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사 어린이법회 맡으며
기타 배워 어린이들 지도
당시 대각사 법회는 또래들에게 인기였다. 친구들과 만나 노래를 배우고, 사회생활을 하던 선배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내가 어린이법회 지도법사가 된 것은 당시 대각사 어린이법회 지도교사였던 박용하 관장 덕분이었다. 관장님은 나를 볼 때마다 “학교 졸업하면 꼭 어린이법회에 와서 지도교사를 해 달라”고 주문처럼 말했고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청년회도 거치지 않은 채 곧장 어린이법회 지도교사가 됐다.
처음 법회에 갔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법회가 끝난 뒤 총무 언니는 다짜고짜 나를 대각사 앞 악기점으로 데리고 갔다. 오늘부터 기타를 배워서 어린이들에게 가르쳐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장 기타를 담당하던 남자 교사가 군대를 가게 됐다는 설명에 일주일간 기타를 배운 뒤 혼자 독학을 하다시피해서 어린이들 앞에 섰다. 기타는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노래하고 기타 치는 즐거움에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무렵 나는 대학입시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재수를 권했지만 미련 없이 취업을 선택했다. 회사에서 퇴근하면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알차게 보내기 위해 레크리에이션 학원을 다녔다. 안타까움도 많았다. 유명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마다 기독교 색깔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레크리에이션 강습회에서 배운 노래와 율동을 불교식으로 바꾸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개사에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직접 곡을 만드는 게 가장 빠른 길임을 절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붙이던 습작을 꺼내어 찬불동요로 재창작했다.
그렇게 낮에는 일, 저녁에는 레크리에이션, 주말에는 어린이법회를 병행하던 중 영주암유치원의 제안을 받아 근무지를 옮기게 됐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유치원 정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를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구성해 척척 일을 했지만, 정작 내게는 보육교사 자격증이 없었다. 방송통신대 교육학과에 문을 두드렸고 차근차근 공부의 길을 밟아 나갔다. 중앙승가대에서 6개월 과정의 보육학과가 개설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등록해 1기 수료생이 됐다.
공부를 할수록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어린이들에게 불교를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꿨다. 어린이법회 지도교사는 온전히 봉사였기에 결혼, 직장, 출산 등의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그만뒀다. 영주암유치원에서 근무한 지도 어느덧 5년, 좀 더 알찬 법회를 위해서는 연속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즈음 한 신문에서 어린이불교교육연구소 유급 연구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내가 할 일이라는 확신이 섰고 나와 더불어 어린이 포교를 하던 이수안씨까지 연구소의 정식 직원이 됐다. 한국 불교계에서는 어린이 포교 관련 첫 유급직이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1384호 / 2017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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