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7.3.26 일 20:23
> 연재 | 주수완의 미술사학자와 읽는 삼국유사
5. 무왕과 익산 미륵사익산의 막대한 금으로 신라와 협력하며 강력한 왕권 실현
주수완  |  indij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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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14  1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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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왕은 왜 백제 후방인 익산을 새 수도로 하고 이렇게 거대한 미륵사를 세웠을까?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武王, 재위 600~641)은 공식적으로는 29대 법왕의 아들이지만 ‘삼국유사’ 무왕 기사는 다소 특이한 그의 출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기 전에 과부가 되었는데,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용과 관계하여 무왕을 낳았다는 내용이다. 어릴 때는 마(서여, 薯?)를 캐다가 팔며 생업을 이었기에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다. 도대체 왕의 아들인데 그 어머니가 왕자를 낳기도 전에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얘기고, 또 왕자인데 어릴 때 마를 캐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만약 어떤 과부가 후에 운 좋게 왕을 만나 재가를 해서 무왕을 낳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마를 캐어 팔아야 생활이 되었다는 것은 왕자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의 출생은 정말로 가난했을까? 서동은 정말로 왕자가 맞긴 했을까?

무왕의 어릴적 이름은 ‘서동’
마 캐서 생계를 이었단 의미

백제 법왕 아들로 알려졌지만
‘삼국유사’에 따르면 먼 친척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결혼으로 유명

금을 장인에게 선물함으로써
신라의 든든한 지원 이끌어내

연못 메우고 들어선 미륵사
금 생산 위한 작업장 가능성

찬란했던 백제 무왕의 시대
미륵사 사리장엄구에서 확인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를 당시의 정황을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일단 그의 선대 왕인 법왕(法王)은 불과 재위 1년만에 사망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선대 왕이었던 혜왕(惠王)도 비록 70세가 넘어 즉위하긴 했지만, 불과 1년만에 사망했다. 이들의 사인은 알 수 없으나 여하간 백제 왕실의 최대 위기였는지도 모르겠다. 혜왕은 형인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으로부터 왕권을 이어받았는데, 혜왕과 위덕왕 형제의 아버지는 백제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으나 허무하게 신라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그 유명한 성왕(聖王)이다. 백제는 성왕의 전사 이후 고구려와 신라와의 경쟁에서 수세에 몰렸지만, 그래도 성왕이 워낙에 나라 안팎에서 존경받던 인물이었던 덕분에 그의 아들 위덕왕까지는 그 후광을 입고 그럭저럭 왕실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백제는 그 나라 이름에서부터 보이다시피 연합국가의 성격이 강했다. 백제의 건국 초기 이름은 십제(十濟)였는데, 여기서 "제"는 "건너다", "돕다" 혹은 "나루" 등의 의미가 있다. 즉, 큰 도시는 항상 강을 끼고 형성되기 때문에 이렇게 물길로 이어져 있는 도시국가 10개쯤을 연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십제란 곧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nited States)인 셈이다. 이후 비류와 온조의 세력이 합쳐져 백제로 이름을 바꿨을 정도로 연합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이 연합은 백제 왕권의 능력에 따라 강력한 연합이 될 수도, 느슨한 연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나마 성왕의 그림자가 서려있던 위덕왕마저 세상을 뜨자 이 연합에 균열이 가고 왕권은 그 균열의 틈에서 세력을 얻은 새로운 권력집단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할 때 혜왕과 법왕이 등극했던 것이다.

   
▲ 미륵사지 서탑 뒤편 건물지는 이처럼 건물을 지반에서 띄워서 세우는 독특한 기초를 지니고 있는데, 이런 아이디어가 지명법사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법왕은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활동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치적이라면 불교를 장려한 정도이다. 이를 위해 나라 안에서의 살생을 금지시켰는데 이러한 조치는 인도의 아쇼카왕의 치적을 모방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시호인 법왕, 즉, 다르마 왕이라는 것도 실상 아쇼카왕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이다. 그렇기에 법왕은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마치 불교에 귀의하여 정치에 스스로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위안을 삼고 체면을 살리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법왕 사후 등극한 무왕, 즉 서동은 ‘삼국유사’의 내용을 따른다면 법왕의 적자는 아니고, 먼 친척쯤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릴 때는 왕실 안에 머물지 못하고 익산에 머물며 아마도 왕실에 공급될 마를 포함한 채소나 산나물 등의 공납을 관리하던 보직을 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다 법왕이 마땅한 후사 없이, 혹은 그 후사마저 제거되자, 실권 없는 왕을 원했던 연방세력의 수장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의 결혼으로도 유명하다.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무조건 신라로 찾아간 서동은 서동요로 알려진 노래를 퍼뜨려 마치 선화공주가 남자와 정을 통한 것처럼 소문을 내 궁궐에서 쫓겨나게 만들었고, 이렇게 쫓겨난 선화공주를 만나 아내로 삼았다는 러브 스토리는 유명하다. 서동이 신부를 굳이 나라 밖에서 찾은 이유를 두고 아마도 토착귀족들과 외척으로 엮여 간섭 받는 것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무왕조에 의하면 선화공주가 신라 궁궐에서 쫓겨날 때 어머니인 왕후는 금 한 덩이를 몰래 쥐어주었다고 하는데, 서동이 후에 그 금덩이를 보고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마를 캐던 장소에 그런 금을 흙덩이처럼 쌓아두었다고 했다. 이에 선화공주는 먼저 그 금을 친정인 신라로 보낼 것을 제안하고, 서동은 그의 멘토로 추정되는 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知命法師)를 찾아가 금의 운송 방법을 묻는다. 그러자 지명법사가 비술을 써서 금을 신라 궁궐로 순간이동 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비로소 신라 진평왕이 서동을 사위로서 인정하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 연못을 메워 세웠다는 미륵사. 습한 곳에 굳이 사찰을 세운 것은 반드시 이곳에 세워져야만 했던 강력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유사’는 서동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든든한 장인을 배후에 두게 된 덕분이었고, 장인의 마음을 돌린 것은 결국 귀한 것인 줄도 몰랐던 금이었으니 금이라는 매개체를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더구나 어떻게 보면 증조할아버지인 성왕을 무참히 살해한 신라왕실의 공주를 넘보고, 금도 백제가 아닌 적국 신라로 보내버렸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처가라고 하지만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서동은 금도 못 알아볼 정도로 정말 시골 무지랭이였을까?

