상황에서 증명되는 법이 아닌가. 평소 자신이 한 말이 아무리 현란하고 윤기가 흘러도 결정적인 순간에 실천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아픔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울 수도 있는데 그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지금 거부하겠다는 건가? 기왕 이렇게 됐으니 병고로써 양약을 삼아봐야겠다. 지금 내가 아프다고 느끼는 ‘이것’은 무엇인가. 통증을 화두로 삼았다. 통증을 객관화시키고 나를 바라보자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통증은 그대로이되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뀐 것이다. 순식간에 바뀐 것은 아니고 서너 시간에 걸쳐 조금 변화된 정도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남편은 눕지도 못하고 돌부처처럼 앉아 있는 내가 측은했던지 괜히 주변을 서성거리며 내 눈치를 살핀다. 그런 남편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이건 업장이 소멸되는 과정이야. 머리 수술 다음에 턱 관절이 고장 났고 턱 관절 다음에 목이 아프잖아. 이 통증이 머리에서 하체로 점점 내려가 발바닥으로 빠져나가고 나면 업장이 완전히 소멸될 거야. 이번 생에 열심히 수행해서 하자 있는 부분을 전부 수리하고 나면 다음 생에는 쌩쌩한 몸으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눈동자만 굴릴 수 있는 주제에 큰소리 뻥뻥 치는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다. 지금 웃음이 나와? 그런 눈빛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근거 없는 논리였지만 어쨌든 현재 상황에서 나는 비관적인 쪽과 낙관적인 쪽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했다. 결국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무한긍정 쪽을 선택했다. 징징거려봤자 호전되지도 않을 텐데 어차피 선택할 거라면 긍정적인 쪽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야 정신건강에도 좋을 테니까.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그의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궁형(남성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이유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는 역적을 두둔한 죄로 한(漢)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집필 중이던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사형 대신 궁형을 선택한다. 당시 궁형은 사형보다 더 치욕스런 형벌이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에게 치욕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사기’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기로 선택했다.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해준 근거가 역사 속 인물이었다. 그는 존귀한 신분으로 역경을 당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들 또한 죽음보다 더한 수모를 당했지만 자결 대신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문왕(文王), 이사(李斯), 한신(韓信), 팽월(彭越), 장오(張敖), 강후(絳侯), 위기후(魏其侯), 계포(季布) 등등을 언급하며 ‘아무리 신분이 높고 존귀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찾아오는 역경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열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왕후장상의 몸으로 이웃 나라에까지 명성이 알려졌지만 죄를 짓고 판결이 내려졌을 때 자결이라는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천 또한 그들과 똑같은 역경을 만났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사기’는 그런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렇게 역사 속 인물에서 자신의 행위 근거를 찾아 그 삶의 방식을 내 삶에 적용시켜보는 것. 그것을 목적의식이라 해도 좋고 소명의식이라고 해도 좋다. 우리 모두 그런 목적과 임무를 받고 태어났다. 설령 내가 ‘사기’ 같은 역작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영혼이 고양될 수 있다면 이 또한 사마천의 목적의식만큼이나 값지고 소중할 것이다.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 예는 ‘법구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 여인이 외아들을 잃고 부처님께 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부처님께서 내린 처방은 이런 것이었다.

“마을에 내려가 사람이 한 명도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줌을 가져오면 이 아이를 살려주겠다.”

여러 집을 돌아다니던 여인은 마침내 깨닫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그리하여 마침내 미칠 듯한 번뇌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얻게 된다. 물론 절박한 상황에 빠졌다하여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병고로써 양약을 삼는 자만이 가능하다. 병고로써 독약을 삼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리라.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81호 / 2017년 3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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