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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 남수연 기자의 한국불교 비구니 리더
2. 안양 안흥사 회주 수현 스님“출가자이기에 무허가 법당 철거반원에게도 내 것 나눠줬죠”
남수연 기자  |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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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20  13: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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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 좀 웃어주세요.” 기자의 요청에도 요지부동이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변함없는 묵묵함. 수현 스님을 아는 이들의 표현 그대로다.

호랑이가 물어간 아이였다. 두 살배기 아직 말문도 트이지 않은 아이가 호구에 물렸으니 살아있으리라는 희망은 그저 부여잡고 있는 실오라기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온 산을 뒤졌다. 동네사람들까지 모두 나섰다. 그 소란에 호랑이도 겁을 먹었을까. 산허리 어딘가에서 아이를 찾았다. 사람들은 ‘호랑이가 버리고 간 것이 분명하다’ 했다. 놀란 가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호랑이가 ‘내 밥 도로 가져가겠다’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고 절을 찾아 산신기도를 올렸다. 그곳에 비구니 보성 스님이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출가득도
학인들이 탁발하던 강원서
양식비 없어 학업 접을 뻔
“밥·전기·물 걱정 없애겠다”
세납 서른여섯에 동학사 주지

무허가·시유지 안흥사 중창
청년·어린이 포교 요람으로
‘불교복지 개척’ 수식어 뒤
집착없이 정진하는 묵직함


10여년 후 보성 스님은 법주사 수정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호랑이밥이 될 뻔했던 아이는 그 사이 15살 단발머리 소녀가 돼 있었다. 어려서부터 왕래했던 보성 스님의 짐을 갖다 드리기 위해 수정암으로 갔다. 하지만 동짓달 쏟아진 눈에 발이 묶였다. “출가해.” 비구니스님들은 얼굴 동글동글한 단발머리에게 출가를 권했다. 그해 겨울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마음 한 구석 허전해진 소녀는 이내 결심을 굳혔다.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4년, 보성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안산수현(安山修賢) 스님의 출가인연이다.

▲출가 원력은 무엇인지.
“세상 안 태어난 셈 치고 부처님 가르침 공부하면서 살면 그것도 참 좋겠다 싶었다. 출가는 쉽게 한 편이다.”
이듬해 사미니계를 받고 1956년 계룡산 동학사에 개설된 ‘비구니불교전문강원’에 입학했다. 조계종 최초의 비구니전문강원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강원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학인들은 각자의 ‘양식비’를 탁발해야 했다. 스물한 살, 처음 나간 탁발은 만만치 않았다. 꼬박 일주일 동안 대전 시내와 주변 시골을 돌아다녔다. 동학사 돌아갈 차비도 마련하지 못했다. ‘이런 재주로 무슨 글을 배우랴. 선방 가서 참선이나 하자.’ 빈 걸망 매고 터덜터덜 동학사 초입에 다다랐다. 멀리 동학사가 보이자 참았던 설움이 밀려왔다. 돌아와서는 밥도 못 넘기고 울었다. 스님들이 나서 달래주어도 좀처럼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양식비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내가 하도 우는 바람에 경봉 강사스님께서 새로운 원칙을 만드셨다. 탁발이 힘든 사람은 공양주, 채공 등 소임 사는 것으로 양식비를 대신할 수 있게 됐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강원 체계가 아직 완비되지 않다 보니 대교를 마칠 때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중도에 포기하는 학인들도 많았다. 1966년까지 동학사 대교과 졸업생은 수현 스님 외에 딱 두 명뿐이었다. 10년을 공부하고 비구니계를 수지했지만 배움의 목마름은 계속됐다. 졸업하기 전 중강을 맡기도 했던 스님은 곧이어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졸업 후 스님에게는 전혀 뜻밖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학사 주지 소임이 맡겨진 것이었다. 1974년 세납 불과 서른여섯이었다.

