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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거울처럼 반영”

  • 교계
  • 입력 2017.03.06 17:00
  • 수정 2017.03.06 17:40
  • 댓글 4

[동안거 해제 특별 인터뷰] 계룡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 대봉 스님은 “업을 명징하게 통찰해 집착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에서 나아가, 그것을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1월14일, 동안거 결제를 앞두고 대봉 스님이 법상에 올랐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매년 빠지지 않고 오고 가는 안거지만, 그 한결같음 속에서도 모든 실상은 부지런히 생멸을 반복하고 시간은 순간 속에 꽃처럼 피고 진다. 흐름은 제법(諸法)을 무아(無我)로 돌리며 진리를 드러내왔지만, 그것에 의탁해 깃털처럼 부유하는 우둔한 중생들만이 구태여 어제와 오늘의 일상을 경계 짓는 수고를 제 어깨에 얹는다. 때문에 그네들의 상대적 세계에서는 행복이 고통이고 고통이 행복일 테지만 절대적 세계에서는 행복도 고통도 없다. 나아가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여 완전한 세계에 이르면 비로소 행복은 행복이고 고통은 고통이 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 그리하여 대봉 스님은 동안거 결제를 앞두고 오른 법석에서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말했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마음이 시간 만들고 있는 것
인지하지 못해 내일에 집착
이 순간 잃으면 모두를 잃어

‘오직 모를 뿐’ 마음 새기면
업 떠오르고 점차 명징해져
명징해진 업 대중 회향해야

그로부터 3달여가 흐른 2월24일, 계룡시 무상사를 찾았다. 해제 지난 사찰의 적막이 계룡산 자락에 자욱하게 번져 있었다. 간간히 어디론가 향하는 눈 푸른 스님들의 발걸음마저 적막에 스미어 생명력 움트기 시작한 늦겨울 대지로 가라앉았다. 여기선 모든 게 적막일 뿐, 번잡함에 손 내미는 것 하나 존재치 않는다. 도리어 세간의 들끓는 번뇌와 욕망의 부유물들을 끌어와 말끔히 씻어내고는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무상사 특유의 적막이었다. 이 적막은 무엇에서 비롯됐을까. 고요 속을 걷고 걸어 길의 끝자락에 닿자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이 환한 얼굴로 서있었다. 반짝이는 푸른 눈과 조금은 하얗게 샌 눈썹으로 해맑게 웃으며 인사 건네는 스님에게 절을 올렸다. 말없이 차를 따르는 동안 이번 안거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물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력을 넘기면서 내일의 일들을 고민하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반대로 이 순간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요.”

안거 역시 마찬가지다. 스님은 1년에 두 번 3달씩 정진하는 안거가 훌륭한 제도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에 끄달려 안거와 해제를 갈라 분리될 수 없는 일상을 헤집어놓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미욱함일 것이다. 실제 무상사는 결제와 해제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경내 국제선원 벽에 붙은 ‘무상사 해제 규칙’에 따르면 ‘해제 동안에도 무상사에서는 출가자, 재가자가 함께 일하며 선수행을 지속’한다. ‘대중 전원은 모든 수행 시간에 참석’하며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아침공양 때까지 묵언수행’한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야 한다고 할 때, 교통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해도 되고 기차나 비행기를 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부산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최첨단 기술을 집약한 빠른 자동차를 가지고 있더라도, 정작 방향을 평양으로 잡아버리면 부산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무상사는 화두를 잡든, 염불을 하든, 알아차림을 하든 그 방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길의 방향을 잡아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길의 방향은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사실, 소싯적 스님은 잘나가는 ‘히피’였다. 미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렸을 때 인종갈등의 참혹한 실상에 고통을 느끼며 그 원인을 찾는 지난한 과정을 통과하고 있었다. 전공을 물리학에서 심리학으로 바꿨으며 머리카락을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히피로서 자유를 꿈꾸었다. 그럼에도 그토록 원했던 답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4대 생불 가운데 한 명으로 추앙받던 숭산 스님을 만난 건 그즈음인 1977년, 예일대에서였다.

“숭산 스님이 대중들에게 ‘온전한 정신과 미친 정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묻고는 곧이어 답을 하셨습니다. ‘집착하면 미친 것이고, 집착하지 않으면 온전한 것이다.’ 마음이 단박에 환해졌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찾아 헤매었던 답이었지요.”

숭산 스님의 지도를 받아 2박3일씩 세 차례 정진했다. 마지막 날, 숭산 스님에게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죽비가 날아왔다. “모르는 그 마음 간직하고 있다면 너와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당장 직장에서 나와 숭산 스님이 설립한 프라비던스 선원에 들어가 행자생활을 했다. 1984년 서울 화계사에서 출가한 뒤 1992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고 현재의 무상사와 국제선원을 일궈냈다. 스님의 방향은 숭산 스님을 처음 봤던 그때, 이미 결정됐다.

