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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새봄에 듣는 숲의 설법

기자명 최원형

북풍한설 훑고 지나간 그 자리에 생명이 움튼다

깊은 겨울을 털고 숲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이즈음 나무줄기에 귀를 대면 물오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어느 분야에서 한껏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이를 두고 ‘물이 올랐다’고 비유한다. 그러니 ‘물오르다’는 나무에서 배운 표현이 아닐까 싶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 나무는 동해를 염려해서 줄기 속 수액을 비운다. 날이 풀리는 기운이 감지될 무렵 나무는 겨우내 비워두었던 줄기로 물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2월이 끝나갈 즈음 단풍나무 줄기에 부리로 상처를 내고 흘러나오는 수액을 먹던 박새를 만난 적이 있다. 흘러내린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봤더니 단맛이 났다. 곤궁해진 계절 끝자락에 만난 단풍나무 수액이 박새에겐 얼마간 요긴했으리라. 물이 오르니 나뭇가지에 달린 잎눈이며 꽃눈이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른다. 한결 순해진 바람은 발걸음을 자꾸 동네 뒷산으로 이끈다. 이른 봄 숲길을 걸으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어디선가 환한 꽃봉오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일 게다. 이런 기대에 가장 먼저 화답해주는 나무가 있다. 바로 생강나무다. 새봄에 나온 잎사귀를 살짝 비벼 냄새를 맡아보면 생강냄새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실 숲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 치자면 개암나무이지만 암, 수꽃이 나뉘어 피는데다 암꽃이 워낙 작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니 생강나무 꽃이 첫 소식이라 할 만 하다. 생강나무는 잎보다 노랑 빛깔 꽃을 먼저 보여준다. 작은 꽃들이 우산처럼 둥글게 모여 핀 생강나무 꽃을 보며 봄의 안착을 확인한다.

생강나무 꽃 보며 봄의 도래 확인
날이 추워 거실로 옮긴 화분에선
줄기 번성하지만 꽃 피우진 못 해

적연하던 숲이 깨어나며 슬그머니 봄이 건너오는 이 시기가 참 좋다. 보드레한 공기로 채워진 숲길을 걷다보면 얼음 풀린 계곡 따라 나지막이 흐르는 물소리를 만나게 된다. 봄비라도 흩뿌린다면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린 나뭇가지마저 정겹게 다가올 것이다. 물방울이 앉았던 그 자리에서 움이 트고 무성한 잎을 달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계곡 물웅덩이에서 산개구리 알을 발견한 날은 또다시 시작되는 생명의 순환을 들여다보느라 시간의 흐름을 잊곤 한다. 작은 잎눈, 꽃눈을 열어젖히고 여린 잎이며 꽃이 나오는 모습은 경이롭기만 하다. 떡갈나무의 어린잎을 이번 봄에는 꼭 들여다보길 권한다. 그 뻣뻣한 잎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어여쁘게 은빛 찬란한 잎을 만나게 될 테니까. 아직 덜 부푼 겨울눈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담겨있을 모습을 상상하는 일도 즐겁다. 마치 장에 다녀오신 어머니 손에 들린 보따리 속이 궁금한 아이의 심정이 그러할까? 맹위를 떨치던 추위도 높아진 태양의 고도 아래 맥없이 뒤안길로 사라지는 걸 보며 무상함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곧 벌어질 꽃 잔치 역시 화무십일홍이라는 진리에서 예외일 순 없다. 일어나고 스러지는 변화무쌍함 속에서 오직 변치 않는 진리 하나, 그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까치둥지만 덩그러니 이고 서 있는 나목이, 여린 잎을 막 내밀기 시작한 잎눈이, 발자국 소리에 푸드득 날아오르는 어치가 들려주는 설법이다.

화사한 꽃이 예뻐 게발선인장 줄기 하나를 얻어다 키우던 때가 있었다. 추운 겨울이면 화분을 따뜻한 거실로 옮겨놓으며 지극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줄기가 새끼를 치며 날로 번성하는데도 도무지 꽃을 피울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꽃을 보겠다는 마음을 접고 겨울이 와도 그대로 추운 베란다에 내버려뒀다. 말 그대로 방치한 거였다. 어느 날 베란다를 오가다 뭔가 눈에 띄어 힐끗 들여다본 게발선인장이 줄기마다 꽃봉오리를 달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사물의 법칙이 내 생각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위를 겪어야 꽃이 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저 꽃만 보고 싶어 했던 내 무지가 게발선인장이 꽃 피울 때를 가로막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고 얼마나 부끄럽던지.

마른 낙엽이 숲 바닥을 뒹굴며 서걱거릴 때면 그 소리마저 을씨년스럽던 곳, 북풍한설이 훑고 지나갈 때만 해도 다시는 생명이 돌아올 것 같지 않던 그곳에 또다시 생명이 움트고 있다. 시련의 파도를 넘어선 인내가 이뤄놓은 게 봄이 아닐까 싶다. 역경을 이겨낸 후에야 꽃을 피운다는 걸 배운다. 겹겹이 비늘 옷을 입고 겨울눈 속에서 침잠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어여쁜 잎이 된다는 진리를 또한 숲에서 배운다. 그래서 사바세계는 참고 견디는 세계라 했던가? 봄의 문턱에 유정, 무정의 설법이 가득한 숲길 한번 걸어보는 건 어떨까? 딱따구리가 나무줄기를 두드리는 소리며 집짓고 새 생명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새들의 합창은 설법의 덤이 될 것이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384호 / 2017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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