▲주지 소임을 일찍 맡은 편이다.
“그랬다. 주지를 맡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러니 오히려 취임식을 해야 한다는 권유가 많았다. 동학사 가서 보니 여전히 먹을 것도 없고 불 땔 연탄도 없었다. 그래도 취임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임식을 하면 얼마라도 후원금이 들어올 테니 그것으로 손님들 식사는 대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취임식에는 총무원장이셨던 경산 스님,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 등 큰스님들이 많이 참석해 주셨다. 서울신도회장을 맡고 있던 박완일씨가 동학사까지 내려와서 축사를 해주고 갔는데 당시 형편에 차비 만원도 못줘서 보냈다. 아마 나이를 더 먹어서 주지를 했다면 그만뒀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주지를 맡아 전국에 소문이 났으니 앞으로 중노릇 안 하면 모를까, 하는 동안에는 ‘동학사 주지 4년도 못 살고 나온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을까봐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주지 소임을 맡으며 세운 원력은.
“학인들 배고프지 않고, 아무 때나 전기 켜서 책 보고, 마음 편하게 물 쓰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내 목표였다. 내가 학인으로, 중강으로 동학사에 10년을 살면서 그렇게 못해봤다.”

계룡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개발을 놓고 불교계와 마찰이 일었다. 찬성도, 반대도 있었지만 스님에게는 그 어느 쪽보다도 학인들이 우선이었다. 학인들이 ‘걱정 안하고공부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스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국립공원 개발이 진행되면서 동학사 전용 주차장이 확보됐고 학봉리에서 동학사 매표소까지 이어지는 ‘10리 벚꽃길’도 조성됐다. 그때 길가에 심은 벚나무가 지금도 봄이면 만개한다. 동학사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강원 학인들이 각자 부담하던, 그렇게 서러웠던 ‘양식비’를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됐다. 스님은 “제일 잘 한 일”로 첫 손에 꼽았다.

동학사 주지를 맡은 직후 안양 안흥사 주지까지 겸하게 됐다. 동학사 주지 취임 불과 두 달여 만에 은사스님이 입적하셨기 때문이다. 보성 스님이 창건한 안흥사 불사도 오롯이 수현 스님 몫이 되었다.

▲안흥사 도량은 정비가 돼 있었는지.
“원래 안흥사 터는 시유지에 개발제한구역이었다. 그런데 은사스님이 이곳에 터를 잡아 법당 하나를 지으신 것이다. 건물이 허가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동학사 주지 맡은 지 두 달 만에 은사스님이 입적하셨으니 말이 주지지 안흥사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주지 이름만 걸어놓고 몇 년을 그냥 보냈다.”

▲동학사 주지 소임을 마친 후 본격적인 불사가 시작된 것인가.
“78년 안흥사에 왔는데 그때까지도 법당이 무허가였다. 아침밥을 먹으려고 앉으면 철거반이 들이닥치곤 했다. 부수기 전에 사진 찍고, 부숴 놓고 사진 찍고. 그 사람들 일이니 못하게 할 수야 있나. 두고 보는 수밖에. 한 번도 박대하지 않고 음료수라도 대접하고, 가끔씩 시청에 국수대중공양을 하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심하게 부수지는 않더라. 그때 철거반원 중에는 안흥사와 가깝게 왕래하게 된 이들도 몇 있다. 그게 사람인연이다.”

▲허가 없는 불사가 쉽지 않았겠다.
“주지를 맡으면 불사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다 된다. 별스러운 것도 아니다.”

