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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아시아 불교의 역사적 성격-상

천년에 걸친 인도경전 한문번역으로 독자적 불교문화 형성

▲ 중국 서안 자은사에 있는 대안탑. 652년,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상(經像)을 안치하기 위해서 조성한 것으로 중국의 대표적 전탑이다.

동아시아 불교의 중심을 이룬 것은 중국불교이다. 중국불교라고 하는 것은 이질(異質)의 문화권에서 성립된 인도불교를 중국인이 수용해 중국사회와 문화에 적응되도록 변용(変容)하여 중국인의 정신생활의 양식으로 된 불교를 말한다. 원래 불교는 기원전 6~5세기경 인도에서 성립된 이래, 그 보편성과 세계성으로 말미암아 국경을 넘어 각 지역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인도의 경전 그대로 받아들인
남아시아권의 불교와 다르게
중국의 언어인 한문으로 번역

구성자체가 다른 상이한 언어
번역의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

인도와 서역의 학승 참여하고
한국 등 주변 국가들도 동참

국가 주도한 천년의 번역 역사
유례가 없는 한역대장경 탄생

구마라습과 현장 대표 역경승
경전을 구경과 신경으로 구분

10세기 송대에 첫 대장경 간본
고려대장경 송 대장경이 표본

일본은 대장경 간행 가장 늦어
근대화 후 잇따라 대장경 간행

그 가운데 서북인도에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지방으로 전파된 불교가 실크로드의 대상(隊商)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거쳐 서기 1세기경 마침내 중국에 전해졌다. 그리고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중국의 사상 및 문화와 융합되어 변용되면서 독자적인 중국불교를 성립시켰다. 또한 중국불교는 드디어 동아시아의 전역, 특히 한국과 일본, 그리고 베트남의 북부지역 등으로 전파되어 이른바 ‘동아시아 불교권’을 형성하였다. 그 결과 동아시아 불교는 인도·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의 남아시아 불교와는 현저히 다른 성격을 갖게 되었다. 동아시아 불교가 남아시아 불교와 구분되는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역대장경(漢訳大蔵経)·대승불교(大乗仏教)·국가불교(国家仏教)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불교의 가장 커다란 특징으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역대장경에 의거하여 성립된 불교라는 점이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경전은 다라니(陀羅尼)를 제외하고, 모두가 한문(漢文)으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자기 언어로 번역하여 받아들인 것은 남아시아 불교권에 속한 스리랑카에서 인도의 경전을 원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과 대조된다. 문자에 특별한 우월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의 중화의식(中華意識)의 발로이며, 자신들의 언어로서 불교를 이해하려는 고심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한자 사용과 불교신앙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게 됨으로써 한자문화권이 곧 동아시아 불교권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불교경전이 전혀 이질적인 사회적·문화적 배경에서 성립된 문헌이며, 더욱이 경전의 내용이 불교라는 고도의 사상체계를 표현한 문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번역의 어려움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언어학적으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가 표음문자로서 어미 굴절의 현상을 나타내는 언어인데 반하여, 시나-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중국어는 표의문자로서 단음절로 이루어진 언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번역의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하였을 것이다.

경전의 번역 사업은 결코 중국인만의 힘으로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인도나 서역 여러 나라의 학승들이 참여하였다. 때로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 주위의 이민족 출신들이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경전의 한역 작업은 실로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불교인 전체의 열정이 집중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번역 사업은 질과 양 두면에서 인류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수하고 방대한 한역대장경을 탄생케 함으로써 동아시아 불교권 성립의 기본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경전의 한문번역은 후한(後漢)시대 불교전래의 당초부터 당(唐)·송(宋)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간에 걸쳐 불교계의 주요한 사업으로서 수행되었다. 그리고 경전의 번역과정에서는 양(梁)대의 진제(真諦) 같이 국가권력의 보호나 지원이 없이 유랑의 여행을 계속하면서 순전히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 수행된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대세는 역대 왕조 제왕들의 지원 아래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제왕들의 보호 아래 역경에 종사한 대표적인 학승들을 연대순으로 들어보면, 먼저 구마라습(Kumārajiva, 350~409)은 후진(後秦) 고조(高祖)의 국사가 되어 장안의 소요원(逍遥園)에서 35부 300여권을 번역함으로써 역경의 역사를 시기 구분하여 구경(旧経)과 신경(新経)으로 나눌 정도의 획기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다음 당(唐) 초기의 현장(玄奘, 600~664)은 태종(太宗)이 장안의 대자은사에 세운 국립번역기관인 번경원(飜経院)에서, 그리고 의정(義浄, 635~713)은 중종(中宗)이 대천복사에 세운 번경원(飜経院)에서 각각 국가적인 사업으로서 번역작업을 수행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현장은 번역한 경전이 무려 75부 1335권에 달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번역 양식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와서 구역(旧訳)과 신역(新訳)으로 구분케 하였다. 구마라습으로 대표되는 구역은 의역(意訳)의 측면이 강했던데 비하여 현장의 신역은 직역(直訳) 위주의 번역으로서 각각 장단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송(北宋)에서는 태조가 역경장으로서 번경원(飜経院)과 부설기관으로 인경원(印経院)을 설치하였을 때, 인도의 북서지역인 캐시미르에서 온 천식재(天息災)가 초청되어 들어갔다.

