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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륵보살이 재현한 미완의 석가모니 진용-보리상

기자명 오중철

경외감으로 시작된 모사…중국에 급속 전파

▲ 막고굴 231굴 주실 천정부에 그려진 항마촉지인의 성도상. 여래의 복장이면서 보관과 목걸이, 팔찌 등의 영락장식을 한 모습이 특이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을 하나 선택한다면, 아무래도 보리수 아래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일 것이다. ‘화엄경’에서 설하는 대방광의 연화장세계가 바로 이 순간에 펼쳐진 점을 생각한다면, 깨달음의 순간에 느껴질 장엄함과 환희심이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마가다국 마하보리사서 조성
머리 보관·팔찌 찬 파격 양식
7~8세기 중국 광범위한 유행
석굴암 본존불도 그 영향받아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은 일찍부터 불교미술에서도 중요한 표현의 대상이 되어왔다. 막고굴 231굴 주실 천정부에도 성도(成道)의 순간을 표현한 불상이 여러 서상들과 함께 배치되어 있다. 한 불상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방형의 금강좌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있다. 이때, 왼손은 다리 위에서 가지런히 펼친 채 선정의 자세를 취하고, 오른손은 무릎을 감싸듯이 아래로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는 곧 정각(正覺)의 찰나에 성도를 방해하는 마왕 파순을 상대하면서, 지신(地神)을 통해 여래의 깨달음을 증명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부처님의 모습에서 여느 불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 발견된다. 바로 여래의 모습임에도, 머리에 보관을 쓰고 목걸이나 팔찌를 하는 등 흔히 보살상에서 볼 수 있는 영락장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형식적 파격을 감행한 불상은 어떻게 전파된 것이고, 또 그 존상이 담고 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에 걸쳐 중국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유행한 이 같은 유형의 불상은, 사천성 광원 천불애석굴 366굴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서 “보리상” 혹은 “보리서상”으로 불리었고, 그 연원이 당시 인도 마가다국(현 보드가야) 마하보리사에 있던 석가모니불의 성도상임이 확인되었다.

634년 보드가야의 마하보리사에서 이 상을 친견한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이 상의 유래를 전하고 있다. 이 깨달음의 장소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상을 조성하고자 하였으나,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하였다. 그때 미륵보살이 사문으로 화현하여 향기로운 진흙만으로 석가모니불의 진용(眞容)을 만들고자 하였으며, 대신 6개월간 정사(精舍) 안에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6개월이 되기 전 나흘을 남겨두고 대중들이 불안감과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문을 열어보니, 사문은 보이지 않고 불상만이 남아있었다. 불상은 상호를 구족하고 그 자태가 마치 살아있는 부처님을 보는 것과 같았는데, 다만 오른쪽 가슴 부분이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었다. 나중에 진상을 알게 된 대중들은 한편으로 신기하고 또 애석하여 미완의 가슴 부위를 포함하여 온 몸에 보관과 각종 영락으로 장식하게 되었다고 현장은 전한다.

▲ 용문석굴 뇌고대 남동 보리상. 일각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상을 두고 당시 발흥하던 밀교의 대일여래를 나타낸 상이라고 보기도 한다. 700년 전후.

현장이 귀국한 후, 많은 구법승들이 인도로 순례를 떠났다. 그 순례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바로 이 미륵보살이 만들었다는 보리상을 친견하는 것이었다. 현장의 뒤를 이어 인도에서 수학한 의정(義淨) 역시 674년경 이 보리상을 참배하였는데, 이때 고국의 많은 승려들로부터 받아온 공양물들을 함께 봉헌하였다. 보리상에 대한 인식이 이미 중국에 만연하였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대진이라는 승려가 읊은 “자비로운 어버이이신 석가여래를 만날 수 없게 되었는데, 천궁의 미륵보살이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는구나. 보리수의 진용을 뵙지 않고서 어떻게 마음을 육경에 모으고, 생각을 삼아승기겁에까지 미칠 수 있겠는가?”라는 탄식어린 말에는 보리상을 친견하고자 하는 염원이 마치 살아있는 석가모니불을 대하는 것과 같이 지극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장의 보리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에 뒤이어, 상에 대한 모사본이 곧바로 중국에 유입되었다. 유명한 외교사절인 왕현책이 인도에서 보리상을 그림으로 모사하여 장안에 돌아왔을 때, “승속을 가리지 않고 다투어 모사하였다” 한다. 의정은 “금강좌진용”, 즉 보리상의 모사상을 한 구 가지고 당나라로 돌아왔을 때, 당시 권력자였던 측천무후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용문석굴의 뇌고대에 조각된 불상들, 장안 광택사에 조각되었던 보리상들, 그리고 사천성의 마애석굴들에 조각된 불상 등 오늘날까지 곳곳에서 전해지는 유물들은 당시 만연했던 보리상에 대한 열기를 능히 짐작케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중국에서는 보관과 영락장식을 갖춘 형식의 보리상만 유행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수인(手印)의 불좌상이지만 별다른 보살형 장식을 갖추지 않은 성도상도 함께 유행하였다. 한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뚜렷하다. 8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통일신라시기에 마찬가지로 항마촉지인을 한 성도상이 급속히 퍼져나갔으나, 웬일인지 중국의 경우와 같이 보살형 장식의 성도상은 아직까지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같은 순수한 여래형의 성도상은 혹시 다른 곳에서 연원을 둔 것인가? 원로학자인 강우방이 밝혔듯이, 석굴암의 본존불은 현장이 전하는 미륵보살의 석가모니 진용의 도상과 크기, 심지어 앉은 방향(동향)까지 완벽히 재현하여 이것이 곧 보드가야 마하보리사의 보리상을 염두에 둔 것임이 확인된다.

▲ 석굴암 본존불. 본존불을 마주하면서 전해지는 경외감은 당시 미륵보살이 재현한 석가모니불의 진용을 알현하였을 때 느껴지는 감동의 연장선상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장의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본래 미륵보살이 진흙으로 빚어낸 모습은 순수한 여래형의 성도상이고, 보관이나 영락 등은 나중에 사람들이 추가로 장식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하나의 불상에 대해 두 가지 다른 도상적 해석이 존재했고, 그에 따른 다른 형식의 모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상의 원형을 고려한다면 응당 여래형의 성도상이 모사되고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감안해야 할 것은 마하보리사의 성도상은 석굴암 본존불의 크기에서 유추되듯이 비교적 규모가 큰 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장식된 보관이나 영락 등은 누군가의 우연한 공양의 결과물이 아닌, 의도된 설계 하에 보리상을 위해 정교하게 제작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된 설계’가 어떤 교리적 배경 하에 성립된 것인지의 문제는 학술적인 숙제로 남아있지만, 아무튼 이 점을 고려할 때 중국에서 이루어졌던 특별한 도상의 유행은 결코 도상의 원형에 대한 오해나 과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하나의 선택적 해석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마하보리사의 석가모니 성도상은 하나의 불상이 신앙과 교리, 그리고 불교미술의 전개에 있어 얼마나 지대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파급력은 석굴암 본존불을 마주하면서 전해오는 알 수 없는 경외감 속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중철 중국 사천대학 박사과정 ory88@qq.com
 

[1385호 / 2017년 3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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