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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중

나 고집 않고 조건 따라 묘용 바꾸는 능력이 불성

▲ ‘무정설법(無情說法)’고윤숙 화가

불성(佛性)이란 ‘열반경’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말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부처의 성품, 즉 부처가 될 능력을 뜻한다.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대반열반경’인데, 이는 사람의 본성이 정해져 있다면서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주어진 일을 하라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반대하여 모든 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음을 설파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그러면서도 일천제(一闡提)는 제외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일천제란 세속적 욕망이 강한 자로서 선근을 단절하여 불교를 믿지 않고 심지어 방해하는 자를 뜻한다. 이런 불성 개념의 배경에서 여래가 될 잠재적 능력을 뜻하는 ‘여래장’ 사상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처럼 구체적인 형상을 갖는 불성의 개념은 공사상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아무런 형상도, 선악의 도덕적 성품도 없는 공 자체로, ‘승의공’이나 ‘법성’ 같은 개념으로 발전해간다. 그에 따라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는다는 생각은 더욱더 강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좀 더 나아가 산천초목의 무정물까지도 불성을 갖는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공성’은 조건 따라 다른 본성 가질 능력
무상한 자연도 자기 고집 않고 늘 변화
유정무정 모두 이런 조건서 큰차이 없어

사실 부처가 될 능력을 뜻하는 한, 불성 개념은 잣나무나 국화꽃 같은 무정물은 물론 개나 고양이, 심지어 싸가지 없는 악인들에게서 발견하긴 쉽지 않다. 그래서 하택 신회는 무정불성론을 비판하면서 “어찌 푸른 대나무가 공덕 있는 법신과 같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노란 국화꽃이 반야의 지혜와 같다고 하겠는가?” 반문한다(팡리티엔, ‘중국불교철학’, 3, 36). 뿐만 아니라 “유정에겐 불성이 없고, 무정에겐 불성이 있다”는 파격적 주장을 했던 백장도 목석이나 대나무, 국화꽃 같은 것 중에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 중에 수기를 받고 성불했다는 자를 경전에서 볼 수 없는 까닭은 무언인가?”를 묻는다(‘마조록/백장록’, 123) 이렇게 따지면 단지 무정물뿐 아니라 개,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어느 경전에서도 그들이 부처님의 수기를 받아 성불한 경우를 볼 순 없기 때문이다.

반면 남양 혜충은 개 고양이나 대나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명이 없는 무생물 또한 불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어느 선객과의 매우 긴 토론의 일부다. 선객이 묻는다.
“어느 것이 부처님의 마음입니까?”
“담, 벽, 기왓장이니라.”

여기선 불성을 ‘부처님의 마음’이란 말로 대신 물었다. 그에 대해 벽과 기왓장을 들어 답을 하자 선객은 ‘열반경’을 인용하며 ‘마음’과 ‘불성’이 같은 것이냐고 되돌려 묻지만, 정작 묻고 싶었던 것은 무정물에 ‘마음’이, 즉 ‘정식’이 있냐는 말이었을 게다. 그걸 어느새 알아채고 혜충은 이리 답한다.
“만일 무정이면 불성도 없다고 집착한다면 경에서도 삼계가 마음뿐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대 자신이 경을 어긴 것이다.”

삼계가 마음뿐이라면, 삼계를 이루는 무정물 역시 마음 말고 뭐가 있겠냐는 말이다. 이렇게 무정과 유정을 가르는 경계를 어느새 뛰어넘는다. 그러나 선객은 지지 않고 다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데, 혜충은 한술 더 떠 놀라운 말을 한다.
“무정도 심성이 있다면 설법을 알아듣겠습니다.”
“그들이 치열하게 항상 설법하고 있는데, 잠시도 쉬지 않는다.”

무정물이 마음이 있다면 설법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뿐 아니라 설법을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무정설법’이다. 선객은 다시 묻는다.
“어째서 저는 그걸 듣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대 스스로가 듣지 않는 것이다.”
“누가 듣습니까?”
“부처님이 들으신다.”

