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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

“삶의 의미 발견하면 그 어떤 고통도 견뎌낸다”

▲ 그림=근호

1941년의 어느 날, 미국 대사관은 빅터 프랭클에게 전화를 걸어 이민 비자를 찾아가라로 통보했다.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간 시점이었다. 음산한 기운이 점점 다가오고 있던 그때, 유대인인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로스차일드 병원의 신경과장이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프랭클
태도 결정은 자신이 하는 것
삶은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스스로 찾을 때 인간성 실현

미국으로 간다면 삶이 보장되는 상황. 문제는 부모님이었다. 비자는 자신과 아내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미국으로 간다는 것은 노부모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숙고 끝에 그는 부모와 함께 빈에 남기로 결심했다.

유대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령이 속속 시행되었다. 그들은 가슴에 유대인임을 표시하는 노란 육각 별을 달아야만 했고, 공직에 있는 사람은 직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결혼을 하려면 관공서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고, 전차와 택시를 타는 것이 금지되었다. 빅터는 의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1942년 9월, 빅터 프랭클은 나치에 의해 가족과 함께 슈페를 김나지움에 소집되었다. 소집된 모든 유대인들은 머리를 빡빡 깎였다. 며칠 뒤, 그와 그의 가족이 포함된 1300명의 유대인들이 화물차에 실려 체코슬로바키아 북부에 있는 텔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 도착했다.

극한의 노동을 요구하는 시설에 수용된 사람이 병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6개월 뒤, 빅터의 아버지 가브리엘이 여든한 살 고령을 견디지 못하고 굶주림과 폐렴으로 죽었다. 1944년에는 빅터의 아내인 틸리의 어머니가 나치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그해 10월, 빅터 프랭클은 이송 대상자로 분류되었다. 이송될 다른 곳은 이곳보다 더 나쁜 곳일 가능성이 높았다. 탄약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그의 아내 틸리는 건강한 편이어서 최소한 2년 동안 다른 곳으로 이송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있었다.

그는 틸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와 헤어지기 싫었지만 빅터는 틸리에게 자신을 따라 가겠노라고 자원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틸리는 남편과 함께 가기를 강하게 희망했다. 그녀는 이송을 자청했고, 나치는 그녀가 남편과 같은 열차로 이송되는 것을 허락했다.

기차가 출발했다. 수감자들은 자신들의 행선지가 아우슈비츠가 아니길 간절히 바랬다. 400킬로미터를 달린 끝에 열차가 멈추자 기차 앞칸에서 비명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들려왔다. “아우슈비츠다!” 가스실, 화장장, 살육, 고문…. 갖가지 끔찍한 말로 알려진 죽음의 구역에 도착한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빅터 프랭클은 남녀를 선별하는 장소에서 아내를 꽉 껴안았다. 떨어지지 않는 손을 놓으며 빅터가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 남아야 하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틸리는 알고 있었다. 빅터는 아내가 경비병들에게 몸을 허락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경우, 그렇게 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사흘 뒤, 그는 다시 화물열차에 실려 다하우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혹심한 노동에 시달리며 그는 고통의 의미를 물었다. ‘이렇듯 고통 받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야만 하는 삶의 목적이 과연 있는 것일까?’ 어두워져오는 저녁, 땅을 파며 이렇게 묻고 있는 그의 내면 깊은 데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그가 얼굴을 쳐들었을 때, 그의 눈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 하나가 들어왔다. 빛은 멀리 떨어진 지평선 위의 한 농가에서 비쳐오고 있었다.

1945년 4월27일, 빅터 프랭클은 독일에 승전한 미군에 의해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다. 이후 그는 ‘삶의 의미’를 전도하는 심리학자이자 철학자로 살았다. “삶에는 의미가 있다”고 그는 한결같이 말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또 말했다.

고결한 인간이 되느냐 동물처럼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고 프랭클은 말한다. 인간에게는 시련과 죽음조차도 빼앗아갈 수 없는 태도 결정의 자유가 있다고, 그 결정에 의해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의미있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프랭클은 나치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 나치 경비병은 그에게 빵 한 덩어리를 나눠 주었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 그가 감동한 것은 배고픔을 면해서가 아니라 ‘그가 빵과 함께 나에게 준 인간적인 그 무엇’ 때문이었다.

튀르크하임 수용소의 소장이 자기 돈으로 약을 사서 병든 수감자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그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유대인 수감자들은 미군에게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때까지 소장을 숨겨 주었다.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좋은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나쁜 사람으로만 이루어진 집단은 없다. 어떤 집단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법이다.”

선가(禪家)는 철저한 신심으로 화두(話頭)를 들어 간절하게 의심하라고 말한다. 의정(疑情)이 눈앞을 딱 가로막아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밀어붙인 끝에야 검은 칠통(漆桶)이 타파되는 견성(見性) 경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두가 어찌 선가의 독점물이겠는가.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치열하게 삶의 의미를 물었던 빅터 프랭클의 사례에서 나는 서양 문화권에서 어떻게 화두가 생겨나고 풀리는지를 본다.

삶은, 나에게 주어진 질문이다. 나는 그 답을 알고 싶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능력이 답을 알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부처님이 찾으신 답을 내 것으로 삼는다.

그러나, 부처님이 찾으신 그 답은 참조할 수는 있어도 빌려 쓸 수는 없도록 되어 있다. 삶은 제각각 자기 것이라고, 그러므로 저마다 저 자신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삶에 대한 빅터 프랭클과 부처님의 답이 온전히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두 답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삶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때 진정한 인간성이 실현된다고 보는 점에서 두 답은 같다.

나는 유대교인이 아니고, 프랭클은 불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의 나라에서는 유대교인과 불교인이 변별되지 않는다. 변별되는 것은 그에게 그 나름의 삶의 의미가 있는가와, 그 의미가 나와 남을 이익되게 하는가뿐이다.

나에게는 삶의 의미가 확립되어 있는가. 있다면 그 답은 나와 남을 이익되게 하는가. 없다면 왜 없는가. 어떻게 확립해갈 것인가. 빅터 프랭클은 부처님과 선가의 스승들과 함께 나에게 그것을 묻는다.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384호 / 2017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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