수현 스님에게 도량불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재불사였다. 동학사 주지였던 1977년, 조계종 총무원에서 스님과 재가신도들을 교육시켜 부여하던 ‘중앙포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또 동학사 강원에 ‘포교방법론’ 강의를 개설, 선진규 법사를 한 달에 한 번씩 동학사로 불러 강의를 열었다. 포교를 위해서는 스님들도 전문적인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어린이 포교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안흥사 취임 얼마 후 하와이에서 열린 무량사 기공식 참석을 계기로 미국을 방문했던 스님은 부모가 모두 한국인임에도 우리말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을 보고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됐다. 이는 곧 어린이 포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두 달여의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스님은 곧바로 안흥사에 어린이 여름불교학교를 열었다. 도량불사보다 더 시급한 어린이 포교, 인재 불사의 시작이었다. 새로운 인연은 그렇게 스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1981년 스님은 낙산어린이집 원장에 전격 발탁됐다. 조계종에서 처음 위탁 받은 국·공립 어린이집이었다. 당시 정부는 시범사업으로 전국에 다섯 개의 어린이집을 짓고 그 중 세 곳을 불교와 가톨릭, 개신교계에 하나씩 위탁하여 운영했다.

   
▲ 옛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지금의 안흥사는 상전벽해다. 시유지에 자리 잡은 법당은 산기슭 아래 무허가 건물이었다.

▲낙산어린이집을 맡게 된 계기는.
“오랫동안 나를 보아온 선진규 법사의 적극적인 추천이었다. 안흥사에서 어린이여름불교학교를 개설했던 경험도 어린이집 프로그램 운영에 큰 도움이 됐다.”

종단 최초의 위탁 시설이었던 만큼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도 컸다. ‘아이들 먹거리 만큼은 최고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안흥사서 서울 창신동을 오갔다. 버스에 기차를 갈아타며 매일 출퇴근하는 스님의 손에는 사중서 직접 담근 고추장, 된장, 간장에 공양 들어온 떡이며 과일 등 온갖 먹거리가 들려있었다.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들고 가는 스님은 무거운 줄도 몰랐다.

낙산어린이집은 창신동에서도 산꼭대기,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 산비탈에 빽빽이 들어선 영세민들의 주거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생계를 꾸리는 가구가 태반이었다. 부모들이 모두 돈벌이에 나선 동네서 어린이집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을 맡아주는 탁아소 겸 유아원이었다. 고작 3000원의 식비를 받았지만 이것도 버거운 부모들이 허다했다. 타 시설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아이들에게 하루 두 개씩 나눠 주는 우윳값도 안 되는 돈이었다. 운영비의 30%는 종단에서 지원했고 정부 보조금도 있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스님의 몫이었다. 월급뿐 아니라 주머니에 있는 돈도 어린이집에 털어 넣기 일쑤였다.

“종단에서 믿고 맡겨 줬으니 감사하기도 했고 최선을 다하려 노력한” 결실로 낙산어린이집은 전국 유아교육 시설의 모범이 되었다. 8년간 어린이집을 자리매김 시키고 곧이어 목동청소년회관 사무국장 소임을 맡아 개관부터 운영까지 4년여의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 후로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 이사, 군포매화종합사회복지관장으로 불교복지사업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불교사회복지의 선두주자’라는 묵직한 수식어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복지시설 수탁은 미개척분야였다. 
“능력도 없고 실력도 없지만 한 가지 자랑할 게 있다면 판단력이었다. 어떤 일이든 들여다보면 이것이 될 일인지 안 될 일인지, 좋은 일인지 그렇지 못한 일인지가 판단된다. 복지활동을 시작할 때는 해본 사람도 없었지만 나처럼 무리하게 덤비는 사람도 없을 때였으니 그런 재주도 도움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일 맡을 사람이 정해지면 그 사람을 믿고 맡겨야 한다.”

10년간 맡았던 군포매화종합사회복지관의 관장 소임은 2007년 내려놓았지만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 이사인 수현 스님의 복지활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만두 공양이 들어 왔길래 연꽃마을에 보내 어르신들에게 대중공양 했다”는 스님에게 복지란 ‘내 것을 나누는 모든 활동’이다.