선객이 무정의 설법을 자신은 못 듣지만 혜충에겐 듣느냐고 묻자, 혜충도 못 듣는다고 답한다.
“내가 듣는다면 나는 부처님과 같아져서 그대는 내가 하는 설법을 듣지 못하게 된다.”
중생 또한 듣는다면 중생이 아니기에 듣는다고 할 수 없다는 말에 선객은 다시 묻는다.
“무정이 설법한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가 있습니까?”
“보지 못했는가?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국토가 설법하고 중생이 설법하고, 삼세의 일체가 설법한다’ 하니, 중생이 유정뿐이겠는가?”(‘경덕전등록’ 권 28; 월운 역, ‘전등록’ 3권, 동국역경원, 297~298)

불성이란 득도하여 부처가 되는 능력이라고 하던 것을 진여의 공성 그 자체라고 바꾸어버리고, 역으로 부처를 그러한 공성에 의해 재규정한 것은 불성이나 부처의 관념을 근본적으로 혁신한다. 일체중생이 불성을 갖는다는 말은 사실 이럴 때에만 타당하다. 이는 중생으로 명명되던 인간은 물론 개, 고양이, 그리고 대나무와 기왓장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게 하며 다른 관계를 맺게 만든다. 사람들 사이에서마저 지울 수 없게 강하게 그어놓은 차별의 경계선뿐 아니라 사람과 동물,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 간에 그려놓은 차별의 경계상 모두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잠재적으로 부처이듯, 개나 고양이, 대나무나 기왓장도 잠재적으로 부처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공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무정불성에 대해서도 빠르게 수긍한다. 공성에 대한 이론에 기초하여 성립한 삼론종이 중국의 다른 어떤 종파보다 빨리 무정불성을 받아들였다는 점, 선종 안에서도 무정불성론을 가장 빨리 수용한 우두종이 삼론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이 그것을 시사한다. 무정불성에 대해 백장이나 대주 혜해가 거리를 두었던 것에 반해 석두나 그의 계보에 혹하는 운암 담성이 무정불성론을 쉽게 받아들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공성을 뜻하는 고양이와 대나무의 불성이란 대체 무엇일까? 공성이란 불변의 자성(自性)이 없음을 뜻하지만, 그건 역으로 주어진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가질 능력을 뜻한다. 즉 조건의 변화에 따라 자신을, 심지어 본성마저 바꾸어가는 잠재적 능력이다. 소는 어떤 연기적 조건에 처하는가에 따라 밭을 가는 일꾼이 되기도 하고 먼 길 가는 아이를 태우고 가는 친구가 되기도 하며 느긋하게 풀을 뜯는 존재가 되기도 하고 인간의 배를 채우는 고기가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조건을 미세하게 잡으면 아침엔 여물을 먹고 오전엔 밭을 갈다가 오후엔 마차를 끌다 저녁땐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하루 안에서지만 달라지는 조건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존재다. 자성이 없어 공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좀 더 세밀하게 나누어 말해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소뿐 아니라 개나 고양이도 그렇고, 대나무나 국화꽃도 그렇다. 식물들도 변화되는 조건을 지각하여 그에 맞추어 싹을 내고 잎을 무성히 내고 낙엽을 떨구며 자신의 신체를 바꾸어간다. 무상한 자연, 무상한 조건의 변화에 따라 특정한 ‘자기’의 상(相)을 고집하지 않고 무상하게 바꾸어간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이러하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이렇듯 조건에 따라 묘용을 바꾸어가는 능력, 그것이 곧 불성이다.

무정물 또한 마찬가지일 게다. 벽돌은 어떤 조건과 만나는가에 따라 벽이 되기도 하고 화로가 되기도 하며 짱돌이 되기도 한다. 강은 조건에 따라 사람의 갈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배를 띄우는 수로가 되기도 하며, 사람이 빠져 죽는 함정이 되기도 하지만 씻고 헤엄치는 곳이 되기도 한다. 다만 유정물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런 조건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뿐이다. 이것이 무정불성을 인정하기 어렵게 하는 이유일 게다. 그러나 유정물도 인간도 자신이 살 조건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음을 안다면 그 차이는 생각보다는 크지 않을지 모른다.

이 모두는 어디 감추어져 있는 게 아니라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그렇게 불성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불성은 당당하게 뚜렷이 나타나 있으나 모양(相)에 머무는 중생은 보기 어렵다. 중생 그 자체가 무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나의 얼굴이 어찌 부처와 다르리요.”(‘벽암록’, 중, 224) 불성에 따라 사는 법이 불법이라면, 항상 그렇게 불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유정물도 무정물도 언제나 이렇게 불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설법을 듣지 못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이 온몸으로 말하지만 우리가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규정, 가령 소는 고기고 개는 친구지 하는 규정에 우리 눈과 귀를 가려, 거기서 벗어나는 건 보지 않고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망정 없는 자”만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자기가 부여한 규정에 머물지 않는 부처님만이 그들의 설법을 듣는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solaris0@daum.net

[1384호 / 2017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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