역대왕조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한 역경은 수많은 학승들이 팀워크를 이루어 역할을 분담했는데, ‘구관(九官)’이라 하여 역경의 직분이 세분되어 있었다. 특히 송대 역경원의 예를 들면 역주(訳主)·증의(証義)·증문(証文)·서자(書字)·필수(筆受)·철문(綴文)·참역(参訳)·간정(刊定)·윤문(潤文) 등 9종으로 나뉘어서 역주에서 증문까지의 역할은 원문의 이해와 검토, 서자부터 철문까지의 역할은 번역문의 작성, 그리고 참역부터 윤문까지의 역할은 번역문의 검토와 윤문의 단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로써 경전의 원문에 충실하고 어학적으로 세심하고 정확한 번역을 위해 역경 작업이 매우 면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9종의 역할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역주인데, 번역된 경전에 역자로서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이 역주이다. 현장 이전에 역주를 맡은 것은 대개 서역 출신의 외국 사문들이었는데, 현장부터는 인도로의 구법여행 경험과 원어에 능통한 중국 출신의 학승들이 담당하게 됨으로서 중국인 주체의 불교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래, 시대가 내려오면서 번역된 경전의 종류와 수량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역 경전을 종합하여 정리한 목록 작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일찍부터 역출된 불전의 목록들이 연이어 편찬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것은 중국불교 성립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는 전진(前秦)의 도안(道安, 314~385)이 작성한 역경록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이다. 그리고 역경 사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730년에 편찬된 지승(智昇)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은 종래의 경록(經錄)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일체경(一切經)의 목록이라고 평가된다. 그런데 도안의 경록에 수록된 것은 611부 859권에 불과하였지만, 지승의 경록은 ‘총괄군경록(總括群經錄)’에서 후한(後漢)부터 당대까지 664년 동안 19대로 나누어 176명의 역경승(譯經僧)에 의한 2275부 7046권이 수록되었다. 특히 그 경록의 ‘현장입장목록(現藏入藏目錄)’에서는 1076부 5048권 480질이나 수록되어 있어서 그 뒤 대장경을 서사(書寫)할 때의 유력한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송(宋)대인 10세기 중반에는 인경원에서 역출 경전의 조판 인쇄가 대규모로 행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번역본뿐만 아니라 한문으로 저술된 불전도 일부 대장경에 편입되었다. 971년부터 12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개보판(開寶版, 또는 蜀版)’은 간본(刊本) 대장경의 최초의 것이다. ‘개원석교록’에 기초하여 1076부 5048권으로 이루어진 이 개보판은 후대의 대장경의 표준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법장·율장·논장의 ‘삼장(三藏, Tri-piţaka)’이라는 용어 대신에 ‘대장경(大藏經)’의 명칭이 비로소 널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동아시아의 각국에는 한자문화권의 성립과 아울러 한역대장경이 널리 전파되어 통용되었는데, 한역대장경의 간행과 보유는 동아시아 불교권의 일원이 되었음과 동시에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국가임을 상징하는 표본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개보판 이후에도 송(宋)대부터 원(元)·명(明)·청(淸)대에 걸쳐 관판(官版), 또는 사판(私版)의 간행이 여러 차례 이루어지면서 동아시아 불교국가의 중심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현종대에 각성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바로 개보판을 이어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 고종대에 재조된 것이 현존하는 ‘해인사판 대장경’인데, 교정이 엄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거란족의 요(遼)와 여진족의 금(金)에서도 각기 한역대장경을 간행하고 있었다. 근대 이전 중국 주변의 국가 가운데 한역대장경을 그대로 간행하지 않고 자기 언어로 번역한 경전을 가진 것은 탕구트족의 서하(西夏)와 티베트뿐이었다.

한편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대장경의 간행이 가장 늦은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의 대장경 간행은 에도시대인 17세기 천해판(天海版)과 황벽판(黃蘗版)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중국의 대장경을 모방한 전근대기의 한역대장경이었다. 그 이전은 한국과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정도의 후진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14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 300여 년간 우리에게 80여 차례에 걸쳐서 대장경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었던 사실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근대화를 불러온 메이지(明治) 시기에 근대식 활자에 의한 대장경 간행이 시작되면서 사태는 돌변하게 되었다. 19세기말~20세기초 신활자판에 의한 축쇄장경(縮刷藏經)·만자장경(卍字藏經)·만자속장경(卍字續藏經)·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 등이 연이어 간행되었는데, 특히 신수대장경 100권은 10년(1924~1934)에 걸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가장 널리 보급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찬술된 불교문헌을 집성한 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일본대장경(日本大藏經) 등이 간행되고, 근대불교학의 발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된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과 함께 서장대장경(西藏大藏經, 사진판) 등이 간행됨으로써 이제 대장경의 명칭은 한역대장경 이외에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끝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각국에서는 경전의 번역 간행뿐만 아니라 한역대장경에 대한 주석과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고려시대 의천은 이러한 장소(章疏)들만을 별도로 수집하여 하나의 교장(敎藏)으로서 간행하였다. 의천에 의한 장소의 수집 간행은 한역대장경의 간행과는 별도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동아시아 불교권에서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업적으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382호 / 2017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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