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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황룡사 장육상의 제작지

기자명 주수완

불상조성 이뤄진 문잉림,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 황룡사지 금당터에 남아있는 장육상의 대석. 전체 길이는 3.15m, 가운데 둥근 홈의 지름만도 1.6m에 이른다.

황룡사 금당에 봉안되어 있었던 신라 3보의 하나인 금동장육상은 진흥왕대인 574년에 완성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불상은 인도의 아쇼카왕이 만들려고 했던 것이었으나 이루지 못하자 불상을 만들려던 금동재료를 배에 실어 바다로 떠나보냈고, 이 배가 신라에 도착하여 진흥왕이 거둬 완성한 것이라 한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 불타버린 이 불상의 복원적 고찰에 대해서는 2015년 3월 ‘쟁점, 한국불교미술사’ 연재에서 다룬바 있다. 이번에는 그 불상이 어디서 제작됐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장육’이란 1장 6척의 준말
5.6m 이르는 장대한 규모

엄청난 양 구리확보 관건
조금씩 부어 단계별 완성

접착력 낮아 옮기면 파손
불상 조성 뒤에 법당 지어

장육상은 밖에서 주조돼
황룡사 대웅전에 옮겨져

불상조성 장소 문잉림은
성소 아닌 단순 장작 제공

토착신앙집단 성소쯤으로
불교 위해 결국 헐렸을 것

 ‘장육상’의 ‘장육(丈六)’이란 1장6척의 준말이다. 1장이 10척이므로 16척인 셈이다. 지금은 1척이 30㎝이므로 16척이면 480㎝가 된다. 하지만 과거에는 1척의 길이가 시대마다 달랐다. 짧게는 22㎝에서부터 길게는 35㎝까지 다양했다. 그래서 설계에 어떤 길이의 ‘척’이 쓰였는지를 알면 그것이 언제쯤 만들어졌는지 추정하는데에도 도움이 된다. 연구자들은 황룡사 장육상에 35㎝가 1척이었던 고구려척이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황룡사가 건립되었을 당시의 건물터를 보면 35㎝를 1척으로 하는 고구려척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높이는 5.6m에 달했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570년대에 이 거대한 불상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광화문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 높이가 6.5m인데, 워낙 높은 곳에, 또한 워낙에 개방된 공간에 설치되어 그 크기가 실감이 가지 않지만, 바로 옆에 사람이 서있는 사진을 보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비록 황룡사 장육상은 이보다 1m쯤 작았지만, 그것이 서기 500년대의 일임을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이순신 장군 동상 그 이상의 작업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주조하는데 들어가는 구리를 확보하는 일은 1960년대에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군대에서 나온 탄피를 녹여서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후에도 구리를 구하기 힘들어 구리가 구해질 때마다 부분적으로 주조하여 용접해야할 정도였다고 하니, 신라시대에 이에 버금가는 상을 만드는데 필요한 구리를 대량으로 한꺼번에 조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장육상에 들어간 재료를 아쇼카왕이 인도에서 보내주었다는 설화는 아마도 진흥왕이 구리를 확보하기 위해 어디선가 수입해왔다는 사실을 미화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 1968년 무렵, 6.5m 높이의 이순신 장군 동상 점토원형 옆에 선 조각가 김세중.

여하간 구리는 어떻게 구했다 하더라도 과연 이를 어떻게 주조했을까? 일단 가장 간단한 방법은 큰 불상을 여러 개로 나누어 주조한 다음에 이를 하나로 붙이는 방식이리라 추측하기 쉽다. 그러나 우선 삼국시대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용접기술이 없었다. 용접은 쇠를 쉽게 녹여 이어붙일 수 있는 용접기가 있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당시에는 고작 납땜 정도의 기술만 있었는데, 납땜은 접합력이 약하기 때문에 무거운 주조물을 납땜으로 붙여놓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부분적으로 나눠서 제작한 주조품을 서로 결합할 때 정확히 크기가 들어맞도록 만드는 것도 당시로서는 사실상 실현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주조물은 냉각되면서 크기가 수축되기 마련인데, 아무리 처음에는 정확히 크기를 맞춰 제작했더라도 부분적으로 주조하는 조건에 따라 수축비율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일치시키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때문에 불상이 아무리 거대하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하나로 이어붙여 만드는 방법 밖에는 없다. 대신에 녹은 구리를 주물틀에 한번에 붓는 것이 아니라 조각을 한층한층 단계별로 나누고, 맨 아래에서 부터 차례로 주조하며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도 각 부분들이 완전히 접합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미 주조된 아랫단 위에 쇳물이 녹아들어가면서 그 윗단을 형성하기 때문에 부분들이 딱 맞게 맞물린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실제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황룡사 장육상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러나 이 방법으로 주조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조건이 있다. 불상이 봉안될 바로 그 자리에서 주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렇게 만들면 비록 부분들이 서로 긴밀하게 서로 엮여있기는 하더라도 완전한 용접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이 불상을 어디론가 옮기려고 한다면 주조 단계별 마디마디가 결국은 떨어져 나가고 말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불상을 만들려고 한다면 절을 짓기 전에 먼저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법당을 지어야 한다.