그런데 이렇게 바깥 활동이 많았으니 안흥사는 어땠을까. 연꽃마을 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안흥사였다. 절이 크고 살림이 넉넉했다면 연꽃마을의 활동에도 도움이 될 텐데 안흥사 살림은 그때까지도 넉넉하지 못했다. 이사 소임을 맡고도 힘을 보태지 못할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시유지였던 땅을 매입하기 전까지 매년 토지 사용료를 내야 했고, 매입이 이뤄진 후에도 대웅전을 비롯한 일주문, 강당 및 요사채 불사 등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불사가 아니다. 도량불사가 산적해 있는 와중에도 스님은 안흥사 주변 이웃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안양지역 청년 불자들의 모임인 ‘연꽃마음회’가 법회를 이어갈 수 있도록 장소를 내주었고 매년 어린이여름불교학교도 지속해 나갔다. 판자촌이 즐비했던 안흥사 주변의 이웃들을 돌아보는 것도 소홀할 수 없었다.

드러나지 않지만 멈춤없는 원력이 있었기에 불교복지의 역사를 개척하는 와중에도 안흥사를 도심 속 포교도량으로 우뚝 세울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두 시간여가 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스님으로부터 좀처럼 안흥사 불사에 대한 감회를 듣기가 쉽지 않다. “내가 했다는 생각은 없다”는 말씀만 돌아올 뿐이다.

   
▲ 시유지를 매입하고 대웅전 큰기둥을 다시 올리던 날 합장한 불자들의 함박웃음은 지나온 시절의 고단함 위에 핀 꽃이다.

▲그래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는 일이 있다면.
“동학사 학인들 양식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게 한 것, 통일가사추진위원장 맡아 종단 가사 체계를 정비한 것, 그리고 낙산어린이집을 정착시킨 정도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누구든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른 그것을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붙잡고, 내가 해야 한다는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안흥사도 이제는 주지를 맡은 상좌스님이 잘 이끌어가리라 생각한다.”

애써 답을 얻으려 했던 질문들이 부끄러워진다. 내가 했다는 생각도, 내 공덕이라는 자랑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집착도 없다. 그저 부처님 제자 된 길을 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 속에서 어려운 이들의 손을 잡았고, 부족한 곳에 주춧돌이 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쳐보였다. 그것이 스님의 복지고 불사고 포교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무뚝뚝해도 말보다 실천이 먼저

내가 본 수현 스님

선진규 봉화산 정토원장=수현 스님은 동국대 재학시절 내가 강의했던 포교방법론을 수강했다. 그때도 포교에 관심이 많아 동학사 강원에 포교 강의를 개설하기도 했다. 1981년 불교계서 낙산어린이집을 위탁받은 후 원장을 물색하기에 수현 스님을 추천했다. 동학사 주지 소임을 끝낸 직후였다. 많지 않은 세납인데도 카리스마가 있었고 무엇보다 일 처리에 조금의 사심이나 빈틈이 없었다. 불교계에서 처음 위탁받은 복지시설 운영에 적임자라고 생각됐다. 2005년 작고한 아내(고 김기업 여사)가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복지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안사람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포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어 확고한 신념과 추진력을 보였다. 불교복지의 시대를 열고 평생을 포교에 매진한 보배 같은 스님이다.

전병오 도서출판 세연 대표=젊은 시절 대한불교청년회에서 활동했는데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는 어린이·청소년과 청년 포교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당시 스님은 이러한 활동의 중심이었고,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당시만 해도 안흥사는 사찰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사격이 미약한 때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여력이 생기면 주변의 어려운 이웃이나 단체에 나눠주기 바빴다. 그러니 언제 불사를 하시려나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좋은 꽃이 향기를 퍼트리듯 자연스럽게 스님 주변으로는 좋은 인연들이 모이게 되었다. 사실 스님은 달변도 아니고 무엇을 좋아보이게 포장해서 내보일 줄도 모른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색을 안 하고 자랑할 일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좀 무뚝뚝해 보일지 몰라도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가 스님의 진심이다. 말이 앞서기보다는 실천으로 보여주는 포교사, 그것이 40여년 보아 온 스님의 참모습이다.

 

[1384호 / 2017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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