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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람 노릇하는 공부

기자명 조정육

경전은 인간 정신 고양하는 최고의 고전

▲ 김경민, ‘독서삼매경’, 15×15×20cm, acrylic on F.R.P, 2017 : 그녀가 책을 보고 있다. 아니 책에 빠져 있다. 얼마나 심취했던지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사람에 치이고 업무에 시달려 극도로 무기력했던 심신이 편안해진다. 사람노릇하며 사는 법을 배웠으니 다시 일어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뉠 것이다. 책은 ‘번아웃(Burn-out)’된 심신을 충전시켜주는 급속충전기다.

외출해서 돌아와 보니 대문 앞에 택배가 와 있다. 주소는 맞는데 받는 이가 누군지 모르겠다. 잘못 배달된 물건이었다. 돌려줘야 하는데 전화번호가 적혀 있지 않다. 택배회사로 전화를 하자니 8시가 넘어 업무가 끝났을 것 같았다. 내일 아침에 찾으러 오겠지, 싶어 현관에 놓아두었다. 저녁을 먹은 후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한참 잠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인터폰이 울린다. 시계를 보니 12시 반이었다. 잠에 취해 인터폰을 받았는데 앞집 여자다. 혹시 택배 받은 것 없느냐고 묻는다. 받았다고 하니까 자기 아이한테 온 물건이란다. 지금 자기 아들이 갈 테니 그 물건을 돌려달라고 했다. 잠옷바람으로 나가 물건을 주고 들어오는데 잠이 확 달아난다. 자다가 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경우 없는 여자를 봤나. 지금이 몇 시인데.

오전 12시 반에 인터폰 걸어
택배 돌려달라는 앞집 여자
이유 묻자 이기적 대답까지

나만 옳다는 편견 어리석어
독서는 편견 돌아보는 기회

경우 없는 짓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그 여자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가볍게 목례만 했더니 아이가 몇 명이냐고 물었다. 아들만 둘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아들만 하나란다. 그런데 다음 말이 가관이었다. “혹시 그거 아세요? 딸 둘에 아들 하나면 금메달, 딸만 둘이면 은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면 동메달, 그리고 아들만 둘이면 목메달이래요.” 그러면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술에 취한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가 은근히 뒤끝이 심한 사람이다.

오늘이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날이다. 쓰레기를 들고 1층에 내려가 보니 마침 앞집 여자도 쓰레기를 들고 나왔다. 잘 걸렸다 싶었다. 나는 앞집 여자에게 다가가 어젯밤의 사건을 얘기했다. “그 물건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밤 12시에 남의 집에 인터폰을 할 수가 있어요?”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다. “우리 집 식구들은 워낙 늦게 자기 때문에 그 시간이면 초저녁이에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왕안석(王安石)은 ‘권학문(勸學文)’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창 앞에서 성현의 옛 책을 읽고(窓前看古書), 등불 아래서 책의 의미를 찾아보네.(燈下尋書義)’ 이 구절 앞에 서면, 어진 선비가 밝은 창 앞에서 성현의 책을 읽고 서성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어진 선비는 자신의 행실을 성현의 가르침에 비추어보느라 어둠이 찾아오는 줄도 모르고 생각에 빠져 있다. 이것이 학습(學習)하는 자의 기본자세이다. 공자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했던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의 학습이다. 창 앞에서 본 책이 학(學)이라면, 등불 아래서 의미를 찾는 것은 습(習)이다. 배운 것이 내 것이 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학습은 유교에서 수신(修身)의 기본이다. 수신은 불교의 수행(修行)과 통한다. 수신과 수행은 왜 필요한가? 공자의 가르침처럼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롭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들의 삶이 어둡고 위태로운 것은 생각이 결여되었거나 배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한 이런 고민이 없기 때문에 어둡고 위태롭다. 어둡고 위태로우니 자신만이 옳다는 독단에 빠진다. 나만 옳으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옳지 않다. 나만 편하면 다른 사람이 불편하거나 힘들어도 상관없다. 이것이 독단이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없어서 나온 행동이다. 자신만 옳다는 편견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옛날 옛날 아주 오랜 옛날이었다. 인도의 어떤 왕이 신하들과 함께 진리에 대해 말하다가 대신을 시켜 코끼리 한 마리를 몰고 오도록 했다. 왕은 여섯 명의 맹인을 불러 손으로 코끼리를 만져보게 했다. 그리고 각각의 의견을 말해보라고 했다. 제일 먼저 코끼리의 이빨을 만진 맹인은 코끼리가 ‘무’같이 생긴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코끼리의 귀를 만진 맹인이 앞사람을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닙니다. 폐하. 저 사람이 말한 것은 틀렸습니다. 코끼리는 곡식을 까불 때 사용하는 키같이 생겼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를 만진 맹인이 나서며 큰소리로 말했다. “둘 다 틀렸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마치 커다란 절굿공이같이 생겼습니다.” 코끼리 등을 만진 사람은 세 사람의 말을 부정하며 ‘평상같이 생겼다’고 했다. 배를 만진 사람은 ‘장독같이 생겼다’고 주장했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굵은 밧줄같이 생겼다’고 우겼다. 그러면서 여섯 명의 맹인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떠들며 다투었다. 왕은 그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보아라. 코끼리는 하나이거늘, 저 여섯 맹인은 제각기 자기가 보고 느낀 것만을 가지고 ‘코끼리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남의 의견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과오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진리를 아는 것도 이와 같다.”

‘열반경’의 ‘사주후보살품’에 나오는 얘기다. ‘군맹모상(群盲摸象)’ ‘군맹평상(群盲評象)’ ‘맹인모상(盲人摸象)’ 등의 고사성어로 알려진 얘기다. 옛날 얘기라고 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의 속성을 꿰뚫어본 얘기다. 자신의 좁은 소견과 편견으로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얘기다. 불교경전에만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유교경전이라 할 수 있는 ‘논어’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찾아볼 수 있다. ‘자한’편에 보면 공자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공자는 네 가지를 전혀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하지 않고(毋意), 함부로 단언하지 않았으며(毋必), 자기 고집만 부리지 않았고(毋固),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毋我).’ 부처나 공자 같은 성인들은 어떻게 독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다. 책을 통해 나의 고정된 틀과 편견을 반성하면서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기 위해서다. 그중에서도 경전은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켜주고 승화시켜주는 최고의 고전이다. 성현들의 가르침을 읽고 독송하고 마음에 새기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그분들처럼 살고 있을 것이다. 금쪽같이 아끼는 돈과 지위와 권력이 닭벼슬만도 못하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어떤 것도 사람의 도리를 앞설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가르침의 밑바탕에 독서가 있다. 창 앞에서 성현의 옛 책을 읽고, 등불 아래서 책의 의미를 찾아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언제 독선적인 사람으로 변해있을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앞집 여자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그녀처럼 나의 기준에서 판단하고 행동한 적은 없었는가.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지는 않았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하루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나에게 역행보살(逆行菩薩)이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마음상하는 나야말로 진짜 나의 역행보살이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82호 / 2017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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