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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람의 마음 어디에 부처가 있다고-하

표면의 사유란 표면에 존재하는 깊이를 보는 것

▲ ‘평상심(平常心)’고윤숙 화가

매일매일의 생활, 하나하나의 언행을 산출하는 물결들이 바로 마음이다. ‘배고프면’, 혹은 ‘때가 되면’ 밥을 먹고자 일어나는 마음, 그때마다의 연기적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는 마음이다. 부서진 신체의 표면에 떠오르는 마음은 그 부서진 신체를 조건으로 하는 마음이고, 배고픈 신체 표면에 떠오르는 마음은 배고픈 신체를 조건으로 하는 마음이다. 표면적이기에 조건이 변함에 따라 끝없이 변하는 잔물결 같은 마음들이다.

 그런 물결 같은 마음 하나하나에서 애증에 물들지 않는 것, 얻으려 치달리지 않고 밀쳐내려 인상 쓰지 않는 것, 그것이 마조가 말하는 즉심즉불의 부처고 도이다. 이처럼 일상생활 하나하나에서 애증에 물들지 않은 마음을 ‘평상심’이라 한다. 평상심이란 연기적 조건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이고, 본체 같은 깊은 심층에 숨은 마음이 아니라 표면에 떠다니지만, 애증에 물들지 않은 마음이다. 억지로 하려 하지 않는 마음이란 점에서 일체의 유위를 떠난 무위의 법이고, 그런 무위를 행하는 것으로서의 도이다. 그런 마음을 보라는 말은 표면에서 물결처럼 일어나고 가라앉는 마음이 애증과 탐진의 욕망에 물들지 않았는지 지켜보라는 말이다.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듦이라 하는가? 생사심으로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듦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이 도이다. 무엇을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가 없고 단상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마조록/백장록’, 27쪽)

즉심즉불도 평상심도 다 표면의 마음
일렁이는 마음 물들지 않는 게 평상심
진리는 구할 것 없어야 구할 수 있으니
추구하려는 마음까지도 없이 추구해야

즉심즉불의 마음도 평상심도 표면의 마음이다. 깊숙한 심층의 본체 같은 게 아니라 매일 매순간 우리의 신체를 움직여내는, 신체 표면의 마음이다. 서양도 그렇지만 동양 역시 심층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다. 표면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저 깊은 심층의 어떤 본성이나 본체 같은 것, 혹은 세상사 모두를 만들어내고 지배하는 하늘 저편의 지고한 이법(理法)이 그것이다. 초월적인 실체나 본성, 혹은 어떤 이치나 원리를 추구하는 것은 모두 표면적인 것을 하찮은 것이라 비판하며 심층적인 것을 추구한다. 이런 태도를 서양철학에선 형이상학이라 한다. 하나의 원리, 하나의 본성으로 전체를 꿰려는 태도란 의미다. 자연과학조차 이점에서 보면 충분히 형이상학적이다. 모든 현상을 지배하는 단일한 법칙을 추구하기에,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상대성이론 등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이른바 ‘대통합이론’의 꿈이 이를 잘 보여준다.

불교는 원래 이와 반대로 표면적인 것에 주목한다. 연기법, 흔히 부차적이라고 간주되는 그때그때의 연기적 조건들이 ‘본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마저 바꾸어버린다는 사고법이란 점에서. 그러나 이런 사고법은 사유를 거듭하면서 연기적 조건들과 무관한 어떤 것을 향해 어느새 나아가기 십상이다. 심층의 실체를 찾기 마련인 게 어쩌면 사유의 깊은 성향인지도 모른다. 표면적인 현상들 어디에나 존재하는 원소 같은 것을 찾으려는 ‘아비달마’의 시도도 그런 경우였다. 원소적인 실체 대신 불성 같은 거대한 본체를 찾으려는 시도도 비슷한 경우일 게다. 다만 그 경우에도 불교가 남다르게 특이한 것은 연기법적 사고를 되돌려서 이런 심층의 본체가 어떤 본성도 없음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불교에도 심층적 사고는 있지만, 그것은 본성 없는 심층, 혹은 실체 없는 심층을 향한다. 불성이나 여래장, 본체, 장식(藏識) 같은 것이 그렇다. 본성 없는 마음이지만, 심층에 있는 마음이다.

그런데 마조가 즉심즉불의 물결 같은 마음을 보라고 할 때, 그것은 심층 아닌 표면의 마음이다. 그는 심층에서 부처가 되는 법 대신 표면에서 부처가 되는 법을 가르친다. 심층으로 내려가는 좌선 대신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부처가 되라고 설파한다. 평상심이란 그렇게 표면에서 자유로움을 얻은 마음이고, 끝없는 물결 위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마음이다.

