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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대 눈동자 속에 답이 있다

기자명 정운 스님

부처와 중생, 마음 다르지 않기에
마음 떠나서는 부처 이룰 수 없어

원문:부처와 중생, 일심에 있어 다르지 않다. 마치 허공이 섞이거나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으며, 태양이 떠올라 천하를 밝게 비추지만 허공이 밝아진 것도 아니고, 해가 저문 뒤에도 어둠이 천지를 뒤덮지만 허공은 어두워지지 않는 것과 같다. 밝고 어두운 경계는 교차되며 변화하지만, 허공의 본성은 변화가 없다. 부처와 중생, 마음이 이와 같다.

만약 삶에서 길을 잃었다 해도
결국 모든 답은 자신에게 있어
태양에 따라 밝고 어둠 있지만
본래 허공의 본성에는 변화없어

만약 어떤 사람이 청정광명을 해탈의 모양으로 여기고 중생을 생사의 물결에 오염되어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그는 수많은 겁을 지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곧 형상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뿐이며, 티끌만한 법도 얻을 것이 없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오늘날 수행자들은 마음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 위에 마음을 내어서 밖에서 부처를 구하고 있다. 이는 형상에 집착해 있는 것으로 옳지 않으며, 보리의 도가 아니다.

해설:원문에서 ‘밝고 어두운 경계는 교차되며 변화하지만, 허공의 본성은 변화가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허공이란 청정한 자성, 본성, 마음을 말한다. 경전에는 ‘객진번뇌(客塵煩惱)’라고 청정한 자성을 주인에, 번뇌를 손님에 비유한다. 즉 청정한 자성[주인:佛性)은 원래 있는 것이요, 번뇌[손님]는 곧 사라질 것이다. 밤이 되어 어둡고 태양이 있어 밝지만, 허공에는 밝고 어두움이 의미가 없듯이, 마음[자성]은 늘 청정히 존재해 있는 본래 성불된 부처이기 때문이다.  

5조 홍인(601~674)은 구름을 번뇌에 비유하고,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불성에 비유하였다. 원래 태양은 늘 떠서 빛나는 것이요, 구름이 잠깐 가로막고 있을 뿐 구름만 제거된다면 태양이 드러난다는 비유이다. 황벽 이전의 선사에 비해 황벽의 비유가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원문에서 ‘부처와 중생, 마음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이 내용은 마음 차원에서는 부처와 중생에 있어 차별이 없다는 것으로 ‘전심법요’에 자주 언급되어 있다. ‘화엄경’에도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고 하였다.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그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 땅을 떠나서는 일어날 수 없다. 여기서 ‘땅’은 일심이요, ‘넘어짐’은 중생심이요, ‘일어남’은 불심이다. 중생이든 부처이든 일심(一心)을 말미암는 것이니 절대 이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 밖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원문에서 ‘마음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 위에 마음을 내어서 밖에서 부처를 구하고 있다’고 하였다. 마조는 ‘밖에서 구하지 말라고 하였고, 임제도 ‘자신의 마음 밖을 향해서 불법을 공부하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다. 당나라 때, 선사 대주 혜해는 스승 마조를 찾아갔다. 대주가 스승에게 인사를 올리자, 마조가 물었다.  

“여기에 무슨 일로 왔는가?”
“불법을 구하기 위해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어찌하여 너의 보물 창고를 집에 놔두고, 쓸데없이 돌아다니기만 하는가?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불법 따위는 찾아서 무얼 하겠느냐?”
“제 보물 창고라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진리를 구하고자 찾아왔다’고 말하고 있는 자네가 바로 그 보물 창고라네. 자네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네. 또한 쓰려고 하면, 얼마든지 마음먹은 대로 쓸 수도 있네.” 

흔히 ‘네 눈동자 속이 아니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 있다. 삶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이정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고자 하는 갈망에 답이 있다. 서양에서는 파랑새를 찾으려고 사방팔방을 헤매다 못 찾고 집에 돌아오니, 자신의 집 마당에 파랑새가 날고 있다는 비유가 있다. 동양에서는 봄의 매화에 비유를 드는데, 봄을 찾으러 밖을 헤매다가 집에 오니, 집 뜰에 매화꽃이 피어있다는 내용이다. 파랑새와 매화는 자기 내부에 구족되어 있다는 뜻인데, 자기 마음에서 구해야지, 그 어떤 것도 외부에서 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382호 / 2017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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