어쩌면 서동이 찾아낸 금은 단순한 금덩어리가 아니라, 사금과 같은 원석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현대인들도 금이 귀한 것인 줄은 알지만 천연광물 상태로 불순물과 섞여있다면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즉 신라인들은 사금을 분별하고 거기서 금을 추출할 줄 알았지만, 백제는 당시까지 그런 기술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다 선화공주를 통해 사금추출법을 알게 되면서 익산에서도 금이 산출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사금을 신라로 보낸 것은 바로 그 추출법을 배우기 위한 일종의 수업료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아가 금을 배경에 두고 왕위에 올라 그를 왕위에 올린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강력한 왕으로 성장한 무왕은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했다. 그러나 삼국의 대규모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전진기지로서 보다 북쪽으로 천도하는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 이동한 것은 왕실이 취할 행동은 아닌 듯하다. 이에 대해 학계는 전남 지역, 즉 백제 후방의 옛 마한 지역을 확실히 복속하기 위한 조치로 보거나 혹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철 산지인 마한 지역에서 원활히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아가 백제의 토착귀족들을 지역기반에서 끌어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무왕의 비밀 자금줄이었던 익산의 금광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지속해나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라는 신라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금추출기술로 인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왕에게 일정부분 기술이전을 조건으로 나름대로 유리한 조건으로 금을 지원받았던 것일 수 있다. 실제 익산은 일제강점기만 해도 유명한 금 산지였다고 하니, 서동이 마를 캐며 발견했다는 금 이야기를 가볍게 흘릴 일은 아니다.

   
▲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의 금제 내함. 무왕 권력의 기반이었던 익산출토의 금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익산의 금을 신라로 순간 이동시키는데 비법을 사용했다는 지명법사는 누구일까? 마침 ‘삼국사기’, ‘해동고승전’에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신라의 당나라 유학파 승려 지명법사가 등장한다. 때문에 혹자는 사자사의 지명법사는 신라 진평왕이 파견한 다소 스파이 성격을 지닌 승려로 해석하기도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금추출 기술 측면에서 볼 때 지명법사는 대량의 사금에서 순금을 추출하여 불필요한 부피를 없애고 이동이 용이하게 만든 1차 정제기술담당자였을 것 같다.

익산을 대표하는 백제 말기의 유적지인 미륵사지는 이러한 무왕의 염원과 의지를 반영한 기념비와도 같다. 특히나 미륵사를 세울 때 지명법사가 산을 허물어 단번에 연못을 메웠다고 하니 이번에도 그의 역할이 지대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지를 보면 지반에서의 습기로부터 목조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석조 기둥으로 건물을 떠받쳐 반지하시설을 둔 독특한 공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나중에 신라 감은사에도 적용되었던 기법이다.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운 것은 과장이겠지만, 늪지를 메웠을 때의 건축적 문제를 지명법사가 해결했다는 뜻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왜 이 거찰을 늪지 위에 세웠을까? 설화에 의하면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부처님이 출현하신 신성한 연못을 굳이 메울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어쩌면 이들 부부가 본 미륵삼존은 물가에 위치한 새로운 사금 산지였고, 이를 대외적으로 비밀에 부쳐 작업을 하기 위해 미륵사라는 대형의 작업장이 그 장소에 꼭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진평왕도 사람을 보내 공사를 도왔다 하니 과거의 해묵은 원한도 군자금 확보를 위한 양국의 합의 앞에 잠시 사라진 순간이었던 셈이다. 백제와 신라가 겨누던 칼을 잠시 내려놓게 만든 익산의 황금, 그 실체는 이제 익산 미륵사지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에서 엿볼 수 있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83호 / 2017년 3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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