시인 발레리는 ‘가장 깊은 곳은 피부다’라고 쓴 적이 있다. 피부란 표면이다. 가장 표면적인 것이 가장 깊은 것이라는 역설적인 말이다. 이 말을 고지식하게 이해하려면 피부병 약을 생각하면 된다. 위장에서 흡수되어 신체 모두를 다 관통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 피부 아닌가! 하지만 그건 표면을 예찬하려던 것을 심층보다 더 깊은 곳으로 끌고 내려가는 것이고, 가벼움을 말하려던 것을 너무 무겁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심층을 찾기 위해 무시되는 표면을 그들이 찾는 깊이의 이름으로 부상시킨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표면의 사유가 피상적인 사유는 아니다. 가장 깊은 것이 표면이라면, 중요한 것은 표면에서 그 깊이를 보는 것이다. 표면의 사유란 그저 표면을 보는 게 아니라 표면에 존재하는 깊이를 보는 것이다. 표면의 깊이는 깊이 없는 깊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더욱더 보기 어렵다. 표면의 사유가 피상적 사유가 되기 십상인 것은 이 때문이다. 표면에서 일어나는 물결에서 그 물결의 고요함을 만드는 ‘깊이’를 보지 못하는 것 역시 피상적인 것이다. 그런 눈으로는 그저 일어나는 그때마다의 번뇌심과 물결 속에서 고요한 평상심의 차이를 보지 못한다.

평상심은 그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을 ‘당당하게’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다. 그건 이미 충분히 애증과 탐진의 마음에 물들어 잔물결 하나에도 쉽사리 끌려다니고 끄달리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평상심이란 물결과 파도를 피해 물속으로 숨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 끌려다니는 것도 아니다. 따라가되 끌려다니지 않고 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하는 것이다. 그건 차라리 마음의 물결을 타고 다니며 그것을 부리는 것이다. 고요한 곳을 찾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 고요한 것이다. 없는 것을 얻고자 애쓰지도 않고, 있는 것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 것, 오면 오는 대로 맞아주고 가면 가는대로 놓아두면서 매순간의 삶에 충실한 것, 그게 평상심이란 말로 마조가 가르치려 한 것일 게다. “도란 닦는데 속하지 않는다. 닦아서 체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었으니 다시 부서져 성문(聲聞)과 같아질 것이며, 닦지 않는다 하면 그냥 범부일 뿐이다.”(25쪽)

그러나 나중에 마조는 즉심즉불 대신에 ‘비심비불(非心非佛)’로 사람들을 가르친다. 보아야 할 것, 찾아야 할 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말이다. 즉심즉불에서 하고자 했던 것을 대놓고 뒤집어 버리는 대구다. 왜 그랬을까?

무위의 평상심도 근본적인 역설을 갖는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평상심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얻고자 하는 게 있는 것이니, 무위가 아니라 유위에 속하게 된다. 즉 평상심이 아닌 것이 된다. 평상심은 추구하려는 마음조차 없이 추구해야 평상심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얻으려 할 것도 없고 부처라는 상태를 따로 얻으려 해서도 안 된다. 얻으려고 하지 않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게 평상심이고, 도달하려는 마음이 없을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게 부처다. 백장의 말이다. “부처는 구하는 게 없는 사람이니 구하면 이치에 어긋나고 진리는 구할 것 없는 이치이니 구하면 잃는다. 그렇다고 구함이 없는 것에 집착하면 도리어 구하는 것과 같다.”(‘마조록/백장록’, 175)

이렇게 반대되는 설법으로 바꾸었으니 혼란이 생길 법도 하다. 즉심즉불이란 말에 깨닫곤 대매산(大梅山)에 머물고 있던 제자 법상(法常)에게 스님을 하나 보내 슬그머니 시험을 해본다.

“마조스님 법문은 요즈음 또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요즈음은 비심비불이라 하십니다.”
“이 늙은이가 끝도 없이 사람을 혼란시키는구나. 너는 네 맘대로 비심비불해라. 나는 오직 즉심즉불일 뿐이다.”
그 스님이 돌아와 보고하니 마조가 말했다.
“매실이 제대로 익었구나.”

백장회해는 즉심즉불이 방편교설이고 비심비불이 궁극적인 교설이라고 한 적도 있지만(‘마조록/백장록’, 108) 사실 둘 다 방편일 뿐이다. 자신의 조건에 따라 도를 찾아가는 도구일 뿐이다.
 

어떤 스님이 마조에게 묻는다.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즉심즉불이란 말을 하십니까?”
“어린 아이의 울음을 달래려고 그러네.”
부처를 찾는 이를 위한 방편이란 말이다.
“울음을 그쳤을 땐 어떻게 하시렵니까?”
“비심비불이지.”
“이 둘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지도하시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겠다.”
“그 가운데서 홀연히 누가 찾아온다면 어찌하시렵니까?”
“무엇보다도 큰 도를 체득하게 해주겠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solaris0@daum.net


[1382호 / 2017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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