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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불도를 성취코자 한다면 우직하게 나아가라

기자명 정운 스님

무심을 무심이라 말하게 되면
곧 무심이 아니라 유심이 된다

원문:시방의 제불에게 올리는 공양이 한 사람의 무심 도인에게 올리는 공양만 못하다. 왜냐하면 무심은 일체의 사념이 없기 때문이다. 여여한 근본으로서 안으로는 목석과 같아 동요되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과 같이 막히거나 걸림이 없다. 능소가 없고, 장소가 없으며, 형상이 없고, 얻고 잃음이라는 것도 없다. 수행자가 감히 이(무심)의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공에 떨어져 머물러 쉴 곳이 없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건너뛰어야 할 벼랑을 만나서도 퇴보해 여러 지견을 구하는 것과 같다. 지견을 추구하는 자는 쇠털처럼 많지만, 깨닫는 자는 뿔처럼 매우 드물다. 근자의 도를 배우는 선자들이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하고, 밖으로 형상과 경계에 집착하고 있는데, 모두 도와는 어긋나는 일이다.

무심, ‘전심법요’에 자주 등장
어록에서 중요한 중심 주제
‘무주상보시’에서 무주상은
집착·불변 없는 무심의 의미

해설: ‘시방의 제불에게 올리는 공양이 한 사람의 무심 도인에게 올리는 공양만 못하다’는 것은 ‘사십이장경’ 11장에도 설해져 있다. 곧 “수많은 부처님께 공양올린 것보다 한분의 무념(無念)ㆍ무주(無住)ㆍ무수(無修)ㆍ무증(無證)한 자에게 공양하는 것이 큰 공덕이다”라고 하였다. 앞에서도 몇 차례 거론했지만, 인간은 본래 성불된 부처와 같은 성품을 갖고 있어 굳이 다시 수행해 증득할 것이 없기 때문에 ‘무수무증’이라고 하는 것이다[수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집착 없이 수행할 것을 강조하는 것]. ‘무심’은 ‘전심법요’ 어록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로, 이 어록의 중심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안 상찰(?~961) 선사는 “무심이란 것도 오히려 하나의 관문에 막혀 있다. 즉 무심도 무심이라고 말하면 벌써 무심이 아니다[無心猶隔一重關 勿謂無心云是道]”라고 하였다. 무심은 단지 무심이어야 무심인 것이요, 무심이라고 관념을 둔다면 유심이 되어버린다. 

‘금강경’ 측면에서 무심을 설명하면, 무주심ㆍ무주상으로 ‘집착하지 않는’ ‘분별심이 없는’ ‘형상을 취하지 않는’ ‘관념두지 않는’ 마음이다. 달마와 양무제가 대화를 할 때, 양무제가 ‘공덕을 많이 지었는데, 어떤 과보가 있느냐?’는 질문에 달마는 ‘과보 받을 것에 집착해 보시한다면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던 것도 ‘무주상’을 말한다. 보살은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라는 ‘무주상보시’에서 무주상이 곧 무심의 뜻이다.

그런데 집착하지 않거나 관념 두지 않는 일이 말만큼 쉬운 일인가? 이는 인간이 무심[청정심]을 본래 갖추고 있건만 번뇌에 가려 중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송대의 대혜 종고는 원래 청정한 무심이지만, 수행을 통해 번뇌를 제거하라고 하였다.          

원문에서 ‘여여한 근본’이라는 내용을 보자. 여여(如如)란 본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 본연(本然)의 실상을 말한다. 여(如) 앞에 진(眞) 글자를 붙여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여여는 ‘여래’라고도 하는데, 있는 그대로가 곧 진실인 제법의 실상을 깨닫고, 진리 설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금강경’에도 ‘법상에 집착하지 말고, 여여하여 동함이 없어야 한다[不取於相 如如不動]’라고 하였다. 

‘지견을 추구하는 자는 쇠털처럼 많지만, 깨닫는 자는 뿔처럼 매우 드물다’는 부분을 보자. ‘쇠털’은 많다는 것으로, 학식이나 알음알이로 선을 추구하는 경우를 말한다. 반대로 ‘뿔’은 매우 적음을 상징하는데, 곧은 마음으로 끝까지 수행의 경지까지 이르는 자가 극소수라는 뜻이다. 즉 수행의 깊은 경지에 들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해 이론에 떨어지는 자가 많음을 말한다.

세상의 이치도 마찬가지이다. ‘실패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우직하게 한 길로 나아가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성공하는 자가 드문 것이다. 애플의 창립자 스티브잡스는 생전에 “Stay hungry Stay foolish[갈망하라, 우직하게 나아가라]”라는 말을 하였다. 황벽 선사의 말과 맞아 떨어진다. 수행길에서 알음알이를 내어 퇴보하거나 중단하지 말고 어리석을 정도로 꾸준히 밀어붙이는 것, 황벽선사의 간곡한 부탁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383호 / 2017년 3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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