▲ 높이가 16m에 달하는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대불의 제작과정 상상도. 불상 전체를 만든 다음 아래서부터 단계적으로 쇳물을 붓는데, 그림에서는 어깨 높이에서 쇳물을 붓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황룡사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황룡사는 이미 569년에 완성되어 있었다. 불상을 주조하기 위해 있던 건물을 모조리 허물고 불상을 세울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결론적으로 장육상이 황룡사에 봉안되었던 것을 알고 있지만, 원래는 완성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거대한 불상을 일단 주조해보고, 만약 성공하면 그 다음에 어디로 옮겨 봉안할지가 결정될 사안이었다. 더구나 ‘삼국유사’는 장육상을 만든 장소가 황룡사가 아닌 ‘문잉림(文仍林)’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장육상은 층층이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황룡사 현장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문잉림이라는 어떤 장소에서 주조되어 옮겨온 것이 틀림없다. 결국 이렇게 다른 장소에서 만들어서 옮겨오려면 하나로 이어진 주조품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 역사를 이룬 ‘문잉림’은 어디였을까? 아쉽게도 현재 경주에서 문잉림으로 알려진 숲은 없다. 이 숲은 장육상 주조 이야기 외에 ‘삼국유사’의 ‘혜통항룡(惠通降龍)’조에 또 한번 등장한다. 고승 혜통은 문무왕대에 활동한 밀교승인데, 중국 당나라의 무외삼장(無畏三藏)을 사사했다. 그러다 스승을 대신해 이 밀법으로 황실 공주 병의 원인이 되었던 교룡을 쫓아내었는데, 이 교룡이 복수를 위해 신라로 건너와 문잉림에 머물며 사람들을 해쳤다. 이에 정공(鄭恭)이 신라에서 찾아와 혜통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혜통이 665년 신라로 돌아와 이 용을 쫓아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이 자신을 고자질한 정공을 원망하여 정공 집 앞의 버드나무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문잉림은 정공의 집 근처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등장했다.

그럼 정공의 집은 어디였을까? 정공은 신문왕릉을 조성할 때 토지 일부가 수용되었던 모양인데, 이를 거부하다 죽임을 당했다. 신문왕릉의 위치는 현재 낭산 자락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지의 동편에 있는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곳은 이미 신유림으로 널리 알려진 숲이기도 하다. 문잉림은 신유림 옆에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가정은 문잉림이 정공의 집 근처에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또한 신문왕릉의 위치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이 많아 단정하기 어렵다. 특히 혜통이 문잉림에서 기껏 용을 쫓아냈는데, 바로 옆집 버드나무에 숨어들었다는 것도 조금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 어떤 연구는 문잉림의 위치 자체보다는 문잉림이라는 숲에서 불상조성이 이루어진 배경 그 자체를 고찰하고 있다. 경주의 신성한 숲이었던 계림, 천경림, 신유림처럼 문잉림 역시 신성한 숲이었고, 불상의 신성함을 더하기 위해 그곳이 특별히 제공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전에 다룬 적이 있는 아도화상의 어머니 고도령은 신라에 과거불과 연관된 7곳의 절터가 있다고 했는데, 그중에 천경림, 신유림과 같은 숲이 포함되어 있다.

▲ 중국에서 그려진 대형청동불 주조과정 상상도. 여기서는 인공적으로 언덕을 쌓아가며 작업하고 있지만 황룡사 장육상은 문잉림의 자연구릉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미술사학자의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고찰 이전에 먼저 염두에 두어야할 부분이 있다. 문잉림이라는 숲이 황룡사 장육상의 제작지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어떤 상징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제작에 필요한 물자조달이나 작업공간의 확보, 제작 후 이동이 용이한 지형 등 보다 현실적이고 다급한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다량의 구리를 녹이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장작이 필요하다. 숲이 대상지로 선정된 것은 숲 자체의 신성함 때문이 아니라 장작의 확보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나무를 베어내고 나면 자연히 공간도 만들어진다.

또한 대형의 틀에 쇳물을 한 번에 부어 주조하기 위해서는 야트막한 언덕을 이용하는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보통은 주물틀을 땅 아래 묻은 상태에서 쇳물을 붓지만, 장육상처럼 대형의 무거운 주물을 땅에 묻어 붓고 나면 그것을 다시 꺼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트막한 언덕을 활용하면 주조 후에 그 언덕을 무너뜨려 주물을 꺼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 대신 언덕이 있던 자연경관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만약 문잉림이 신성한 곳이었다면 계림이나 신유림처럼 지속적으로 전해내려 왔겠지만, 지금은 사라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상 문잉림은 장육상을 주조하고 난 다음에는 파괴되어 숲의 기능을 잃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잉림은 최소한 불교를 신봉한 진흥왕에게는 결코 신성한 숲이 아니었으며, 어쩌면 토착신앙집단의 성소쯤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황룡사가 용궁을 위협하며 세워졌듯이, 문잉림도 장육상 주조를 위해 결국은 헐렸던 것으로 보인다.

혜통이 쫓아낸 교룡이 하필 문잉림에 숨어든 이유도 나름 있을 것이다. 불상 제작이 끝난 후 90여년, 나무는 베어지고, 불상을 파내기 위해 무너지고 검게 그을려진 언덕은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마치 귀신 나오는 폐가처럼 보이는 이 숲은 사람을 해치는 용이 머물기에 적합한 곳으로 보였으리라.

따라서 이렇게 사라진 문잉림의 위치를 찾기 위해 현존하는 숲을 뒤지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듯하다. 오히려 거대불상을 주조했던 웅덩이, 불에 탄 목재가 집중적으로 폐기된 토층 같은 흔적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그 안에서 장육상의 원형틀 파편이나마 발견될지도 모르겠다. 장육상을 황룡사까지 옮겨오는 일 역시 만만찮은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곳은 황룡사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고대의 도로로 연결되었을 그 어디쯤일 것이다. 미술사학자가 보기에 문잉림, 그곳은 글이나 상징 속의 공간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치열한 작업장이었다.

주주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85호 / 2017년 3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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