“‘Who are you.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것이 핵심입니다. ‘Only don’t know, Only go straight. 오직 모를 뿐을 생각하며 똑바로 걸어갈 뿐’이죠. 만약 ‘I don’t know, 나는 모른다’를 묻고 있다면 여전히 ‘I, 나’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모를 뿐’을 생각하면서 각자 개인에 맞는 방편을 찾아주는 게 무상사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오직 모를 뿐’이 마음에 새겨지면 자신의 업이 천천히 떠오르고 어느 순간부터 명징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좋은 업은 행복을, 나쁜 업은 고통을 안기지만 명징한 업은 보살도로 향하게 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스님의 지향, 무상사가 이끌고자 하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수행이 단지 자신의 업을 알게 되는 수준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그 마음으로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도록 하는 것이다.

숭산 스님은 히피들을 보고 “거의 깨달았다”고 평가했다. 그렇게 본다면 출가 전 대봉 스님 역시 ‘거의’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커다란 함정이 있었으니, 바로 자유에 대한 ‘집착’이다. 걸림 없는 자유는 마땅히 도달하여야 할 곳이지만, 그것에 집착한다면 아니 가려는 것만 못한 셈이다. 숭산 스님은 히피들의 그러한 집착을 매섭게 꾸짖곤 했다. 어느 날 숭산 스님이 선원을 거닐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수행자를 보았다. 스님은 그 히피와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에 갑자기 그의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당기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 머리카락 잘라라”고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그는 숭산 스님에게 머리카락을 잡힌 채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꾸짖음도, 답변도 찰나였다. 숭산 스님이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자를 필요 없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지만, 그에 집착하지 않았던 히피의 마음을 꿰뚫어봤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거울처럼 반영됩니다. 집착하고 있음을, 심판하고 있음을 곧바로 인지하게 되는 거울을 앞에 두는 것이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게 필요해요. 거울을 통해 반영되는 바로 그것을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스님과 무상사의 이러한 지향과 달리, 세상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으로 촉발된 혼란은 해방 이후 70여년간 사회를 물들여온 보혁 갈등을 폭발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최근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는 반이민 행정명령에 잇따라 서명하며 자국을 인종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몰고 있다. 파리 등 유럽지역은 테러로 몸살을 앓고, 시리아를 포함한 중동지역에서는 잔혹한 내전으로 시민들이 처참히 죽어간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원인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본성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대신 동물적 사고가 강해지고 있지요. 동물적 마음은 간결하지만 매우 좁습니다. 생각의 범위가 자신이 속한 조직을 넘지 못합니다. 트럼프는 이민자를 내쫓으면 미국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습니다. 자신이 속한 범주의 외부에 이민자가 있다고 착각하고 그들을 적대시하는 것이죠.”

 
사회나 국가뿐만이 아니다. 가정 내에서, 심지어는 나 자신에게도 동물적 사고에서 비롯된 갈등은 커지고 있다. 위는 “이제 그만 먹으라”고 조언하지만 입은 “아직 괜찮다”며 음식을 집어넣는다. 위와 입이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비대해지고 있다. 동물적 사고는 어디서 오는 걸까. 죽임당한 생명을 죄의식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입 속으로 털어 넣는 동안,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업을 흡수하고 있다. 왜 업을 명징하게 보아야 하는가. 실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드러난 것들에 끄달려 심판하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업을 올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은 건 좋은 방향으로, 나쁜 것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대봉 스님이 바라보는 세상은 명징하다. 하늘이 파랗듯, 나무가 푸르듯.

문득, 숭산 스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했다. 빙긋 웃던 대봉 스님이 말했다. “Two eyes, two arms, two legs, one body. 두 개의 눈, 두 개의 팔, 두 개의 다리, 한 개의 몸.” 예전에 대중들도 숭산 스님을 통해 그렇게 느꼈을까. 대봉 스님의 얼굴에서 우문(愚問)을 꾸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시던 스님이 깊어진 눈으로 입을 뗐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랑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숭산 스님은 모든 존재들을 사랑했습니다. 선사셨지만 독특한 방식으로 모두에게 사랑을 표현하셨죠. 대다수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숭산 스님은 특별했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숭산 스님을 만나게 된 것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가르침을 따를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숭산 스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고자 한다면 배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learn how to learn’, 어떻게 배우느냐를 배우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되면 스스로 깨닫게 되고 결국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대봉 스님도 늘 ‘어떻게 배우느냐를 배우는 마음’으로 정진하고 있다. 숭산 스님 제자 가운데 몇몇은 포교를 하고자 외국으로 나갔다. 하지만 대봉 스님은 한국에 머물러 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이유는, 이곳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하다. 결제건 해제건 상관없다. 일상이 곧 수행이다. 순간이 곧 영원이다.

스님과 인사 나누고 무상사를 빠져나왔다. 뒤돌아보니 한줄기 적막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적막은 무엇에서 비롯됐을까. 대봉 스님은 지난해 결제 법문에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굳이 결제여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스님이 늘 품고 있는, 그래서 어느 순간 자신 속으로 스며든 질문이었을 것이다. 무상사의 적막, 그 줄기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늦겨울 대지로 자욱하게 번져가고 있는 매순간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계룡=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382호 / 2017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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